남효온(南孝溫) 선생의 시 「행화시절(杏花時節)」에 붙여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시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에 붙여 별종 - 정현 혹시라도 별들이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빛나는 별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별빛이 특별하다고 해도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은하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현 시집 『하루』 (주)북랩, 2021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정작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는 이는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爲人(위인))’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爲己(위기))’을 공부의 핵심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빛나는 별, 그 별들이 수없이 모인 은하수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데서 시작됐다는 정현 시인의 시..
서계 박세당 선생의 「두어(蠧魚)」에 붙여 홀로 피는 꽃은 없다 - 남정림 땅끝 오지마을 바위 틈새에 외롭게 핀 꽃이라 할지라도 인적도 증발해 버린 외진 사막에 혼자서 핀 꽃이라 할지라도 홀로 피는 꽃은 없다. 수시로 찾아와 어깨 두드리는 햇살, 수건처럼 펄럭이며 땀 닦아주는 바람, 수고의 등 내밀어 받쳐주는 찰흙이 우주의 자궁에서 깨알처럼 잉태되어 꽃가루, 꽃향기, 꽃받침으로 태어난다. 지구별 안에는 별가루 하나 홀로 날리는 일 없고 먼지꽃 하나 홀로 피는 법 없다. 홀로 피는 꽃은 없다.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년) 계획했던 일들이 하나 둘 무산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람들의 오해까지 받아 의기소침해졌을 때 남정림 시인의 이..
나옹선사의 시 「청산가(靑山歌)」에 붙여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준 집은 차암 많았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교과) “어른들도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그의 유명한 소설 『어린왕자』 서문에 쓴 문구입니다. 어때요? 동의하시나요? 채송화꽃처럼 조그만 아이였..
- 혜환 이용휴 선생의 「재우중희재(在寓中戱題)」에 붙여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시집 『참 맑은 물살』 창비, 2000년) 봄날 우리 산들은 유난히 예쁩니다. 생강나무,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귀룽나무 새싹이 돋으면서 봄이 시작됩니다. 산벚꽃이 군데군데 피어날 때면 산들은 온통 애기초록 이파리들이 여백을 가득 채워 그야말로 황홀할 지경입니다. 전남의 높은 산 회문산도 봄날이면 그렇겠지요. 남도 출..
이상적 선생의 시 「기응(飢鷹, 굶주린 매)」에 붙여 눈먼 말 - 박경리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 시집 『우리들의 시간』 나남, 2010)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년~2008년) 선생의 시입니다. 요즘 세대는 잘 모르지만 5060세대에게 박경리 작가는 물을 필요 없는 대문호입니다. 그의 시집 『우리들의 시간』 첫머리에 서문처럼 이 시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기계 방앗간이 나오기 전에 마을마다 연자매라 불리는 연자방아가 있었습니다...
이달(李達) 선생의 시 「화학(畵鶴)」에 붙여 절망(絕望) -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速度)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도 오고 구원(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絕望)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전집1 시』 민음사, 1984) 현재 상태나 습관을 변화시키는 힘은 ‘반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바람은 딴 데서도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건만, 절망은 변화될 가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민주’와 ‘자유’를 갈망했던 김수영 시인은 4.19 혁명에 환호했습니다. 환호도 잠깐 불과 1년 만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한성우사분매증답(漢城寓舍盆梅贈答)」에 붙여 꽃잎의 사랑 - 이정하 내가 왜 몰랐던가, 당신이 다가와 터뜨려 주기 전까지는 꽃잎 하나도 열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이 가져가기 전까지는 내게 있던 건 사랑이 아니니 내 안에 있어서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니 아아 왜 몰랐던가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이정하 시집 『혼자 사랑한다는 것은』 명예의전당, 2002년) 사랑에 어디 높고 낮음이 있겠어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러면 된 거죠. 그런데 말이죠. 우리의 사랑은 가만히 보면 조건적인 것 같아요.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터뜨려 주어야 비로소 만개하는 거죠. 물론 꽃잎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우리 마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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