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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선사의 시 「청산가(靑山歌)」에 붙여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준 집은 차암 많았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교과)

 

 

어른들도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그의 유명한 소설 어린왕자서문에 쓴 문구입니다. 어때요? 동의하시나요? 채송화꽃처럼 조그만 아이였을 때 생각이 나시나요?

 

저는 세 살 때 기억이 나요. 충주 시골에 살던 저는 엄마 등에 업혀서 버스를 갈아타고 원주 병원에 입원해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갔었어요. 버스를 타러 가던 풍경. 중간에 길을 물어보던 두 명의 아저씨. 함께 차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 원주 시내 도로를 가로지르는 철로. 병원. 2층 계단 옆 첫 번째 있던 중환자실. 첫 번째 침대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 웃으시며 서랍에서 꺼내 주신 군밤. 1층 복도에 있던 도자기로 된 분수식 수도. 마당에 있던 커다란 파초 세 그루.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했는데, 이미 밤이 되었어요. 등불을 빌리러 한 집에 들렀는데, 주인아저씨가 마당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다가 등불을 빌려주었어요. 주인아주머니가 빌려주기 싫어했던 것도 생각나요.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전해오는 나옹선사 영정입니다. 묘적암은 나옹선사가 20세 때 이곳의 요연(了然) 스님을 찾아서 출가하였던 곳입니다. 영정은 1803년(순조 3) 제작되었습니다. 왼쪽에 용장식이 화려한 총채처럼 보이는 것이 불자(拂子)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입니다.

 

너무 장황했나요. 이렇게 세 살 기억도 또렷이 가지고 있는데도, 저도 일상에서는 예전에 어린아이였던 것을 잊고 살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이 온통 내 집이 아니라, 이리저리 밀려나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우주와 맞먹는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자꾸자꾸 작아지기만 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요. 그 의문을 가지고 고려 말의 큰 스님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충숙왕 7)~1376(우왕 2))를 만나러 갑니다.

 

 

靑山歌(청산가)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의 노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누가 지은 지는 모르지만 어디선가 보았죠. 그것도 많이요. 이 시를 지은 이가 바로 나옹선사입니다. 이 시를 보면 저는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말없이, 티 없이, 사랑도 벗어놓고 미음도 벗어놓으면 물같이 바람같이 살 수 있을까요? 힘들겠지만 노력해보고 싶어요.

 

 

경상북도 영덕에 있는 장육사입니다. 나옹화상은 자신이 태어난 곳 근처에 장육사를 세웠습니다.

 

나옹스님은 20세에 출가합니다. 28세 되던 1348(충목왕 3) 11월 원나라 수도였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음 해 3월 연경 법원사에서 118대 조사(祖師) 지공선사(指空禪師)를 만납니다. 지공선사는 나옹선사를 으뜸 제자로 삼습니다. 어느 봄날 절에 매화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매화꽃을 본 지공선사는 게송(偈頌) 지어 나옹선사에게 주었습니다. 참고로 게송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葉靑花發一樹一(엽청화발일수일)

十方八面無對一(시방팔면무대일)

前事不問後事長(전사불문후사장)

香氣到地吾帝喜(향기도지오제희)

 

꽃잎도 푸르스름,

피었구나

매화야.

그렇듯 한 송이만

피었구나

매화야.

하늘과 땅 사이라

짝할 이 그 누굴까?

알아 무엇하리

가벼린 날들이야,

앞날이여,

길이길이

고운 빛만 물고 오리니,

그 내음 깨지는 곳마다

기뻐하리

우리 님.

 

 

에에 나옹선사가 화답합니다.

 

 

年年此樹雪裡開(연년차수설리개)

蜂蝶忙忙不知新(봉접망망부지신)

今朝一箇花滿枝(금조일개화만지)

普天普地一般春(보천보지일반춘)

 

해마다

눈 올 때면

매화야 너는 피었겠지.

나비는 훨훨 돌아오고

벌은 바삐 날아가도,

목을 빼어 기다릴 뿐

새봄인 줄 몰랐구나.

이 아침, 매화꽃

다시 피고

그 꽃 한 송이

살포시 문,

가지 끝을 따라

온 하늘 온 땅 가득

왔구나

봄아.

 

 

무비(無非) 스님이 번역한 나옹스님 어록을 참고했는데, 무비 스님의 번역이 너무 좋아 원본 그대로 옮겨봅니다.

 

 

무학대사 승탑입니다. 뒤로 보이는 승탑은 지공선사 승탑입니다. 지공선사 승탑 뒤 계단을 오르면 나옹선사의 승탑이 나옵니다. 고려 말 지공선사 - 나옹선사 - 무학대사가 사승관계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승탑이 나란히 있는 것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무학대사 승탑은 보물 제388호이고, 지공선사 승탑은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입니다.

 

나옹선사는 31세 되던 1350(충정왕 2) 중국 남쪽으로 내려가 임제선(臨濟禪)의 고승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납니다. 평산스님이 나옹스님의 그릇을 금방 알아봅니다. 그리고 가사(袈裟)와 불자(拂子)를 전해줍니다. 가사는 승려의 옷이고, 불자는 고승들이 들고 있는 총채처럼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전해준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전해준다는 뜻입니다. 평산스님은 이때 게송을 짓습니다.

 

 

拂子法衣今付囑(불자법의금부촉)

石中取出無瑕玉(석중취출무하옥)

戒根永淨得菩提(계근영정득보제)

禪定慧光皆具足(선정혜광개구족)

 

오늘,

이 가사와 불자를

그대에게 맡기련다.

그대는 돌 속에서 꺼낸

티 없는

옥이로구나.

영영 맑은 그 계행은

깨달았기 때문이지.

선정과 지혜의 빛

함께 갖춘 그대여.

 

 

나옹선사는 39세 되던 1358(공민왕 7) 고려로 돌아옵니다. 다음 해 평생의 제자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충숙왕 14)1405(태종 5)를 만납니다. 나옹선사의 법이 무학대사로 전해져 조선 불교의 중추가 됩니다.

 

 

無學(무학)

 

歷劫分明若大虛(역겁분명약대허)

何勞萬里問眀師(하로만리문명사)

自家財寶猶難覓(자가재보유난멱)

得髓傳衣枝上枝(득수전의지상지)

 

무학

 

억겁토록 분명하여 허공 같은데

무엇하러 만 리에 밝은 스승 찾는가

제 집의 보물도 찾기가 어려운데

골수를 얻어 가사를 전하는 것, 가지 위의 가지다

 

 

나옹선사가 42세 되던 1361(공민왕 10) 왕의 요청으로 궁궐에 들어가 설법을 합니다. 그날 설법의 첫머리를 나옹화상 어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참 모습이야

텅 빈 하늘 같건만,

부르면 벌써 오시네

물 속 저 달처럼.”

(佛眞法身 猶若虛空 應物現形 如水中月)

 

설법을 들은 왕태후의 요청으로 개경(開京, 개성) 신광사(神光寺)에 주지로 부임합니다. 곧바로 홍건적의 20만 대군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 갑니다. 난을 피하기 위해 개경이 온통 아비규환이 되었음에도 나옹선사는 신광사를 지켰습니다. 물론 홍건적이 신광사에도 들어왔지만, 장수들이 오히려 선사에게 설복되어 선사에게 공손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신광사가 무사했음은 물론이고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암사지(檜巖寺址)입니다. 회암사는 나옹선사가 오랫동안 머무르던 절입니다. 지공선사의 바람대로 이곳을 대가람으로 중창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회암사는 고려 말에는 262칸에 거주 스님이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 남은 잔해만 보아도 그 화려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70(공민왕 19) 원나라 사도(司徒, 가장 높은 벼슬 중 하나) 달예(達叡)가 사신이 되어 고려로 올 때 지공선사의 영골(靈骨, )과 사리를 함께 가지고 옵니다. 나옹선사는 지공선사의 영골과 사리에 참배하고 시를 짓습니다.

 

 

來無所來(내무소래)

如朗月之影現千江(여랑월지영현천강)

去無所去(거무소거)

似澄空之形分諸刹(사징공지형분제찰)

且道指空畢竟在什麽處(차도지공필경재십마처)

 

왔어도 온 것이 없으니

밝은 달그림자가 강물마다 나타난 것 같고

갔어도 간 곳 없으니

맑은 허공의 형상이 모든 세계에 나누어진 것 같다

말해보라 지공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나옹선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집정기와 일치합니다. 아시다시피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쓰면서 고려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분입니다. 당시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정권,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타락하고 해이해졌습니다. 뭔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불교 혁신에 앞장섰던 분이 나옹선사와 태고(太古) 보우선사(普愚禪師)입니다. 공민왕은 나옹선사를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로 삼습니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던 고려처럼 피폐해진 불교를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정을 새롭게 장악해가는 신진사대부들은 나옹선사를 내몹니다. 우왕(禑王)은 사대부의 주장에 밀려 나옹선사를 밀양 영원사(瑩源寺) 주지로 내려 보냅니다.

 

 

양주시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 승탑입니다. 회암사지 뒤에 있는 회암사 대웅전 옆 능선 위에 있습니다.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입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입니다. 나옹선사의 시호(諡號)가 ‘선각(禪覺)입니다. 회암사지 뒤에 있는 회암사의 맨 위 건물인 삼성각 옆으로 난 등산로 계단을 오르면 능선에 있습니다. 비각에 놓여 있었는데, 1997년 산불로 비각이 타면서 그 열기로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고 귀부만 남았습니다. 1999년 그 앞에 복제해서 다시 세웠습니다. 보물 제387호입니다.

 

몸이 좋지 않던 나옹선사는 밀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여주 실륵사에서 입적합니다. 때는 1576(우왕 2)으로 스님의 속세 나이 57세였고, 스님이 된 나이 법랍(法臘) 37세였습니다. 한 달 뒤 불교식 화장인 다비(茶毘)를 하였는데, 155과의 사리가 나왔습니다. 사리는 나옹선사가 중창한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모셨습니다. 회암사와 신륵사에는 탑비도 세웠습니다. 비문은 고려의 대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선생이 지었습니다. 비문 중 돌아간 이를 찬양하는 시()인 명() 일부를 보겠습니다.

 

 

普濟尊者諡禪覺塔銘(보제존자시선각탑명)

 

展也禪覺(전야선각) 惟麟之角(유린지각)

王者之師(왕자지사) 人天眼目(인천안목)

 

萬衲宗之(만납종지) 如水赴壑(여수부학)

而鮮克知(이선극지) 所立之卓(소립지탁)

 

- 중략 -

 

空耶色耶(공야색야) 上下洞徹(상하통철)

邈在高風(막재고풍) 終古不滅(종고불멸)

 

보제존자 시(諡) 선각(禪覺)의 탑명(塔銘)

 

참으로 참선을 깨치신 이여,

기린의 뿔이로다.

임금님의 스승이요,

사람과 하늘의 밝은 눈이로다.

 

수행자라면 다 우러러

물이 골짝으로 모이듯 했으나,

세우신 그 가르침 우뚝함이여,

아는 이가 참 드물었다.

 

- 중략 -

 

없음인가 있음인가?

위아래로 훤히 밝았나니,

아득해라, 빼어난 모습이어,

길이 함께 계시리.

 

 

나옹선사는 시를 잘 지은 스님으로도 유명합니다. 좋은 시들이 참 많지만, 지면의 한계가 아쉽네요. 아쉬움 때문에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孤舟(고주)

 

一隻孤舟獨出來(일척고주독출래)

滿江空載月明歸(만강공재월명귀)

魚歌獨唱歸何處(어가독창귀하처)

佛祖從來覔不知(불조종래멱부지)

 

외로운 배

 

배 한 척이 외롭게 나갔다가

빈 배에 가득 밝은 달만 싣고 돌아오네

어부가를 홀로 부르며 어디로 돌아가는지

부처와 조사는 도무지 찾을 줄을 모르네

 

 

나옹선사의 흔적을 찾으러 2023년 5월 24일 회암사에 들렀습니다. 나옹선사탑 옆에 여름을 여는 꽃인 의아리가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기는 나옹선사의 법향(法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옹선사의 시와 어록을 읽으면서 저는 마음이 많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래 소개하는 정현 시인의 시 어리광을 읽으면서 큰 스님의 법어(法語)처럼 느꼈습니다. 저도 맘 놓고 어리광 부릴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누군가가 맘 놓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리광

- 정현

 

오늘 밤을 제쳐두고

흰눈이 말하네요

 

내가 왔다고

이렇게도 많이 내리며

계속해서 말하네요

 

내가 왔는데

도대체 어딜 보냐며

밤의 색을 지워가네요

 

내가 봤다고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계속 봤다고

 

달래고 얼러도

멈추지 않고 내리네요

(정현 시집 『하루』 북랩, 2021년)

 

 

[참고 문헌]

 

* 나옹스님 어록(무비(無非) 역주, 민족사, 1996)

* 나옹왕사의 법향(현담, 영덕불교사암연합회, 2021)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 블로그 산에는 꽃이 피네

* 한국고전종합DB

* 국가문화유산포털

* 국립중앙박물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023년 6월 8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