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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 선생의 「두어(蠧魚)」에 붙여

 

 

홀로 피는 꽃은 없다

- 남정림

 

땅끝 오지마을 바위 틈새에

외롭게 핀 꽃이라 할지라도

인적도 증발해 버린 외진 사막에

혼자서 핀 꽃이라 할지라도

홀로 피는 꽃은 없다.

 

수시로 찾아와 어깨 두드리는 햇살,

수건처럼 펄럭이며 땀 닦아주는 바람,

수고의 등 내밀어 받쳐주는 찰흙이

우주의 자궁에서 깨알처럼 잉태되어

꽃가루, 꽃향기, 꽃받침으로 태어난다.

 

지구별 안에는

별가루 하나 홀로 날리는 일 없고

먼지꽃 하나 홀로 피는 법 없다.

홀로 피는 꽃은 없다.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년)

 

 

계획했던 일들이 하나 둘 무산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람들의 오해까지 받아 의기소침해졌을 때 남정림 시인의 이 시를 보았습니다. 의지할 것 없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했는데, 이 시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홀로 피는 꽃은 없듯이 제게도 여전히 많은 안전판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흔들렸던 건 나빠진 상황보다는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유학(儒學)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목표도 당연히 그러했겠죠. 그러나 인격을 완성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격을 완성시키려 끝없이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이지도 모르지요.

 

 

서계 박세당 선생 영정. 원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서계 종택 영정각에 있는 선생의 영정은 종가에서 따로 마련한 사본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한시산책의 주인공 또한 그런 분입니다. 당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시대에 살면서 정치 일선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해 끝없이 노력했던 현인(賢人)입니다. 농사지침서인 색경(穡經)을 지은 실학의 선구로 국사 교과서에 소개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인조 7)~1703(숙종 29))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新屋(신옥)

 

五間新屋經時就(오간신옥경시취)

林燕山禽共落成(임연산금공락성)

擁戶畫圖千嶂立(옹호화도천장립)

繞床琴筑一泉鳴(요상금축일천명)

門前池可求魚養(문전지가구어양)

籬下田堪借犢耕(이하전감차독경)

世事不豐幽意足(세사불풍유의족)

從他人笑拙謀生(종타인소졸모생)

 

새집

 

다섯 칸 새집 시일 걸려 이루어지니

숲의 제비 산의 새 함께 낙성하누나

우뚝 선 봉우리들 집을 둘러싼 그림이요

졸졸 흐르는 샘물 상에 퍼지는 거문고라

문 앞의 못엔 고기 잡아 기를 만하고

울 아래 밭은 송아지 빌려 갈 만하여라

세상일 많지 않고 그윽한 정취 넉넉하니

남들이 웃건 말건 졸렬히 삶을 도모하리

 

 

박세당 선생은 32세 되던 1660(현종 1)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합니다. 아버지 박정(朴炡, 1596(선조 29)1632(인조 10))은 인조반정의 공신입니다. 집안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벼슬길이 탄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한지 10년 만에 벼슬을 접고 수락산 자락으로 낙향합니다. 위의 시는 그곳에 처음 집을 지을 때 지은 시입니다.

 

 

바깥 마당에서 바라본 서계 종택입니다. 오른쪽 사랑채가 원래부터 있던 건물이고요, 안채와 사랑채 뒤 영정각은 6.25 때 불에 타 뒤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은 자신이 은거를 택한 이유로 재주와 역량이 보잘것없어 세상에서 큰일을 하기에 부족한 데다 세상도 날로 도가 쇠해져 바로잡을 수 없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관직을 벗어버리고 물러났다 하였습니다. 당쟁이 격화돼 일의 옳고 그름보다 자기 당파에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논쟁의 기준이 되는 게 싫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이 속했던 서인당은 이미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선생은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春帖(춘첩)

 

靑山不改色(청산불개색)

流水不改聲(유수불개성)

唯願主人翁(유원주인옹)

不改幽棲情(불개유서정)

 

춘첩

 

청산도 빛깔을 바꾸지 않고

유수도 소리를 바꾸지 않네

오직 바라건대 주인 노인도

은거의 뜻을 바꾸지 말기를

 

 

춘첩(春帖)은 봄이 막 시작된다는 입춘(立春) 날에 새해 소망을 적어 대문이나 기둥에 걸어두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건양다경(建陽多慶) 등도 그것의 일종입니다. 박세당 선생은 춘첩을 쓰면서도 벼슬을 절대 안 하고 은거할 것을 결심합니다.

 

 

所種桃(소종도) 今年始頗開花(금년시파개화)

 

傍溪手種桃千樹(방계수종도천수)

得到今年初見花(득도금년초견화)

居較武陵深更僻(거교무릉심갱벽)

何人知此有人家(하인지차유인가)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가 금년에 비로소 제법 꽃을 피우다

 

시냇가에 손수 심었던 복숭아나무 천 그루

금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꽃을 피웠네

무릉도원에 비견되는 거처 깊고도 외지니

그 누가 이곳에 인가가 있는 줄 알리오

 

 

道峯(도봉)

 

不識溪西山幾重(불식계서산기중)

森森倚疊玉芙蓉(삼삼의첩옥부용)

我家住在東岡下(아가주재동강하)

門對當頭第一峯(문대당두제일봉)

 

도봉산

 

모르겠어라 시내 서쪽 산 몇 겹인지

옥부용이 첩첩으로 늘어선 듯하여라

나의 집은 동쪽 언덕 아래에 있나니

문은 제일봉을 마주 대하였다오

 

 

박세당 선생은 수락산 자락, 석림사 계곡 옆에 집을 지었습니다. 담을 쌓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삼았다고 합니다. 위의 시처럼 천 그루 복숭아나무를 심었으니 복사꽃이 필 때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당에서는 도봉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보면 도봉산은 겹겹이 솟아 있는 푸른 연꽃처럼 보입니다.

 

 

서계 종택 안마당에서 바라본 도봉산입니다. 박세당 선생은 도봉산을 ‘푸른 옥빛 연꽃이 하늘 가득 치솟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순탄할 것만 같았던 박세당 선생의 삶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선생이 58세 되던 1686(숙종 12) 선생의 큰아들인 박태유(朴泰維, 1648(인조 26)1686(숙종 12))가 죽습니다.

 

박태유는 왕과 신하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바로잡는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벼슬을 했습니다. 이때 거짓 역모를 지어낸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했는데, 거꾸로 임금에게 밉보여 함경도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됩니다. 박태유는 원래 몸이 약했는데, 함경도의 혹독한 추위에 병이 심해져 39살 나이에 죽었습니다. 박세당 선생은 절망한 아버지의 심정을 시로 담았습니다.

 

 

述悲(술비)

 

目猶識物(목유식물)

不見汝形(불견여형)

耳尙辨音(이상변음)

不聞汝聲(불문여성)

汝去何往(여거하왕)

滅影息響(멸영식향)

我悲不勝(아비불승)

終竟此生(종경차생)

 

슬픔

 

눈 아직 어둡지 않은데

네 모습 뵈지 않는구나

귀 아직도 밝은데

네 목소리 들리지 않는구나

너는 어디로 갔길래

그림자도 메아리도 없느냐

내 못 견디게 슬퍼

죽을 것만 같구나

 

 

원래 3수로 된 시지만, 지면 관계상 첫 수만 옮겼습니다. 그러나 첫 수만 보아도 자식 잃은 아버지의 비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슬픔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3년 뒤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 1654(효종 5)1689(숙종 15)) 또한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가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덧나 노량진에서 죽습니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가 부당하다고 상소하였다가 죽임을 당한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1695년(숙종 21) 노량진에 건립된 서원입니다. 박태보는 박세당 선생의 둘째 아들입니다. 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6.25 한국전쟁 때 불타서 1969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박세당 선생은 은거한 이후에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제자를 키웁니다. 그리고 틈틈이 저술활동을 지속합니다.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상서(尙書)· 시경(詩經)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그리고 도가(道家)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를 지었습니다.

 

박세당 선생은 죽기 1년 전인 1702(숙종 28) 1274세의 노령임에도 영의정을 지낸 백곡(栢谷) 이경석(李景奭, 1595(선조 28)1671(현종 12)) 선생의 신도비문을 짓습니다. 신도비문에서 박세당 선생은 이경석 선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칭하여 높이고, 이경석 선생을 비방했던 송시열을 불상인(不詳人)이라며 준엄히 성토합니다. 신도비문이 공개되자 송시열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노론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박세당 선생을 공격합니다.

 

신도비의 비명(碑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恣僞肆誕。世有聞人。梟鳳殊性。載怒載嗔。不善者惡。君子何病)

 

이경석 선생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의 압박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쓴 사람입니다. 이경석 선생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치욕을 감수하며 비문을 썼습니다.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동분서주했던 분입니다. 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송시열은 그런 이경석 선생을 금()나라에 항서(降書)를 쓴 송나라 손적(孫覿)에 비유하면서 비난하였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송시열은 이경석에게 혼인을 청했다가 성사되지 않았다. 또 현종(顯宗)이 온천으로 거둥할 때 이경석이 상소를 하여 시골에 있는 조정의 신하들이 문안오지 않은 자를 논박하자 송시열이 그것이 자신을 핍박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상소를 올렸다.’

 

박세당 선생은 송시열의 행태에 대하여 준엄하게 비판한 것인데, 송시열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노론당에서는 박세당 선생의 사상을 문제 삼습니다. 선생이 쓴 유학(儒學)의 주요 텍스트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해설서 사변록이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는 이유로 선생을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규정합니다. 그야말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결국 숙종 임금은 박세당 선생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전라도 옥과(玉果)에 유배하도록 하였다. 물론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인해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을 거두어들였지만 말입니다.

 

선생은 이런 소동이 있고 약 한 달 뒤 숨을 거둡니다. 이때의 심정을 담은 시 한 수를 보겠습니다. 자조하는 듯하지만, 제게는 자부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蠧魚(두어)

 

蠧魚身向卷中生(두어신향권중생)

食字年多眼乍明(식자년다안사명)

畢竟物微誰見許(필경물미수견허)

秪應長負毀經名(지응장부훼경명)

 

좀벌레

 

좀벌레라는 놈 평생 책 속에서 살면서

다년간 글자를 먹더니 눈이 문득 밝아졌네

뉘에게 인정받으랴 그래 봐야 미물인 걸

경전 망쳤단 오명만 영원히 뒤집어쓰겠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이 있으니, 정에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있다. 이 몇 가지 정이 마음에 쌓이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데, 말에는 장단(長短)과 절주(節奏)가 있으니, 이것이 시()이다. 시는 본래 의(, )와 정을 표현하는 것이니, 정과 의에 맞으면 그만이지 진실로 공교하게 다듬을 것은 없다.’

 

선생이 쓴 김득신(金得臣, 1604(선조 37)1684(숙종 10)) 시문집 백곡집(柏谷集)() 일부입니다. 선생은 사람의 감정에 충실한 시를 높이 쳤습니다. 선생의 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시가 더 와 닿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계 종택 뒤 언덕에 있는 박세당 선생 묘소입니다. 박세당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잡아놓은 자리로 첫 번째 부인 의령 남씨, 두 번째 부인 광주 정씨와 함께 묻혀 있습니다.

 

박세당 선생은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의 굴레를 벗어나려 노력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유롭게 학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죠. 지면 관계상 사상편력에 대하여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시도 좀 더 소개했으면 좋았겠고요. 끝으로 생가며, 영정각, 묘소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시고 설명해 주신 김인순 서계 종택 종부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런가요. 요즘은 더더욱 사람들의 대면 만남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깊이를 더 하려면 아무래도 서로 마주 볼 시간이 많을수록 좋겠죠? 마음에 두고 있는 이와 우산을 같이 쓰면 날씨마저 바뀐답니다. 어때요. 소나기가 많은 여름날 우산을 가지고 다녀야 할까요? 아님 두고 다녀야 할까요?

 

 

우산을 깜박할 것 같아요

- 정현

 

날씨가 우중충한 게

곧 비가 올 거 같아요

 

그쪽이 들고 있는 건

우산인가요?

 

아 저는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도 못 챙겼네요

 

같이 쓰기엔 좁지 않나요?

분명 불편할 거예요

 

우산 속 날씨가

다른 것 같아요

신기하죠

 

내일도 비가 온다더군요

내일도 왠지

(정현 시집 『반나절』 (주)북렙, 2019년)

 

 

2023년 7월 10일 씀

2023년 7월 18일 입력

 

 

[참고 문헌]

 

* 서계 박세당 문학의 연구(최윤정, 혜안, 2011)

* 당의통략(이건창 지음, 이덕일 이준녕 역, 자유문고, 1998)

* 한국고전종합DB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