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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南孝溫) 선생의 시 「행화시절(杏花時節)」에 붙여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시집 『沙平驛(사평역)에서』 창비, 2011년)

 

 

기다리는 것은 좀처럼 오지 않는가요.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연장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들만 꾸역꾸역 할 뿐입니다. 왔다가 떠나는 밤 열차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다립니다. 그리웠던 순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새김하며 꺼내어 부르면서요.

 

오늘 소개하는 한시(漢詩)의 주인공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선생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전(六臣傳)을 남긴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입니다. 추강 남효온 선생의 시와 삶을 살펴보면서 저는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가 떠올랐습니다.

 

 

영월 창절사(彰節祠). 창절사는 장릉경내에 건립하였던 육신사(六臣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70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1709년 '창절사'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습니다. 당초에는 사육신만이 배향되었으나 창절사로 사액되면서 김시습과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가 추가로 배향되었습니다. 보물 제21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추강 선생의 절친한 벗 조신(曺伸) 선생은 추강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아래와 같은 시로 표현했습니다. 손수 추강 선생의 시와 문장을 모아 추강집(秋江集)이라는 이름으로 문집을 만들 때 쓴 발문(跋文)의 첫 머리입니다.

 

 

書秋江集後(서추강집후)

 

天生吾秋江(천생오추강)

耿介立於獨(경개입어독)

性不喜苟合(성불희구합)

脫屣遠恥辱(탈사원치욕)

醉談空崢嶸(취담공쟁영)

傲世長捧腹(오세장봉복)

出位論國是(출위논국시)

破家身後戮(파가신후륙)

- 하략 -

 

추강집 뒤에 적다

 

하늘이 우리 추강을 낳으니

곧은 절개로 세상에 홀로 섰네

성품이 구차히 영합하기 싫어하여

세상을 피하여 치욕을 멀리했네

취중의 얘기는 공연히 준엄했고

세상을 경시하며 늘 크게 웃었네

지위에 벗어나 국시(國是)를 의논하다

집안을 깨뜨리고 부관참시당했네

- 하략 -

 

 

남효온 선생은 조선개국 1등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 1351(고려 충정왕 3)~1419(세종 1))5대손입니다. 명문 집안의 출신으로 시와 문장에도 능해 어려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25세 되던 1478(성종 9) 올린 한 장의 상소(上疏)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른바 소릉(昭陵) 복위 상소입니다.

 

소릉은 문종 임금의 왕비이며, 단종 임금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입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렸다 일반 백성에 해당하는 서인(庶人)으로 강등합니다. 세조는 현덕왕후의 동생 권자신(權自愼, ?~1456(세조 2))이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능을 파서 서민의 묘처럼 옮기고, 신주(神主)를 종묘에서 내칩니다.

 

 

구리 동구릉에 있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현릉. 사진 오른쪽이 현덕왕후의 능입니다. 현덕왕후는 1441년(세종 23)에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昭陵)에 모셔졌었습니다.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1512년(중종 7)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년(중종 8)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 만에 천장하였습니다.(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남효온 선생은 현덕왕후의 소릉을 복원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실 것을 상소로 건의합니다. 이 상소에 훈구공신들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훈구공신들은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앞장섰던 이들입니다. 단종을 죽이고,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치는 데도 앞장섰던 이들입니다. 공신들은 남효온 선생의 상소를 자신들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겼습니다. 공신들은 남효온 선생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題幸州草亭(제행주초정)

 

靑蘆洲上繫漁舟(청로주상계어주)

一水西流二麥秋(일수서류이맥추)

雲逐過風吹作雨(운축과풍취작우)

江廬一夜契沙鷗(갈려일야계사구)

 

행주의 초정(草亭)에 적다

 

푸른 갈대 모래톱에 고기잡이배 매어두고

강물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밀 보리를 거두네

구름은 스쳐 가는 바람 따라 비를 뿌리는데

강가 오두막에서 밤새 갈매기와 동무하네

 

 

남효온 선생은 30세 되던 1483(성종 14)에 벼슬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접고 현 고양시 행주로 낙향합니다. 위의 시는 낙향한 다음에 지은 시입니다. 시에서처럼 선생은 강에 나가 낚시를 하기도 하고, 손수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특히 이 시 마지막 밤새 갈매기와 동무하네구절은 의미심장합니다. 세속적인 출세에 욕심이 없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입니다. 이 그림은 1741년(영조 17)~1759년(영조 35) 사이에 그려진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있습니다. 보물 1950호입니다. 남효온 선생이 벗들과 어울렸던 압도(鴨島)는 그림 왼쪽 바위언덕 뒤쪽에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그러하지 않은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묘하게 품는 마음을 기심(機心)’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도가(道家) 경전 중 하나인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에 의하면 기심을 잊으면 갈매기와 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심을 잊고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간 것을 망기(忘機)’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는데, 위 시 구절은 바로 망기를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挽安子挺(만안자정)(六)

 

幾日同携酒(기일동휴주)

淸痕汚褐衣(청흔오갈의)

宵行紅杏吐(소행홍행토)

幽討菊花肥(유토국화비)

燃竹如來寺(연죽여래사)

啗菁栗島磯(담청율도기)

翻思猶往事(번사유왕사)

腸斷永睽違(장단영규위)

 

안자정(安子挺)에 대한 만사(6)

 

며칠이나 함께 술잔 잡았었던가

맑은 술 얼룩이 베옷 물들였었지

밤거리 돌아다닐 때 살구꽃 피었고

그윽이 찾았을 때 국화 살쪘었지

여래사에서 대를 불살라 술을 끓였고

율도 물가 바위에서 무 반찬 씹었었네

돌이켜 생각건대 오히려 지난 일이라

영원한 이별에 이내 간장 끊어지누나

 

 

동갑이며 절친한 벗 안응세(安應世, 1454(단종 2)~1480(성종 11))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입니다. 자정(子挺)은 안응세의 자()입니다. 6(六首)로 되어 있는데, 위 시는 여섯 번째입니다. 온통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즐거운 추억은 벗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합니다.

 

며칠이고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살구꽃이 피는 밤이면 장안 거리를 마구 돌아다니다 꽃그늘에서 술자리를 열었습니다. 음력 10월에 아직도 탐스런 국화꽃을 꺾어 눈 위에 꽂아놓고 술을 데워 마시기도 했습니다. 꿈도 많고 패기 넘치던 젊은 날이었습니다.

 

남효온 선생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선생 두 살 때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합니다. 이를 바로잡으려는 단종 복위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킨 조카 단종(端宗)을 살해합니다. 바름()이 사악함()이 되고, 충신이 역적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악함이 바름이 되고, 역적이 충신이 되었습니다. 공신(功臣)이 되어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였습니다.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조선의 건국정신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다행스럽게 13세 어린 나이에 등극한 성종(成宗) 임금은 학문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젊은 학자들은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이라는 걸출한 선생을 따르기도 하고, 성균관에서 유학(儒學)의 기초적인 지침서인 소학(小學)을 공부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해 머리 깎고 중이 되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1493(성종 24)) 선생도 환속하여 돌아왔습니다.

 

 

남효온 선생과 정부인 파평 윤씨 합장묘입니다. 고양시 대장동에 있었는데, 도시화로 1987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주소는 김포시 하성면 후평리 1-5입니다.

 

남효온 선생은 바름과 사악함, 충신과 역적을 바로잡고자 육신전(六臣傳)·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저술합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이른바 정명(正名)입니다. 선생의 기록은 대부분 당대에 금기시 하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소릉(昭陵) 복위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나 조정(朝廷)은 훈구공신들이 요지부동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의 개혁 요구는 국가를 어지럽히는 작당(作黨) 모의(謀議)로 간주되어 탄압받았습니다. 귀양을 가기도 하고, 꿈을 접고 뿔뿔이 훑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연산군이 등극한 다음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대부분 사형당하였습니다. 이미 죽은 남효온 선생은 무덤의 시신을 꺼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습니다. 하나 남은 아들도 사형당하였고요.

 

 

題四仙亭(제사선정)

 

巖前采藿(암전채곽)

巖面采蛤(암면채합)

坐久無心(좌구무심)

白鷗甚狎(백구심압)

滄溟無津(창명무진)

坤軸無極(곤축무극)

是知身世(시지신세)

太倉一粟(태창일속)

心兮本虛(심혜본허)

動靜如水(동정여수)

波伏而伏(파복이복)

波起而起(파기이기)

- 하략 -

 

사선정(四仙亭)에 적다

 

바위 앞에서 미역 캐고

바위에 붙은 대합 캐네

오래 앉았다 무심해지니

갈매기 매우 가까이 오네

푸른 바다 닿을 곳 없고

땅의 중심축은 끝이 없네

이제 알겠노라 이 신세

큰 창고의 한 좁쌀임을

마음은 본래 텅 비었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물과 같은지라

물결이 자면 고요하고

물결이 일면 움직이네

- 하략 -

 

 

남효온 선생은 30세가 되던 1483(성종 14) 고양 행주로 낙향합니다. 그리고 이태 뒤인 1485년 홀로 금강산 유람길을 떠납니다. 위의 시는 금강산 유람 중 삼일포 사선정에서 지은 시입니다. 육로와 물길, 산길 합쳐 1,600여리의 먼 길을 걸었습니다. 유람을 하면서 남효온 선생은 유학(儒學)에 더욱 정진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사선정도(四仙亭圖)입니다. 보물 제1875호로 지정된 14폭 된 풍악도첩(楓嶽圖帖)에 있습니다. 사선정은 금강산 삼일포 호수 안에 있습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남효온 선생은 그 뒤로도 개성으로 전라도로, 공주로, 경상도 의령으로 수없는 유람을 떠납니다. 벗들 없이 홀로 지리산을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때로 벗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이 쌀을 대줄 정도로 가세는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작은 아들은 학질에 걸려 갓 열 살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선생은 아이가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걸린 거라 여겨 더욱 애통해합니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기대를 모았던 첫째 사위도 죽습니다. 몸의 병은 더욱 깊어져 죽음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杏花時節(행화시절)

 

携兒散步歷山陂(휴아산보력산피)

紅杏梢頭月午時(홍행초두월오시)

半死心隨春意動(반사심수춘의동)

臨風折得最繁枝(임풍절득최번지)

 

살구꽃 핀 계절

 

아이 데리고 산보하며 산비탈 지나가니

붉은 살구 가지 끝엔 한밤 달 걸렸구나

반 넘어 죽은 마음이 봄뜻 따라 움직여

봄바람 맞으며 꽃 가장 많은 가지 꺾노라

 

 

이 시의 원 제목은 살구꽃 핀 계절 어느 날 밤 고향 집에서 달빛을 타고 충세(忠世)를 따라 집 뒤 작은 언덕에 올라 살구꽃 아래에 앉아 완상하다(杏花時節鄕家一夜乘月從忠世登家後小隴杏花下坐玩)입니다. 충세(忠世)는 하나 남은 아들이고요.

 

 

덕수궁 석어당 앞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살구꽃이 가득 피었습니다. 남효온 선생이 사실 때 남산에도, 한양 도성 안 민가에도 은거했던 고양 행주에도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했었 나봅니다. 남효온 선생의 시에 살구꽃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데, 아마도 젊었을 때 벗들과 어울렸던 아름다운 추억 때문인 듯합니다.

 

세월이 흘러 뭇 사람들이 남효은 선생을 뜻이 크고 곧은 절개 세상에 우뚝 섰다고 인정했지만, 당대에는 늘 시기와 비방을 받아야 했습니다. 선생의 말대로 세상인심은 정의로워도 힘을 잃고 약해지면 싫어하니 누가 고단한 나를 위로하려 할까. 하지만 남효온 선생은 마지막까지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꽃 가장 많은 가지를 꺾어 곁에 두듯이요.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훗날이라도 바름과 사악함, 충신과 역적을 바로잡을 수 있었고, 선생의 삶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후학들이 외롭고 힘들어도 의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시대의 등불이 되었다고 봅니다.

 

인류는 핏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기억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기억한다면 의로운 길로 미루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 이병철

 

밤새 비 내렸는데

피었다

환한 달맞이 꽃

 

빗속으로 날아온다

노란 나비 한 마리

 

미루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

당신의 사랑.

(이병철 시집 『흔들리는 것들에 눈 맞추며』 들녘, 2012년)

 

 

2023년 11월 10일

풀소리 최경순

 

 

[참고 문헌]

 

* 남효온 평전(한겨레출판, 2020)

* 한국고전종합DB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중앙박물관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