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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시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에 붙여
별종
- 정현
혹시라도 별들이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빛나는 별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별빛이
특별하다고 해도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은하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현 시집 『하루』 (주)북랩, 2021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정작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는 이는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爲人(위인))’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爲己(위기))’을 공부의 핵심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빛나는 별, 그 별들이 수없이 모인 은하수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데서 시작됐다는 정현 시인의 시가 예사롭지 않게 읽힙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입니다. 500년이 넘는 왕조였던 만큼 수많은 걸출한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한 공부(爲己之學(위기지학))에 충실했던 선비들도 많고요. 저는 그런 선비들 중 스케일로 본다면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선생이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식 선생은 한없이 큰 지리산을 닮고 싶어 했습니다. 61세에는 지리산이 멀리 보이는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터전을 잡습니다.
德山卜居(덕산복거)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덕산에 살 곳을 잡고서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다만 하늘 가까이 있는 천왕봉을 사랑해서라네
빈손으로 들어와서 무얼 먹고 살 건가?
은하 같은 물 십리 흐르니 먹고도 남으리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4)) 선생과 동갑입니다. 당시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 좌도를 대표하는 학자가 퇴계 선생이라고 한다면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 우도를 대표하는 학자가 남명 선생입니다. 두 분은 당대를 대표하는 대학자였지만, 성향이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명 선생은 늘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칼을 경의검(敬義劍)이라고 했습니다. 그 칼에 마음을 다잡는 명(銘)을 새겼습니다. 이것이 「패검명(佩劍銘)」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일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
(內明者敬 外斷者義)
퇴계 선생은 특히 ‘경(敬)’을 중시했습니다. 기대승(奇大升, 1527년(중종 22)∼1572년(선조 5)) 선생과 벌였던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보듯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남명 선생은 ‘경(敬)’ 못지않게 ‘의(義)’를 중시했습니다. ‘결단’하는 것은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행동이죠. 철학적으로는 형이하학(形而下學)입니다.
‘의(義)’를 중시하는 남명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걸출한 의병장들이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임진왜란 때 대표적인 의병장인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등은 모두 남명 선생의 제자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을 얼마나 닮고 싶어 했는지 보여주는 시가 있습니다. 물론 지리산 밑으로 이사 온 뒤의 시입니다.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고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쓰다
천 섬을 담을 수 있는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네
어떻게 하면 나도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명 선생은 25세 되던 해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유학자인 허형(許衡)의 글에서 “이윤(伊尹, 중국 은나라 재상)의 뜻과 안연(顔淵, 공자님의 수제자)의 학문을 체득하여 벼슬에 나가면 큰일을 하고 재야에서는 지조를 지킨다.”는 글귀를 접하고 크게 깨우쳤다고 합니다. 자잘한 과거공부에 매달릴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태산 같은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는 남명 선생의 기상과 뜻을 가장 잘 나타낸 시(詩)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명 선생은 불교나 도교의 공부도 병행하였고, 그것의 좋은 점을 적극 받아들입니다. 선생의 호(號) ‘남명(南冥)’도 『장자(莊子)』에서 따온 것입니다. 남명 선생은 기본적으로 유학자입니다. 유학을 깊이 체득하기 위해선 불교나 도교를 받아들이는 게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퇴계 선생도 많은 우려를 했습니다. 이런 세간의 평가를 잘 아는 남명 선생은 「정리(庭梨, 뜰의 배나무)」라는 시에서 ‘사람들은 (나를) 양주를 배웠다고 하리라(世人應道學楊朱)’라고 읊습니다. 양주(楊朱)는 중국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인데, 여기서는 이단(異端)의 통칭으로 쓴 것입니다.
座右銘(좌우명)
庸信庸謹(용신용근)
閑邪存誠(한사존성)
岳立淵冲(악립연충)
燁燁春榮(엽엽춘영)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남명 조식 선생의 좌우명입니다. 올바름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남명 선생에게는 의로움의 실천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長老)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近見學者。手不知洒掃之節。而口談天理。計欲盗名。而用以欺人。反爲人所中傷。害及他人。豈先生長老無有以呵止之故耶。)
남명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보낸 편지 「여퇴계서(與退溪書, 퇴계 선생에게)」 중 일부분입니다.
남명 선생과 퇴계 선생은 동갑이고, 같은 경상도 태생이지만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두 분은 서신을 나누며 마음을 나눴습니다. 퇴계 선생은 남명 선생에게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자고 합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함께 하자는 뜻입니다. 남명 선생은 이예 ‘백년신교(百年神交)’로 화답합니다. 평생 마음을 함께 하자는 뜻이지요.
위 편지를 보면 일견 남명 선생이 퇴계 선생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군자들의 사귐에는 숨김이 없어야 합니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것처럼요. 따라서 진심으로 바라는 바를 거리낌 없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벗에 대한 예의입니다. 남명 선생의 편지를 보아도 선비들이 실천에 힘쓰길 바라고, 고명한 퇴계 선생이 앞장서서 바로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매우 절실합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삶은 ‘투철함’, ‘강인함’으로 일관되었을 것 같은데요, 의외로 서정 넘치는 시들도 많습니다. 자형(姊兄)과 헤어지며 준 시를 보겠습니다.
贈別姊兄寅叔(증별자형인숙)
積憂如草雨中新(적우여초우중신)
太半生來此最辛(태반생래차최신)
倚馬臨歧渾不語(의마임기혼불어)
天涯消道又成春(천애소도우성춘)
자형 인숙과 헤어지며 드리다
쌓인 시름 풀과 같아 비 오자 새로워져
한평생 중 지금 이 순간 가장 쓰라리네
갈림길에서 말에 기대어 둘 다 말이 없는데
하늘 끝으로 길 사라지는데 또 봄이로다
인숙(寅叔)은 남명 선생 누나의 남편인 자형(姊兄) 이공량(李公亮)의 자(字)입니다. 이공량은 선생보다 한 살 위인데, 둘이 각별하게 친했나 봅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배웅 나왔지만, 갈림길에서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합니다.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이내 그림자조차 점점 멀어져 갑니다. 자형의 그림자 산 너머로 사라졌는데, 무심하게도 봄은 또 와 있습니다.
1555년(명종 10) 명종 임금은 남명 선생을 단성 현감(丹誠縣監)에 임명하지만 나가지 않고 사직 상소를 올립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 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라는 구절로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입니다.
사직소의 이 구절만 본다면 매우 과격하다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수차례 왜변(倭變)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고, 조정(朝廷)이 그것을 수습할 준비조차 안 되어 있음을 통렬히 비판 한 것입니다.
1566년(명종 21) 명종 임금은 남명 선생을 상서원(尙瑞院) 판관(判官)으로 임명하여 부릅니다. 남명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명종 임금을 배알하였지만, 함께 국사를 도모할 만한 임금이 못 된다고 판단하여 지리산으로 돌아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남명 선생은 1572년(선조 5) 음력 2월 8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천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남명 선생 숨지자 선생의 평생 벗이었던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년(연산군 3)∼1579년(선조 12)) 선생은 애도하는 시(詩)를 짓습니다.
悼南冥(도남명)
吾道從茲寒若灰(오도종자한약회)
哲人亡矣痛山頹(철인망의통산퇴)
丹霄悵望雲重隔(단소창망운중겨)
靈鳳千秋更不廻(영봉천추갱불회)
남명을 애도하다
우리 도가 이로부터 재처럼 식었으니
철인이 죽으매 태산이 무너진 듯 슬퍼라
겹겹 구름 저편의 붉은 하늘 서글피 바라보노니
봉황은 천추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선생의 제자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른바 사색당파의 ‘북인(北人)’입니다. 북인은 광해군의 몰락과 함께 몰락합니다. 수제자 정인홍(鄭仁弘, 1535년(중종 30)∼1623년(인조 1))은 89세의 고령임에도 역적으로 몰려 목이 잘립니다. 이렇게 북인이 몰락하자 남명 선생에 대한 추숭(追崇)도 자연스럽게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젠가 튀어나온다 했나요. 남명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는 것을 볼 때 그나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불행하게도 적자생존(適者生存),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좋은 세상,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외면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꿈을 꾸는 이가 점점 늘어난다면 봄날 같은 따뜻한 이웃이 넘치는 사회는 좀 더 일찍 올 겁니다. 그런 날이 오길 꿈꾸며 우리 함께 힘든 언덕을 울퉁불퉁 넘어가볼까요.
나는 나비를 따라하네
- 문태준
다시 봄이 되니 다시 나비가 나네
나비는 봄을 두드러지게 하네
나비는 언덕을 울퉁불퉁 넘어가네
나비는 짓고 부수네
열(列)에서 벗어나
열에서 한참을 벗어나
종잡을 수 없게 나비는 나네
자연에 틈이 열리네
나비는 나의 새로운 형상
나는 종일 나비를 따라하네
꽃은 나비를 따라다니네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참고 문헌]
* 『남명집』(한길사,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김, 2008년)
* 한국고전종합DB
* 산청군청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 8. 12.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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