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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환 이용휴 선생의 「재우중희재(在寓中戱題)」에 붙여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시집 『참 맑은 물살』 창비, 2000년)

 

 

봄날 우리 산들은 유난히 예쁩니다. 생강나무,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귀룽나무 새싹이 돋으면서 봄이 시작됩니다. 산벚꽃이 군데군데 피어날 때면 산들은 온통 애기초록 이파리들이 여백을 가득 채워 그야말로 황홀할 지경입니다. 전남의 높은 산 회문산도 봄날이면 그렇겠지요.

 

 

벚꽃이 한창인 봄날 서울 남산 풍경입니다. 작은 남산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남도의 큰 산 회문산의 봄날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만 느낄 수 없게 하는 아픔이 언젠가는 가셔지겠지요.

 

남도 출신 곽재구 시인은 그 아름다운 봄날 회문산을 그저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남도의 높고 큰 산이 다 그러하듯 회문산 또한 수많은 민초들의 한과 열망이 서려 있으니까요.

 

한 사람이 잘 되고자 하는 꿈을 꾸면 모두 응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잘 되고자 하는 꿈을 꾸면 불온하다 여깁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 털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이 있었기에 풍요로운 강과 바다가 되었듯이, 불온한 이들의 꿈이 있었기에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잔혹한 일제시대에도, 무자비한 독재정권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교조적 성리학이 온 사회를 옥죄던 조선왕조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용휴(李用休, 1708(숙종 34)1782(정조 6)) 같은 분입니다.

 

 

在寓中戱題(재우중희재)

 

爲遣書童視我園(위견서동시아원)

須臾來報告祥言(수유래보고상언)

接花皆活新篁長(접화개활신황장)

一笑欣然倒癭樽(일소흔연도영준)

 

집에서 장난삼아 쓰다

 

정원을 살펴보라고 아이를 보냈는데

잠시 뒤 돌아와서 좋은 소식 전하네

“접붙인 꽃 모두 살았고, 죽순 자랐어요.”

한 번 껄껄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네

 

 

이용휴는 아마도 전 해에 꽃나무 접을 붙이고, 대나무를 옮겨 심었나봅니다. 모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꽃나무와 대나무는 살았을까요? 심부름하는 아이를 보내 확인합니다. 다행히 꽃나무는 다 살았고, 대나무는 새싹 죽순까지 올리고 있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요. 행복한 기분에 술잔을 기울입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년(숙종 33)∼1769년(영조 45)) 산수도입니다. 강세황(姜世晃, 1713년(숙종 39)∼1791년(정조 15))이 친필로 쓴 발문(跋文)이 있습니다. 발문은 대략 ‘실제 풍경과 같은지 다른지는 따질 것이 못된다. 그윽하고 고요한 멋이 있으니 심사정의 걸작이다.’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 이상을 그렸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이용휴 또한 끊임없이 이상적인 세상을 꿈꿨습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시를 보면 풍경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함정이 있습니다. 집에 정원이 얼마나 넓기에 아이를 보내 확인할까요. 궁금하였다면 어떻게 죽순이 솟을 때까지 참고 있었을까요. 과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의도된 과장입니다. 그 과장은 시의 정경과 같은 평화스러운 세상을 소망하는 마음, 작은 것에 만족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시적 장치입니다.

 

 

閒居雜興(한거잡흥)

 

黃鸝石榴陰下(황리석류음하)

紫鷰玳瑁樑間(자연대모량간)

此峕有客携酒(차강유객휴주)

相對欣然啓顔(상대흔연게안)

 

林氣常含雨氣(임기상합우기)

溪聲自亂人聲(계성자란인성)

已開松菊三逕(이개송국삼경)

足了山翁一生(족료산옹일생)

 

白鷺白鷗並坐(백로백구병좌)

紅桃紅杏交飛(홍도홍행교비)

郊行日暮忘返(교행일모망반)

細雨霏霏濕衣(세우비비습의)

 

三間傍水茅屋(삼강방수모옥)

五畝依山石田(오무의산석전)

醉憑藜牀竹几(취빙여상죽궤)

閒歌月夜花天(한가월야화천)

 

柳條窣窣垂地(유조솔솔수지)

桑葉重重覆墻(상엽중중복장)

南畝同來婦子(남무동래부자)

北窓高臥羲皇(북창고와희황)

 

한가롭게 사는 나의 심정

 

꾀꼬리는 석류나무 그늘 아래에 있고

자줏빛 제비는 대모 들보 사이에 있네

이런 때에 손님이 술을 들고 왔으니

서로 마주 보면서 활짝 웃었네

 

숲의 기후는 언제나 비 기운을 머금고

시내 소리 사람 소리 서로 어지러웁네

이미 소나무와 국화 심은 세 갈래길 냈으니

산에 사는 늙은이의 한 평생이 만족스럽네

 

해오라기 갈매기 나란히 앉아 있고

붉은 도화꽃 살구꽃 서로 흩날리네

교외 나들이 저물도록 돌아가길 잊었는데

가랑비 부슬부슬 옷을 적시네

 

시냇물 곁에 있는 서너 칸 초가집

산에 의지해 있는 다섯 마지기의 자갈밭

술에 취해 탁자와 죽부인에 의지해

꽃 가득 핀 달밤에 한가로이 노래하네

 

버들가지 빽빽하게 땅으로 드리우고

뽕잎은 촘촘하게 담장을 덮고 있네

남쪽 밭에서 아내 아들 함께 돌아오고

북쪽 창가에 기대 누우니 복희씨 세상이네

 

 

공자님은 부강한 나라’, ‘()와 악()을 아는 나라보다, ‘구체적으로 인민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꾼 증삼(曾參)을 더 인정한 바 있습니다. 이 시는 다시 한 번 이용휴가 꿈꾸는 세상, 인민이 행복한 세상을 제시합니다.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나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은 이용휴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이용휴는 스스로 혜환거사(惠寰居士)라 호()를 지었다. 영조(英祖) 말엽에 명망이 당시의 으뜸이어서 학문을 탁마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찾아와서 좋고 나쁨을 묻고 바로잡았다. 몸은 평민의 지위에 있으면서 30년 동안이나 문단(文壇)의 저울을 쥐었으니 예부터 없었던 일이었다.’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 ())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천금물전(千金勿傳)』입니다. 명필로 이름 높았던 이용휴의 할아버지 이하진이 후손에게 남긴 서첩입니다. 총 10첩인데, 이하진은 자신의 애호물에 관한 명(銘)을 비롯해 대자서(大字書, 큰 붓글씨), 당시(唐詩, 당나라 시), 자신이 애호하는 12가지 향기 나는 완상물인 십이방완(十二芳玩)에 관한 시(時), 옛 문인에 관한 일화 등의 기록을친필로 남겼습니다. 이하진은 1678년(숙종 4) 사신으로 중국에 갔습니다. 황제가 상금을 내렸는데, 이 돈을 모두 책을 사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보물 제167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단의 저울이란 문장의 좋고 나쁨을 마치 저울처럼 잴 수 있는 권위를 가졌음을 말합니다. 보통 줄여서 문형(文衡)’이라고 하는데, 나라의 공식적인 학문권력을 가진 대제학(大提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용휴는 재야의 문형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인조 6)1682(숙종 8)) 대에 이미 만권의 책을 집안에 소장하였기에 풍부한 독서를 바탕으로 뛰어난 학문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가 쓴 시와 문장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시와 문장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번 한시산책에서는 그가 꿈꾸던 세상을 그린 시문(詩文) 몇 편만 살펴보겠습니다.

 

 

구곡에 숨어사는 기문(記文)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꼭 깊은 산속, 인적 끊긴 계곡이 아니어도 좋다. 도성 안에서 외지고 조용한 곳을 택해 몇 칸짜리 작은 집을 짓는다. 방 안에 두는 것은 거문고와 책, 술동이, 그리고 바둑판이 전부.

 

돌벽을 담으로 삼아 땅을 조금 개간한다. 적토에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좋은 새들을 부르고 나머지 땅엔 남새밭을 일구어 그 채소를 따다가 술안주 삼는다. 콩 시렁, 포도 시렁도 만들어 두어 그 그늘에서 더위를 식힌다.

 

처마 앞에는 꽃과 돌을 둔다. 꽃은 굳이 얻기 어려운 것을 구할 것 없이 사시사철 늘 묵은 꽃과 새 꽃이 이어지며 피는 것을 볼 수만 있으면 좋다. 돌은 굳이 옮겨 오기 어려운 것을 취할 것 없이 조그맣더라도 앙상하고 독특하게 생긴 것이면 좋다.

 

이웃은 뜻 맞는 친구 한 사람. 그 역시 나와 비슷하게 꾸려 두고 산다. 두 집 사이에 대나무를 엮어 사립문을 만들고는 그리로 왕래한다. 난간 옆에 서서 부르면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신발이 벌써 섬돌에 이른다. 비바람이 아무리 심해도 왕래를 그치는 일이 없다. 이렇게 여유롭게 노닐며 늙어 간다.

 

우연히 구곡동에 들어갔다가 서 씨와 염 씨가 사는 곳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 상상하던 것 그대로였다. 이를 적어서 기문을 짓는다.

 

九曲幽居記


余嘗起一想, 不必深山絶峽, 都城中選一僻靜處, 構屋數楹, 中置琴書樽奕.
因石壁爲垣, 闢地若干, 赤植嘉木, 以來好鳥, 餘爲圃種蔬, 摘以佐酒. 又爲荳棚葡萄架以納凉.
簷前列花石. 花不求難得者, 求四時陳新相繼, 石不取難致者, 取小而瘐露怪奇者.
與同志一人爲鄰, 而其所經營位置略相當. 縛竹爲門, 以通往來, 立欄邊相呼, 聲未竟, 屨已及堦, 雖甚風雨, 無間, 如是優遊以老.
今偶入九曲洞, 見徐氏廉氏所居, 宛然是余意中想也. 遂寫以爲記.

 

 

기문(記文)기록한 문장을 뜻합니다. 위의 기문은 자신의 꿈을 조금 더 구체화 합니다. 이렇게 꿈을 꾼다면 그 꿈을 세상에 펼치는 현실정치에 참여하면 될 것 아닐까요? 이용휴가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는 가문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용휴의 할아버지 이하진의 약식 가계도입니다. 한 분 한 분 모두 뛰어난 학자였지만, 당쟁의 와중에서 자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자중하였음에도 이하진의 아들 이잠과, 증손자인 이가환은 옥사합니다.

 

이용휴의 할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인조 6)~1682(숙종 8))은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학문기관인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왕명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지금의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을 합친 역할에 해당하는 대사헌(大司憲) 등 높은 벼슬을 지낸 분입니다.

 

 

이용휴를 비롯한 여주 이씨 이하진 후손들이 묻힌 매산묘원입니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분지울에 있습니다. 이용휴의 무덤은 사진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칸에 있습니다. 바로 아래 외아들 이가환의 묘가 있고요. 분지울은 이하진 후손 중에 천주교를 믿었던 이들이 숨어 살던 곳입니다.

 

1680(숙종 6) 남인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던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납니다. 남인이었던 이하진도 이때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귀양 갔다 2년 뒤에 유배지에서 죽습니다. 이하진은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들들에게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립니다. 아들 중에는 실학을 집대성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이 있고, 학자들의 추앙을 받았던 옥동(玉洞) 이서(李潊, 1662(현종 3)~1723(경종 3))가 있습니다. 손자인 이용휴 또한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랐습니다.

 

 

田家(전가)

 

婦坐掐兒頭(부좌겹아두)

翁傴掃牛圈(옹구소우권)

庭堆田螺殼(정퇴전라각)

廚有野蒜本(주유야산본)

 

농가

 

아낙은 앉아서 아이 머리 매만지고

늙은이는 구부려 외양간을 쓸어내네

마당에는 우렁이 껍질 잔뜩 쌓였고

부엌에는 산부추 포기 채 있네

 

 

새로운 세상은 나에게만 온다고 다가 아닙니다. 당시 기층민중인 농민에게도 평화로운 세상이 와야 진정 새로운 세상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있으니 궁핍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한 평화로움이 있을까요. 이런 평화로운 세상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의 3대 천재 중 한 명이라는 이가환(李家煥, 1742(영조 18)1801(순조 1))은 이용휴의 외아들입니다. 이가환은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합니다. 정조(正祖) 임금은 재상의 재목이라며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노론당의 강력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이 죽고 순조(純祖) 임금이 등극하자 상황이 돌변하였습니다. 이가환은 서학(西學, 카톨릭)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가환은 단식 끝에 죽었지만, 반대 정파에서는 끝내 그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습니다. 국가 전복을 노린 반역자 취급을 한 겁니다.

 

 

원주에 숨어 살던 천주교들이 처음 세운 예배당 중 하나인 후리사공소입니다.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백운산 자락에 있습니다. 이곳은 이하진 후손들 중 천주교를 믿었던 이들이 숨어 살던 분지울과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꿈꾸지 않으면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요. 오늘도 묵묵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어딘 가에는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응원하며 정태춘의 절창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바칩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 정태춘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 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사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고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에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그쳐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참고 문헌]

 

* 혜환 이용휴 시전집(조남권박동욱 옮김, 소명출판, 2003)

* 나를 찾아가는 길(이용휴 산문, 박동욱송혁기 옮기고 씀, 돌베개, 2014)

* 한국고전종합DB

* 국가문화유산포털

* 국립중앙박물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2023. 04. 10. 씀

2023. 05. 22. 기록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