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시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에 붙여 별종 - 정현 혹시라도 별들이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빛나는 별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별빛이 특별하다고 해도 스스로를 의심했다면 은하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현 시집 『하루』 (주)북랩, 2021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정작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는 이는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심지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爲人(위인))’보다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爲己(위기))’을 공부의 핵심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빛나는 별, 그 별들이 수없이 모인 은하수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데서 시작됐다는 정현 시인의 시..
서계 박세당 선생의 「두어(蠧魚)」에 붙여 홀로 피는 꽃은 없다 - 남정림 땅끝 오지마을 바위 틈새에 외롭게 핀 꽃이라 할지라도 인적도 증발해 버린 외진 사막에 혼자서 핀 꽃이라 할지라도 홀로 피는 꽃은 없다. 수시로 찾아와 어깨 두드리는 햇살, 수건처럼 펄럭이며 땀 닦아주는 바람, 수고의 등 내밀어 받쳐주는 찰흙이 우주의 자궁에서 깨알처럼 잉태되어 꽃가루, 꽃향기, 꽃받침으로 태어난다. 지구별 안에는 별가루 하나 홀로 날리는 일 없고 먼지꽃 하나 홀로 피는 법 없다. 홀로 피는 꽃은 없다.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년) 계획했던 일들이 하나 둘 무산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람들의 오해까지 받아 의기소침해졌을 때 남정림 시인의 이..
1. 서오릉의 시작 1457년(세조 3) 음력 9월 2일 세조 임금의 세자 의경세자(1438년(세종 20)~1457년(세조 3))가 20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잔병치례는 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죽은 셈입니다. 세조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태조가 묻힌 구리시 동구릉도, 할아버지 태종, 아버지 세종이 묻힌 헌릉도 모두 피하고, 지금 서오릉 경릉 자리에 세자 묘를 택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오릉이 왕실의 무덤이 됩니다. 이때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은 4살이고, 나중에 성종 임금이 되는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한 살이었습니다. 경국대전의 왕의계승 서열을 정하는 종법대로라면 월산대군이 세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조 임금은 월산대군의 삼촌이며 8살 된 해명대군을 세자로 지명합니다. 이분이 나중에 예종(1450..
용복원이라는 지명이 특이하죠. 고양시 일대에 용을 상징하는 지명이 나란히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서오릉 근처를 용두동(龍頭洞)이라 합니다. 그리고 용의 배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고양시 대자동 일대를 용복원(龍腹園)이라고 하고요. 고개 너머에는 용의 꼬리라고 하여 파주시 광탄면에 용미리(龍尾理)가 있습니다. 풍수지리가 맞는가요. 용의 머리 부분인 용두동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이 묻혔고, 늘 풍요로운 용의 배 부분에는 왕자와 공주, 고관들이 묻혔습니다. 용의 꼬리인 용미리는 서민들의 무덤인 서울시립묘지가 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끌어다 붙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듯합니다. 용복원에는 6분의 공주, 옹주가 묻혀 있고, 5분의 왕자님이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정..
나옹선사의 시 「청산가(靑山歌)」에 붙여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준 집은 차암 많았지.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교과) “어른들도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그의 유명한 소설 『어린왕자』 서문에 쓴 문구입니다. 어때요? 동의하시나요? 채송화꽃처럼 조그만 아이였..
- 혜환 이용휴 선생의 「재우중희재(在寓中戱題)」에 붙여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시집 『참 맑은 물살』 창비, 2000년) 봄날 우리 산들은 유난히 예쁩니다. 생강나무,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귀룽나무 새싹이 돋으면서 봄이 시작됩니다. 산벚꽃이 군데군데 피어날 때면 산들은 온통 애기초록 이파리들이 여백을 가득 채워 그야말로 황홀할 지경입니다. 전남의 높은 산 회문산도 봄날이면 그렇겠지요. 남도 출..
이상적 선생의 시 「기응(飢鷹, 굶주린 매)」에 붙여 눈먼 말 - 박경리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 시집 『우리들의 시간』 나남, 2010)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년~2008년) 선생의 시입니다. 요즘 세대는 잘 모르지만 5060세대에게 박경리 작가는 물을 필요 없는 대문호입니다. 그의 시집 『우리들의 시간』 첫머리에 서문처럼 이 시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기계 방앗간이 나오기 전에 마을마다 연자매라 불리는 연자방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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