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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주 기씨를 다시 일으킨 청파(靑坡) 기건(奇虔)

 

고양시 원당 행주 기씨 도선산 네이버 항공사진

 

 

전철 3호선 원당역 1번 출구로 나와 대각선 방향에 있는 원당추어탕 옆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커다란 한옥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덕양서원(德陽書院)이다. 덕양서원은 2002년 개원 당시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 정렬공(貞烈公) 기찬(奇襸),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 문간공(文簡公) 기정진(奇正鎭)을 배향하였다. 2005년에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과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다.

 

덕양서원 ,  행주 기씨 현인과 조광조 ,  정지운 선생 등을 배향하고 있다 .

 

 

서원 뒤쪽 묘역 맨 위에 행주 기씨의 중시조 청파(靑坡) 기건(奇虔, 1390(고려 공양왕 2)1460(세조 6))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원나라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의 친정으로 고려말 위세를 떨치던 행주 기씨는 기황후의 오빠이며 당시 권신(權臣)이었던 기철(奇轍, ?∼1356(공민왕 5))의 처형과 함께 위기에 처한다. 위기에서 다시 가문을 일으킨 이가 바로 기건 선생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등 고관을 지낸 그는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찾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건 선생 묘와 신도비는 향토유적 제22호이다.

 

기건 선생의 묘 .  행주 기씨의 중시조 (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 ) 다 .

 

 

기건 선생의 신도비는 덕양서원 옆 우백호 언덕에 있다.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6대손 기자헌(奇自獻, 1567(명종 17)1624(인조 2))의 부탁으로 당대의 명문장가인 이정귀(李廷龜)가 비문을 지었다. 기자헌이 영의정이 된 해가 1614(광해 6)이고 물러난 해가 1617(광해 9)이다. 그러나 비석은 이때로부터 250년도 더 지난 1879(고종 16)에 건립된다. 북인 출신인 기자헌은 이괄의 난때 당시 서인 집권자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다. 기자헌뿐만 아니라 아들 기준격과 친척들 다수가 함께 죽는다. 이러한 가정의 불행으로 신도비 건립은 후대로 넘겨진 것 같다.

 

기건 선생 신도비 .  이괄의 난으로 가문이 또 한 번 풍비박산이 나 비문을 얻은 지  250 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건립되었다 .

 

 

이 가문의 불행을 웅변해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덕양서원에서 기건 신도비가 서 있는 언덕을 넘어가면 기준 선생의 맏형 기형(奇逈)의 묘가 나온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기형의 묘에는 새기다 만 문석인이 서 있다. 아마도 문석인을 만들 때 집안에 변고가 있었나 보다. 원래 묘 앞에 쓰러져 있었는데, 가문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금 모습으로 세웠다고 한다.

 

기형 묘역의 문석인 .  조각을 새기다 만 것이 조성 시 집안의 변고가 있었음을 웅변해주는 것 같다 .

 

 

2. 처가 선영에 있는 윤지득의 묘

 

덕양서원 남쪽 좌청룡 언덕에 기 씨(奇氏)가 아닌 윤 씨(尹氏) 묘가 있다. 남원 윤씨 윤지득(尹之得)과 그의 부인 행주 기씨의 합장묘이다. 남원 윤씨들은 이곳에 윤지득의 묘를 쓴 다음 후손들이 복을 받아 후손 중 영의정에 증직된 분이 6, 판서 7, 문과급제 47인 시호(諡號)를 받은 분과 봉군(封君)된 분이 각각 11, 한성판윤 3인이 나왔다고 믿는다.

 

이곳에 윤지득의 묘소를 쓴 데에는 전설이 있다. 윤지득의 부인 행주 기씨는 여말(麗末)의 공조전서(工曹典書)였던 기면(奇勉)의 딸이다. 남편 윤지득이 일찍 죽어 청상과부의 몸으로 이곳 친정에 와서 살았다. 당시 기씨의 뱃속에는 유복자가 자라고 있었다.

 

친정에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기씨는 다시 친정아버지 상을 당하게 되었다. 지관들이 불려 오고 마침내 명당이라는 묏자리가 마련되었다. 장례를 치르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기씨는 아무도 모르게 물을 길어서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묘를 쓰기 위해서 파놓은 구덩이에 연신 물을 길어다가 부었다. 다음날 묏자리를 본 상주들이 발칵 뒤집혔다. 명당이라는 자리에 물이 가득하니 말이다. 할 수 없이 상주들은 다른 자리를 잡아 장례를 치렀다.

 

윤지득의 묘 .  남원 윤씨들은 이 묘소가 명당이라 후손이  잘됐다고   한다 .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뒤에 장녀였던 기씨는 조심스럽게 남동생을 불렀다. 아무래도 남편의 묏자리가 너무 허술해서 마음에 걸리니 물이 나서 못 쓰는 묏자리로 옮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동생은 누나의 청을 들어주어 윤지득의 묘가 현재의 자리에 자리 잡았고, 후손들은 명당의 기운을 받아 복을 누렸다고 한다.

 

이런 전설은 고을마다 흔히 전해온다. 조선 초기만 해도 남녀가 평등하여 재산도 고르게 상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처갓집 선영에 묻히는 건 예사고, 아예 처갓집 선영이 자기네 선영으로 바뀐 곳도 많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면서 남자 중심, 장자 중심의 상속제도가 일반화되면서 이런 풍속이 없어졌다.

 

3. 어린 나이에 죽은 정혼자를 따라 시집온 여인

 

윤지득의 묘 위 왼쪽 나무 그늘에 조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다. 기송(奇松)과 전주 류씨(柳氏)의 합장묘이다. 기송은 1619(광해 11)에 태어나 5세 때인 1622(광해 14)에 죽었다. 기송의 할아버지는 기협(奇恊, 1572(선조 5)1627(인조 5))이라는 분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거처 1626(인조 4) 선천부사로 있다가 이듬해 정묘호란을 맞았다. 의주가 함락되고 곽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에서 수성장(守城將)으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다시 선천에 돌아와 항전하였다. 이때 청군은 항복하라는 글을 보내왔으나 이를 불태우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던 분이다.

 

기송과 전주 류씨 합장묘 .  전주 류씨는 얼굴도 보지 못한 정혼자를 따라 시댁에서 한평생을 보낸 여인이다 .  제도의 비정함은 이런 것이리라 .

 

 

벼슬살이는 엄격했지만 기협은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닌 이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손자가 예쁠 터인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효심이 지극한 데다 의젓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예뻤겠는가. 그런데 그런 손자가 다섯 살에 죽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런데 기송에게는 이미 집안 어른들에 의해 결혼이 약속된 정혼자가 있었다. 그의 정혼자는 전주 류씨로 기송보다는 한 살 많았다. 6살 어린 나이에 정혼자를 잃은 이 여인은 평생 수절을 하여야 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36세에 죽어서 정혼자와 함께 묻혔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안위를 내팽개친 왕과 양반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왕과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는 방법으로 예학(禮學)을 도입했다. 예학에서는 충효(忠孝) 등의 미덕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사상적으로 피지배층을 올가미처럼 옭아맸던 것이다. 여자들에게 정절, 수절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기송과 전주 류씨의 무덤을 보면서 알량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한 사람의 생을 희생시킨 아픈 역사를 보게 된다.

 

4. 젊은 나이에 스러진 개혁의 선봉 복재 기준 선생

 

덕양서원을 나와 우회전 하여 3호선 전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 언덕을 오르면 기응세 묘가 있다. 언덕 끝에는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있고, 고속도로 옆 능선을 조금 따라 올라가면 커다란 무덤이 나온다. 이곳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며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분인 복재(服齋) 기준(奇遵)(1492(성종 23)1521(중종 16)) 선생의 무덤이다.

 

기송과 전주 류씨 합장묘 .  전주 류씨는 얼굴도 보지 못한 정혼자를 따라 시댁에서 한평생을 보낸 여인이다 .  제도의 비정함은 이런 것이리라 .

 

 

기준 선생은 조광조(趙光祖) 선생 등과 함께 당시 개혁파를 이끌던 주역이었다. 23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검상(檢詳장령(掌令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9(중종 14)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해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함경도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유배지에 가서 교살(絞殺, 목 졸라 죽임)되었다.

 

기준 선생은 시를 잘 썼다. 그의 시는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등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복재집(服齋集)·무인기문(戊寅紀聞)·덕양일기(德陽日記)등이 있다. 1545(인종 1) 신원(伸冤, 억울함이 풀림)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5. 조선과 명나라 명필의 글씨를 담은 비석이 나란히 있는 기응세 묘

 

기준 선생 묘 동쪽 좌청룡 능선에는 아들 기대항(奇大恒, 1519(중종 14)1564(명종 19)), 손자 기응세(奇應世)의 묘가 있다. 기대항은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효자로 이름난 기응세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아버지이다. 기응세 묘역에는 특이하게도 비석이 둘이 있다. 무덤을 처음 썼을 때 비석을 세웠는데, 나중에 기자헌이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으로 추증(追贈, 죽은 뒤 벼슬을 높임)되면서 또다시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다. 처음 세운 비석은 당시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이다. 두 번째 비석은 당시 중국의 명필인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조선과 중국의 명필의 비석이 동시에 있는 무덤은 아마도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기응세 선생 묘 .  앞의 비석에는 명나라 명필 주지번의 글씨가 있고 ,  뒤의 비석에는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가 있다 .

 

 

이 무덤의 또 다른 특징은 문석인 조각에 있다. 문석인의 관모가 특이한데, 임진왜란 시기에 잠깐 유행했던 중국풍의 관모를 썼기 때문이다. 무덤 앞에 장명등의 지붕돌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도굴해 간 것을 종중 사람들이 수원까지 쫓아가서 찾았는데 장명등 밑돌은 이미 빼돌려 지붕돌만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기응세 묘는 고양시 향토유적 23호이다.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