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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선생의 「자미화(紫微花)」에 붙여
구월
- 나태주
구름이라도 구월의 흰구름은
미루나무의 강언덕에
노래의 궁전을 짓는 흰구름이다
강물이라도 구월의 강물은
햇볕에 눈물 반짝여
슬픔의 길을 만드는 강물이다
바라보라
구월의 흰구름과 강물을
이미 그대는
사랑의 힘겨움과 삶의 그늘을
많이 알아버린 사람
햇볕이 엷어졌고
바람이 서늘어졌다 해서
서둘 것도 섭섭할 것도 없는 일
천천히 이마를 들어
구름의 궁전을 맞이하세나
고요히 눈을 열어
비늘의 강물을 떠나보내세.
(나태주 시집 『혼자서도 별인 너에게』 서울문화사, 2020)
구월은 가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시원해지는 철은 아니죠. 그래도 가을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제가 느끼는 가장 큰 가을의 전조는 그늘이 짙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나태주 시인은 여름을 가장 견디기 힘겨운 계절로 생각했나 봅니다. 흔히 겨울을 동(冬)장군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여름은 염제(炎帝), 즉 뜨거움의 극한까지 가는 황제라고 합니다. 장군보다 황제가 높으니 여름이 훨씬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죠.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판단은 다르겠지만, 암튼 여름 또한 견디기 힘든 계절이기는 합니다.
힘겨운 여름의 더위를 견딘 것을 30~40대의 힘겨운 삶을 견딘 것에 비긴다 해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여름이 지나면 결실의 가을이 남아 있지만, 조락(凋落)의 겨울이 머지않음 또한 현실입니다. 그래도 구름은 하늘 높이 떠오르고, 강물은 찬란히 흐르니 오늘은 구름을 보고 강물을 보아야겠습니다.
오늘 한시산책은 좀 색다른 주제인 백일홍(百日紅)을 가지고 얘기하려고 합니다. 백일홍은 100일 동안 꽃이 피어 있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배롱나무라고도 하고 꽃의 색깔이 자주색이고, 꽃이 자잘한 것이 뭉쳐 있다고 해서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합니다. 백일홍은 100일 동안이나 꽃이 피어 있기에 지조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랑했고, 시를 지었습니다. 만고의 충신이라는 성삼문(成三問, 1418년(태종 18)~1456년(세조 2)) 선생의 시를 보겠습니다.
紫微花(자미화)
歲歲絲綸閣(세세사륜각)
抽毫對紫薇(추호대자미)
今來花下飮(금래화하음)
到處似相隨(도처사상수)
자미화
매년 사륜각에서 지날 때는
자미화 앞에서 붓을 들었지
이제와 꽃그늘에 술을 마시니
곳곳마다 꽃이 따라 오누나
사륜(絲綸)은 왕의 조서를 말합니다. 『예기(禮記)』 「치의(緇衣)」편에 ‘왕의 말이 실 같아도 나오면 인끈처럼 굵어지고, 왕의 말이 인끈 같아도 나오면 동아줄처럼 굵어진다.(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란 말이 있습니다. 왕의 말이나 명령은 그만큼 엄중하다는 것이죠.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왕의 말이나 명령을 '사륜(絲綸)'이라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글로 짓는 이들이 모여 있는 관청을 사륜각(絲綸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는 집현전에 있을 때 지은 듯합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명령을 글로 짓는 관리를 지제고(知制誥)라고 하였습니다. 성삼문 선생은 오랫동안 집현전에서 있으면서 학문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왕명을 짓는 지제고를 맡았었습니다.
자미화와 사륜각을 연결하는 전통은 당나라 시대의 대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846년)의 시 「자미화(紫微花)」로부터 시작합니다. 볼까요.
紫微花(자미화)
絲綸閣下文書靜(사륜각하문서정)
鐘鼓樓中刻漏長(종고루중각루장)
獨坐黃昏誰是伴(독좌황혼수시반)
紫薇花對紫薇郞(자미화대자미랑)
자미화
사륜각엔 문서 일 조용하고
종고루엔 물시계 소리 길구나
황혼에 홀로 앉아 누굴 벗할까
자마화가 자미랑을 맞이하네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왕의 명령을 짓고 반포하는 관청 중서성(中書省)이 있었습니다. 이 중서성 앞에 백일홍을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서성을 백일홍의 다른 말인 자미화를 따서 자미성(紫微省)이라고 불렀고, 이곳에서 왕명을 초안하는 관리인 사인(舍人)을 자미랑(紫薇郞)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왕의 명령을 '사륜(絲綸)'이라고 하였기에 중서성을 '사륜각(絲綸閣)'이라 부르기도 하였고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선생도 백일홍 시를 지었습니다. 34세 되던 1795년(정조 19) 왕의 핵심 비서인 당상관 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로 있다가 당파싸움에서 밀려 미관말직인 충청도 금정(金井) 찰방(察訪, 종6품 외직)으로 밀려났을 때 지은 시입니다. 비록 몸은 밀려난 신세이지만, 이 시를 보면 지조 있는 선비를 만날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百日紅(백일홍)
堂前一樹紫薇花(당전일수자미화)
寂寞幽光似野家(적막유광사야가)
半悴半榮延百日(반췌반영연백일)
百條仍有百杈枒(백조잉유백차야)
백일홍
마루 앞에 한 그루 백일홍이 피었는데
쓸쓸할사 그윽한 빛 시골집과 흡사하다
번갈아서 피고 지며 백일을 끌어가는데
백 가닥의 가지마다 또 백 가지 뻗었네
이 시는 고전번역원의 한문 및 한시 번역의 대가 송기채 선생이 번역한 것이라 마지막 구절만 조금 바꿨습니다. 다산 선생은 당쟁에서 밀려 미관말직으로 밀려났지만, 100일을 지지 않는 백일홍을 보면서 선비의 지조를 지키는 굳센 의지를 다졌나 봅니다.
성삼문 선생이 백일홍을 읊은 또 다른 시가 있습니다. 성삼문 선생을 평소에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여리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고요. 그래서인지 선생이 세조(世祖)에 반대해 반정(反正)을 일으킨 주모자가 되었을 때 주변 사람조차 잘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조는 어린 조카인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된 인물입니다. 이는 조선의 국시(國是, 국가 지도이념)인 유학(儒學)을 신봉하는 선비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성삼문 선생은 이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평소 우유부단해 보였답니다. 그러나 아래 시를 보면 뜻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백날이 가도 한결같은 백일홍을 벗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런 굳센 뜻이 있었기에 반정을 주도하고,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견뎠을 겁니다.
百日紅(백일홍)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對爾好銜杯(대이호함배)
백일홍
어제 저녁에 꽃 하나가 지더니
오늘 아침에 꽃 하나가 피었네
서로 백날을 바라볼 수 있으니
너를 상대로 술 마시기 좋아라
백일홍에는 슬픈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 먼 옛날 남해의 어느 어촌마을에는 이웃 섬에 머리 세 개 달린 못된 이무기가 살았답니다. 어촌에서는 이무기의 행패를 막으려고 매년 아름다운 처녀 한 명을 제물로 바쳤답니다.
어느 해 제물로 선정된 아름다운 처녀를 사랑한 마을 총각이 처녀를 대신해 제물인척 하다가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을 빼어들고 이무기와 사투를 벌였답니다. 총각은 이무기의 세 개 목 중 두 개를 잘랐지만, 목이 하나 남은 이무기는 섬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감동한 처녀는 총각의 아내가 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 마을에 해코지를 할 것이라 생각한 총각은 바로 승낙할 수 없었습니다. 이무기가 사는 섬으로 찾아가 백일 안에 이무기를 처단하고 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무기를 처단하고 오면 하얀 깃발을,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오겠다고 하면서 섬으로 떠났습니다.
처녀는 한결같이 바닷가에 나가서 총각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백일 되던 날 수평선 멀리서 총각이 타고 간 배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총각의 배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처녀는 총각이 잘못된 줄 알고 너무나 실망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총각은 이무기를 죽이고 흰 깃발을 달았는데, 이무기가 죽으면서 마지막 피를 토한 게 그만 깃발에 묻어 멀리서 보면 붉게 보였습니다. 이를 안 총각은 슬퍼하면서 처녀의 시신을 찾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습니다. 그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 백일동안 지지 않는 아름다운 꽃이 피었는데 그게 바로 백일홍이랍니다.
마지막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선생의 백일홍 시를 보겠습니다. 장현광 선생은 당쟁 초기 남인(南人)의 대학자였습니다. 요즘 얕은 이해관계를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신다면, 선생의 시를 보면서 선생의 지조 있는 선비를 그리는 마음을 느껴 봤으면 좋겠습니다.
百日紅(백일홍)
衆卉莫不花(중훼막불화)
花無保全月(화무보전월)
爾獨紅百日(이독홍백일)
爲我留春色(위아류춘색)
백일홍
온갖 아름다운 꽃 있지만
한 달 가는 꽃 없더구나
너 홀로 백 일 동안 붉어
날 위해 봄빛 남겨주누나
구월은 가을의 초입입니다. 하늘은 높고 그늘은 깊어집니다. 힘겨운 여름이 지나고 곡식도 익어가고요. 맑고 푸르른 가을 하늘처럼 세상의 모든 캄캄한 발자국이 뽀얗게 씻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남정림 시인의 「가을 하늘」을 드리면서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가을 하늘
- 남정림
푸르른 가을 하늘을 우러르면
구름 비누로 세수하고 싶어진다
몽글몽글 일어나는 하얀 거품으로
모진 시간의 캄캄한 발자국을
뽀얗게 씻어내고
차갑고 푸른 쪽빛 물로
어둠 점점이 박힌 칙칙한 마음을
말갛게 헹구어 내고
깊고 넓은
가을의 얼굴 되어
환하게 웃고 싶어진다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
** 이번 한시산책의 한시 번역은 『고전번역원DB』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2022년 8월 11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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