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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 황현 선생의 시 「절명시(絶命詩)」에 붙여
유랑
- 남덕현
어둠 속으로 길이 길을 접으면
외길에서도 나는
길을 잃어
힘없는 별빛이나 기다렸다가
무릎이 쓸쓸히 다 울 때까지
마저 떠돌아야지
(남덕현 시집 『유랑』, 노마드북스 2016)
깜깜한 밤입니다. 길조차 길을 감추는 아주 깜깜한 밤입니다. 갈 길이 정해진 외길이 분명하지만, 길을 잃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으렵니다. 힘없는 별빛이라도 나온다면 그 희미한 빛에라도 의지해 걸으렵니다. 무릎이 더 이상 걷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까지.. 걸으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한시의 주인공은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년(철종 6)∼1910년) 선생입니다. 남덕현 시인의 시 「유랑」처럼 끝까지 가려고 한 길은 분명하였지만, 이미 깜깜한 밤이 된 세상을 사셨던 분입니다. 조선의 지배자들은 기존의 지배방식과 생활방식을 고집하였지만, 식민지가 필요한 외세는 그런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1910년 8월 29일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황현 선생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자살합니다. 당시 선생의 나이 56세였습니다.
絶命詩(절명시)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妖氛晻翳帝星移(요분엄예제성이)
九闕沉沉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沉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암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曾無支厦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절명시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 되니
바람 앞 촛불만 밝게 하늘을 비추네
요기가 자욱하여 황제의 별 옮겨 가니
침침한 궁궐에는 낮이 더디 흐르네
조칙은 앞으로 더 이상 없으리니
종이 한 장 채우는 데 천 줄기 눈물이라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
결국 겨우 윤곡이나 따르고 마는 것을
부끄럽네, 왜 그때 진동처럼 못했던고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 국난(國難)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을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황현 선생이 자결을 앞두고 동생과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의 일부입니다. 유언처럼 황현 선생은 벼슬을 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죽어야 할 의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황현 선생은 추금(秋琴) 강위(姜瑋, 1820년(순조 20)~1884년(고종 21)),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년(철종 원년)∼1927년)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시인으로 꼽힙니다. 뜻이 곧은 대 천재이기도 했고요.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 그랬듯이 황현 선생의 부모도 황현 선생이 입신양명하기를 바랐습니다. 부모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봐 1888년(고종 25)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으로 합격하였지만 정국이 매우 혼탁했으므로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하였습니다.
참고로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윤곡(尹穀)은 남송(南宋) 사람입니다. 몽고군이 쳐들어와 지키던 성이 함락되다 집으로 들어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타죽은 사람입니다. 진동(陳東) 우리나라 성균관에 해당하는 태학(太學)의 학생 신분으로 간신배를 규탄하고 파직된 애국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이끌어 관철시킨 사람입니다. 진동처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진동처럼 간신배들을 몰아낼 것을 극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황현 선생은 나라가 망했을 때 따라 죽었기에 우국지사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나 또한 매우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평생 벗이었던 김택영 선생은 “대단히 맑고 회오리바람처럼 강경한 품격”이 있다고 황현 선생의 시를 평가했습니다.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황현 선생의 젊은 시절 시 한 수를 보겠습니다.
幽居信筆(一)(유거신필(1))
初日戎戎染細霞(초일융융염세하)
晴光一道水邊家(청광일도수변가)
絳桃如錦梨如雪(강도여금이여설)
花到深春不是花(화도심춘불시화)
한적한 집에서 붓 가는 대로(1)
아침 햇살 찬란하게 옅은 안개 물들이고
맑은 빛 한 줄기 물가의 집을 비추누나
붉은 복사꽃 비단 같고 배꽃은 눈 내린 듯
무르익은 봄에 피는 꽃은 꽃도 아니로구나
복사꽃이나 배꽃은 이파리보다도 먼저 피어납니다. 겨울의 무채색에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뒤덮을 듯 붉은 복사꽃과 흰 배꽃이 가득 피어납니다. 초봄에 피어나는 꽃이 유난히 아름다운 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체로도 아름답지만요. 그러니 무르익은 봄에 피는 꽃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더욱 혼란해지고, 황현 선생의 시는 시대를 걱정하는 내용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감수성이 어디 가나요. 40대에 지은 시 두 수를 이어 보겠습니다.
踰月出嶺(유월출령)
林風却雨午初凉(임풍각우오초량)
橫澗層層落石梁(횡간층층락성량)
萬壑千峰紅躑躅(만학천봉홍척촉)
行人鞋襪盡春光(행인혜말진춘광)
월출령을 넘으며
산바람 비를 몰아내니 한낮에도 서늘해지고
계곡 가로질러 층층이 징검다리 놓여 있네
일만 골짝 일천 봉우리엔 온통 붉은 진달래
행인들의 신과 버선에도 봄빛이 가득하네
春歸有恨(춘귀유한)
桃杏香殘綠漸稠(도행향잔록점조)
懶蜂來往土墻頭(나봉래왕토장두)
生憎湍激前溪水(생증단격전계수)
漂送飛花不暫留(표송비화불잠유)
가는 봄을 안타까워하다
복사꽃 살구꽃 향기 옅어지니 초록 짙어져
벌들은 한가롭게 흙담 위를 오고 가네
참으로 미워라 세차게 흐르는 앞 시냇물
잠시도 쉬지 않고 꽃잎 떠내려 보내다니
그러나 수상한 세월은 감수성 풍부한 시인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외세의 침탈 야욕은 점점 거세집니다. 위정자들은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점점 더 부패해져 갑니다. 부패하니 당연히 무능하고요. 몸은 비록 멀리 전라도 구례에 있지만 서울의 동태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汶江道中(문강도중)
路缺江身縮(노결강신축)
洲回岸影重(주회안영중)
沙鷗元自澹(사구원자담)
秋蝶尙餘濃(추접상여농)
店買荒村果(점매황촌과)
樵刊古墓松(초간고묘송)
行人預愁雨(행인예수우)
額手候雲容(액수후운용)
문강 도중에서
길은 이지러지고 강폭은 쭈그러들었고
모래섬 휘돌아 언덕 그림자 겹치었네
백사장 갈매기는 원래 절로 조용한데
가을 나비는 아직도 고운 빛 띠었네
매점에선 궁벽진 마을의 과일을 팔고
나무꾼은 무덤의 소나무를 베는구나
나그네는 미리 비가 올까 걱정하여
이마에 손 얹고 구름 동태를 살피네
늦은 가을이었나 봅니다. 물이 줄어 강폭이 줄어들었습니다. 드러난 모래섬 너머로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칩니다. 갈매기는 조용히 물가에 머물고, 늦가을이라 들어가야 할 나비는 오히려 생기가 있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입니다.
그러나 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매점에선 팔릴지 말지 모르는 쓸쓸하고 황량한 마을의 과일을 팝니다. 나라나 동네에 기강이 있다면 무덤의 소나무를 베지 못할 텐데 나무꾼이 태연히 베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지사(志士)는 오늘도 세상의 동태를 살핍니다.
참고로 문강(汶江)은 지금 구례읍 하류 문척면과 토지면 사이의 섬진강을 일컫던 이름입니다.
아아.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됐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황현 선생은 더 이상 길을 찾을 수 없었나 봅니다. 황현 선생은 타고난 양심을 따라, 글을 읽으면서 생긴 신념에 따라 없어진 조국과 함께 영원히 잠드는 길을 선택합니다.
몰락했다고는 하지만 황현 선생 또한 양반 기득권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부패한 세상에 저항했던 동학혁명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시대의 한계를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생이 가졌던 애국충정은 달리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의 시를 보면서 풍부한 감성에 놀랐습니다. 좀 더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서정시들이 나왔을까요. 다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세계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평화와 공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서로 기대고 살아야 합니다. 찬찬히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모두 서로의 노동에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타인의 노동, 타인의 노고, 타인의 헌신에 대하여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함민복 시인의 시를 보면서 우리가 배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봅니다.
합장의 힘
- 함민복
밤에 왜 마당에서 불을 피워요
어, 이거 절 보수할 때 나온 나무토막
나무 보일러에 넣을 수도 없고
해서 깨끗한 데서 태워주는 거야
향나무도 아닌데 향내가 이렇게 나
천년도 넘게 향이 배서인가 봐요
불도 지켜야 하고 술이나 한잔 먹지
도대체 몇 시간을 타는 거지
천년도 넘게 향을 태워서 그런가봐요
사람들 맘이 배서 그렇다고
연기가 절 쪽으로 올라가네요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2022년 6월 10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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