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명대사의 시 「증연장로(贈蓮長老)」에 붙여

 

 

호수

- 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지는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태준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

 

 

어렸을 때였습니다. 하나 둘 셋 넷. 할머니에게서 백까지 세는 걸 배웠습니다. 거기까지만 배웠으면 좋았으련만, 그만 그 다음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백이 백 번 모이면 만이 되고, 만이 만 번 모이면 억이 되고, 억이 만 번 모이면 조가 되고, 조가 만 번 모이면 경이 되고.. 그러면 끝은? ‘이라는 숫자도 아득했지만 이라는 단어는 더욱 아득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지도 보기를 좋아해 세상 나라들을 다 외우고, 관심이 하늘로 이어졌습니다. 하늘 끝은 어디일까요? 하늘 끝을 생각하다 시간의 끝을 생각했습니다. ‘’. 참으로 아득한 단어였습니다. 어린 아이가 견디기 힘겨운 아득한 단어였습니다. 모든 것의 에서 무존재(無存在)를 얼핏 보았고, 무존재에 비추어 볼 때 모든 것은 보잘 것 없어 보였습니다.

 

 

펄랑못 : 제주도 비양도에 있는 길이 약 500m에 달하는 큰 호수다. 밀물 때는 해수가 들어오고, 썰물 때문 민물이 채워지는 독특한 환경 때문에 희귀 동식물이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호숫가에 서면 사모하는 마음처럼 잔물결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마음 속 호수에 끝이 중요한가요? 사모하는 일에 끝이 중요한가요? 오늘 호숫가에 손끝으로 밀려오는 잔물결이 있으면 되지 않나요? 그것이 비록 나중에는 부질없는 것이 될지언정 말이에요. 그것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래서 오늘도 호숫가 잔물결을 일렁이고, 그 물결을 어루만진답니다.

 

오늘의 한시산책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유명한 승장(僧將)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중종 39)~1610(광해군 2))입니다. 고승의 시를 소개하려고 하니 왠지 저도 마음이 하늘가에 가 닿은 것처럼 공허하기도 하고 가볍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문태준 시인의 시 호수가 위와 같이 읽히네요.

 

 

贈洛山僧(증낙산승)

 

漢陽南道落殘花(한양남도낙잔화)

佳節忩忩不柰何(가절총총불내하)

明日春歸君又去(명일춘귀군우거)

不堪相送過天涯(불감상송과천애)

 

낙산의 스님에게 주다

 

한양 남쪽 길엔 남은 꽃잎마저 다 지고

바삐 떠나는 좋은 시절 붙잡을 수 없네

내일이면 봄날도 가고 그대마저 가리니

하늘 끝에 보내는 이별 견딜 수 없어라

 

 

저는 한시산책을 연재하면서 스님들의 시가 더욱 좋아졌습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선문답 같은 시들도 있지만, 이 시처럼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시들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에 갇힌 선비들의 시들은 왠지 교훈적이어서 부담스럽습니다. 당쟁이 격화된 이후의 시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그런 흐름에 저항한 시인들도 있지만요. 상대적으로 스님들의 시가 좀 더 자유로워서 저의 성정과 맞는 것 같습니다.

 

 

영은사사명당대선사진영(靈隱寺四溟堂大禪師眞影) : 1788년(정조 12) 제작된 것으로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惟政)입니다.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입니다. 우리에겐 사명당이라는 호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승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해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1605(선조 38)에는 일본에 들어가 당시 실권자 덕천가강(德川家康)과 협상하여 일본에 잡혀간 3,000명의 동포를 송환하여 함께 귀국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사의 이런 활약은 민간에 많은 설화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用少陵韻(용소릉운)

 

萬事逢秋已自哀(만사봉추이자애)

又聞天塞鴈南廻(우문천새안남회)

白雲在望鄕關遠(백운재망향관원)

黃葉滿山書信稀(황엽만산서신희)

節晩池塘荷敗雨(절만지당하패우)

愁多道路客登臺(수다도로객등대)

轉蓬何處他時夜(전봉하처타시야)

坐對燈龕倒一杯(좌대등감도일배)

 

소릉의 운(韻)을 쓰다

 

가을이 되니 모든 게 서글퍼지는데

변방의 기러기 남으로 간다고 하네

흰 구름만 바라볼 뿐 고향은 멀어

온 산 잎이 누렇도록 편지 드무네

늦가을 연못엔 연잎 비에 꺾이고

시름 많은 길손은 누대에 오르네

떠도는 몸 어느 곳 어느 날 밤에야

등잔불 마주 앉아 한잔 기울일까나

 

 

소릉(小陵)은 당나라 시대 대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별칭입니다. 한나라 선제(宣帝)의 후비 허황후(許皇后)의 능이 소릉입니다. 두보는 일찍이 소릉의 서쪽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라고 하였습니다. 등감(燈龕)은 등잔을 얹기 위해 벽의  부분을 파서 만든 자리입니다. 대사는 지금 전장을 누비는 승장(僧將)이라 떠돌이 신세입니다. 언제나 전란이 끝나 집에서 편하게 술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萬瀑洞(만폭동)

 

此是人間白玉京(차시인간백옥경)

琉璃洞府衆香城(유리동부중향성)

飛流萬瀑千峯雪(비류만폭천봉설)

長嘯一聲天地驚(장소일성천지경)

 

만폭동

 

여기가 바로 인간 세상의 천상낙원

신선들의 유리궁 별천지요 불국토라네

날리는 일만 폭포 눈 덮인 일천 봉우리

길게 울리는 소리에 천지가 다 놀라네

 

 

천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폭포가 어우러진 만폭동은 수려한 금강산에서도 가장 수려한 곳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길 소원했던 곳입니다. 사명대사도 이곳을 찾았고, 황홀한 경치를 노래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임진왜란 전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백옥경(白玉京)은 신선이 사는 천상의 낙원을 말합니다. 유리(琉璃) 동부(洞府)는 유리궁(琉璃宮)과 같은 말로,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뜻합니다. 중향성(衆香城)은 불국토를 말합니다. 일일이 주석을 달아야 할 것 같아서 풀어서 옮겨봤습니다.

 

 

금강전도(金剛全圖) :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풍을 연 겸재 정선(1676(숙종 2)-1759(영조 35))이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4.5㎝, 세로 130.8㎝이다. 화면 중심으로는 수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눈 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국보 제217호이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산대사는 15세 되던 1558(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다음해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햇수로 3년 뒤인 1561(명종 16) 18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32세 되던 1575(선조 8) 불문(佛門)에서 합심하여 천거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가 되었으나 곧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중종 15)~1604(선조 37))을 찾아가서 도를 닦았습니다.

 

승승장구하는 걸 하늘이 시기해서일까요. 1589 정여립(鄭汝立, 1546(명종 1)~1589(선조 22))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지만 충격은 매우 컸나 봅니다. 이때 지은 시를 보겠습니다.

 

 

己丑橫罹逆獄(기축획리역옥)

 

娥媚山頂鹿(아미산정록)

擒下就轅門(금하취원문)

解網放還去(해망방환거)

千山萬樹雲(천산문수운)

 

기축년에 역옥의 횡액을 당하다

 

아미산 꼭대기에 사는 사슴이

잡혀 내려와 군문(軍門)에 이르렀다

그물에서 풀려나 다시 돌아가네

숲 우거진 깊은 산 구름 속으로

 

 

사명대사가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잡혀왔던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관아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당시 건물로는 지금은 객사문(국보)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臨瀛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적 제388호이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에 왜적(倭賊)이 영동에 침입하여 금강산 유점사(楡岾寺)까지 몰려왔습니다. 사명대사가 10여 명의 문도를 이끌고 곧장 유점사 산문(山門)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문도를 모두 결박하였습니다. 대사가 홀로 중당(中堂)에 이르니, 왜적의 두목이 대사가 비범한 것을 알고는 빈주(賓主)의 예()로 대하면서 문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대사가 글로 써서 문답을 하니 왜적들이 공경하며 심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고성(高城)으로 들어가니, 적장(賊將) 세 사람이 모두 대사를 예우(禮遇)하였습니다. 대사가 글로 문답하며 살생(殺生)을 좋아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적장이 훈계를 받아들였으며, 3일 동안 대사를 머물게 하며 대접을 하고는 성 밖에 나와서 전송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영동 아홉 고을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대사의 공이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을 대표해서 적진으로 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4차례 회담을 가졌습니다. 일본을 대표한 가토는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등 이른바 강화5조약을 요구합니다. 대사는 이에 대해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605(선조 38)에는 일본에 들어가 당시 실권자 덕천가강(德川家康)과 협상하여 일본에 잡혀간 3,000명의 동포를 송환하여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두려워서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대사는 의연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평양성탈환도(平壤城奪還圖) :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왜군과 치른 4차 평양성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사진 : 국립중앙박물관)(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을 볼 수 있다.)

 

승병의 대장으로 이름났지만 사명대사는 청허 서산대사의 수제자로 고승(高僧)이기도 했습니다. 사명대사의 선()을 행하고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한 노래인 선게(禪偈) 하나를 보겠습니다.

 

 

贈蓮長老(증연장로)

 

鐵關牢鎻無行路(철관뢰쇄무행로)

西擊東敲要打開(서격동고요타개)

倏然爆地疑團破(숙연폭지의단파)

管取驚天動地來(관취경천동지래)

 

연 장로에게 주다

 

무쇠 관문 굳게 잠겨 나갈 길이 없거든

서쪽 치고 동쪽 두들겨 열어젖혀야지

의심 덩어리 탁 하고 홀연히 깨뜨리면

분명코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하리라

 

 

사명대사의 이 선게(禪偈)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벼룩은 자기 키의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정이 있는 유리그릇에 오래 담아 두면 그릇에서 꺼내놔도 그릇 높이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계라고 느끼는 건 어쩌면 유리 그릇 속 벼룩처럼 길들여진 습성 아닐까요. 한계를 넘어서려면 지금보다 한 배, 두 배 더 뛰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쪽을 치고 동쪽을 두들겨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안 되면 또 다른 내가 이어서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신동엽 시인의 시 너 에 게」를 소개하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치고자 합니다.

 

 

너 에 게

- 신동엽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 터

새 순 돋듯

허구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신동엽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창작과비평사, 1989)

 

 

2022년 5월 10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