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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石洲) 권필(權韠) 선생의 시 「궁류시(宮柳詩)」에 붙여
무인도
- 김미정
어디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느냐
어둠을 밀고 가는 차가운 도시 불빛
엎드려 갈 곳을 몰라, 가도 가도 바닥뿐
그 바닥 핥고 가는 왜바람 소리더냐
머리맡 흔들고 간 엇갈린 수신호에
멀어져 가는 눈길과 돌아누운 그림자
역 광장 가로질러 때 이른 꽃샘이냐
손가락 사이사이 검푸른 풍랑 일어
출항을 꿈꾸는 저 몸결, 어둠살을 더듬어
(김미정 시집 『슬픔의 뒤편』 문학의전당, 2022)
수많은 발길이 엇갈리는 도시의 밤거리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바닥만 바라보며 걸을 뿐입니다. 휘황한 불빛이 빛나고, 수없는 차량이 몰려다녀도 나와 연결될 것이 하나도 없고, 가야할 곳도 정할 수 없다면 여기가 무인도나 무에 다르겠습니까. 이리저리 방향을 마구 바꾸는 왜바람이 붑니다. 멀어져 가는 눈길과 돌아누운 그림자에 왜바람처럼 나의 마음결도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꽃샘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스칩니다. 깜깜한 밤처럼 앞길이 보이지 않지만, 이제는 어딘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헛된 봄꿈 일지라도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금년 수상자인 허준 교수의 모교 졸업식 축사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축사에서 자신의 대학 생활을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다”라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라고 부탁합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 이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정해진 길만 가는 이는 길을 잃어버릴 일도 없는 것이죠. 안온한 출세의 길을 멀리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갔던, 그래서 무인도처럼 한없이 외로웠던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권필(權韠, 1569년(선조 2)~1612년(광해군 4)) 선생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春日有懷(춘일유회)
綠楊如畫弄晴暉(녹양여화롱청휘)
深院蒼苔晝掩扉(심원창태주엄비)
燕子歸來春寂寂(연자귀래춘적적)
杏花零落雨霏霏(행화영락우비비)
心還舊國身猶滯(심환구국신유체)
夢對淸樽覺却非(몽대청준각각비)
京洛故人休借問(경락고인휴차문)
十年江海淚盈衣(십년강해루영의)
봄날에 회포가 있어
그림 같은 푸른 버들은 맑은 햇살을 희롱하고
푸른 이끼 낀 깊은 집은 대낮에도 문 닫혔어라
제비는 다시 돌아오고 봄날은 적적한데
살구꽃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네
마음은 고국에 돌아가도 몸은 여기 머물렀고
꿈속에 함께 술 마시다 깨면 아무도 없어라
경성의 벗들이여 내 소식을 묻지 마오
십 년 세월 강화에서 눈물만 옷깃을 적신다오
권필 선생은 일찍이 과거를 단념했다고 합니다. 감수성이 풍부한데다 자존심이 세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라 출세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권벽(權擘, 1520년(중종 15)~1593년(선조 26)) 선생은 시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 영향인지 어려서부터 시 잘하기로 이름났었습니다. 비록 벼슬하지 않은 포의(布衣)의 신세였지만, 문단(文壇)의 유명 인사였습니다.
1601년(선조 34) 중국에서 글 잘하는 고천준(顧天埈)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이때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 이정귀(李廷龜)는 고천준과 맞서 수준 높은 시를 주고받을 관리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이동열(朴東說), 이안눌(李安訥), 홍서봉(洪瑞鳳)이 그들이었습니다. 글 잘하고 시 잘 쓰는 신진 관료들이었습니다.
이정귀는 이들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권필 선생을 제술관(製述官)으로 추천합니다. 제술관이 된 권필 선생은 시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명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선조(宣祖) 임금이 참봉(參奉) 등 벼슬을 권하지만 사양하고 강화로 내려갑니다. 위의 시도 이때 쓴 것으로 보입니다.
江口早行(강구조행)
鴈鳴江月細(안명강월세)
曉行蘆葦間(효행로위간)
悠揚據鞍夢(유양거안몽)
忽復到家山(홀부도가산)
강구(江口)에서 이른 새벽에 길을 가며
기러기는 울고 강에는 그믐달
새벽녘에 갈대숲 사이를 가노라
유유히 안장에 앉아 꿈꾸노라니
홀연히 다시 고향에 당도하였어라
강화도에 있으면서 고양(高陽)에 있는 집으로 나오는 과정을 그린 시(詩)인 듯합니다. 권필 선생은 지금의 강화도 양도면에 터전을 잡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연미정이 있는 월곶나루에서 배를 탔을까요. 월곶나루에서 밀물을 타면 배가 순식간에 고양이나 마포에 오니까요.
春題(춘제)
風塵不到野人家(풍진부도야인가)
獨掩衡門度歲華(독엄형문도세화)
莫笑此翁貧至骨(막소차옹빈지골)
春來嬴得滿山花(춘래영득만산화)
봄에 적다
세상 풍파 촌사람 집엔 못 이르나니
홀로 사립 닫고서 긴 세월 보내노라
이 늙은이 몹시 가난하다 비웃지 말라
봄이 오니 온 산의 꽃 실컷 얻었나니
권필 선생은 1610년(광해 2)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됩니다. 미관말직이지만 관직을 갖는 다는 것은 당시 양반 사회에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임명되고 얼마 안 되어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아마도 광해군 정권 초기의 극심한 당쟁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강화도로 내려갑니다. 위의 시는 그 때 쓴 시가 아닐까 합니다.
권필 선생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제자입니다. 스승의 영향 때문인지 서인(西人) 당파 색깔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북인(北人)인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과 아주 친했다고 합니다. 둘은 동갑내기이기도 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기에 당(黨)을 뛰어 넘어 벗이 되었나 봅니다. 허균이 권필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형이 강도(江都, 강화)에 계실 때에는, 1년에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시면 곧 저의 집에 계속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라는 대목이 있으니까요.
허균은 권필 선생의 제자 심척(沈惕)의 청으로 「석주소고 서(石洲小稿序)」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권필 선생의 문집 『석주집(石洲集)』에는 이 서문을 비롯하여 허균에 관련된 기록이 전무합니다. 아마도 허균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후대에 모두 뺐지 않았을까 합니다. 암튼 허균은 권필 선생의 시를
‘낙신(洛神)이 사뿐사뿐 물 위를 걷는 것 같고 눈을 돌려 빛을 흘려 뱉는 기운이 난(蘭)과 같다(人評汝章詩 如洛神凌波微步 轉眄流光 吐氣如蘭)’
고 표현합니다. 극찬입니다. 낙신은 중국 고대 전설 속 황제 복희씨(伏羲氏)의 딸로 낙수(洛水)에 빠져죽어 신이 된 낙수의 여신을 말합니다.
허균이 자신의 다섯 마음의 벗을 노래했는데 권필 선생에 대한 것을 보겠습니다.
權汝章(권여장)
石洲天下士(석주천하사)
其才寔王佐(기재식왕좌)
抱負不肯施(포부불긍시)
甘爲窮谷餓(감위궁곡아)
爲詩透天竅(위시투천규)
絶唱有誰和(절창유유화)
王孟合在後(왕맹합재후)
顔謝亦虛左(안사역허좌)
권여장
석주는 천하의 높은 선비라
그 재주는 진실로 왕좌다마다
포부를 베풀어 쓰려 하잖고
산골에서 굶주림도 달가워했네
시를 하여 천규를 뚫어냈으니
절창이라 뉘 능히 화답하리요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의당 뒤에 있게 될 거고
안연지(顔延之) 사영운(謝靈運) 역시 윗자리를 비워야 하지
(하략)
여장(汝章)은 권필 선생의 자(字)고, 석주(石洲)는 호입니다. 시에 나오는 천규(天竅)는 하늘의 구멍이니 재주가 하늘의 솜씨라는 뜻입니다. 허균은 중국의 대 시인 왕유, 맹호연, 안연지, 사영운 모두 권필 선생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선언합니다.
권필 선생을 세상 풍파를 피해가려 했지만, 결코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선생은 결국 자신이 지은 시 때문에 죽습니다.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를 보겠습니다.
宮柳詩(궁류시)
宮柳靑靑花亂飛(궁류청청화란비)
滿城冠蓋媚春暉(만성관개미춘휘)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악)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궁류시
궁궐 버들 푸르고 꽃은 어지러이 나는데
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떤다
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그 누가 위태한 말 포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뭔가 알 듯 모를 듯하지요. 뭔가를 풍자한 것 같고요. 이 시를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시의 원 제목은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 임무숙이 삭과됐다는 말을 듣고」입니다. 무숙(茂叔)은 임숙영(任叔英, 1576년(선조 9)~1623년(인조 1))의 자(字)이고, 삭과는 합격자 명단에서 삭제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낙방시킨다는 뜻이죠.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포의(布衣)’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를 말합니다. 임숙영을 뜻하기도 하고 권필 선생 자신을 뜻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는 1611년(광해 3)이었습니다. 임숙영이 이 해 있은 과거 시험에서 광해군 실정과 왕비 류씨(柳氏)와 동생인 류희분(柳希奮, )을 통한 인사청탁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임숙영이 제출한 「대책문(對策文, 정사(政事)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 자체로 명문입니다. 문장만으로는 장원급제를 시켜도 전혀 하자가 없는 글입니다. 그러나 임금과 외척을 아울러 비판하였기에 후환을 우려한 시관(試官, 과거를 주관했던 관리)들이 낙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과거 책임자인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 3)~1622년(광해 14)) 선생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숙영을 급제시킵니다.
결국 임금인 광해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임숙영의 과거 급제를 취소시킵니다. 실록에 보면 광해군은 임숙영의 급제를 취소시키면서 “내가 안질로 그 즉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말하는 것”이라고 사족을 답니다. 아마도 류희분을 비롯한 외척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중에서야 낙방시킨 것 같습니다.
임숙영과 친한 권필 선생은 분노해서 위의 「궁류시(宮柳詩)」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곳에서 터집니다. 1년이 지나고 나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납니다. ‘무옥’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을 죄가 있는 듯이 꾸며내어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김직재의 무옥은 당시 집권당인 대북(大北)이 소북(小北)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역모사건입니다.
대대적으로 역모 연루자를 수색했고, 그 과정에서 이 시가 나왔습니다. 궁류시(宮柳詩)」의 버들 ‘류(柳)’는 왕비와 외척의 성씨이기도 했습니다. 류희분을 비롯한 외척들은 이 시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왕비까지 비난한 것이라며 시를 쓴 사람을 찾아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합니다. 결국 권필 선생은 궁궐로 잡혀와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명령에 의해 곤장을 맞고 함경도 경원부(慶源府)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대문을 나서자마자 곤장 맞은 곳이 도져서 죽고 맙니다. 당시 권필 선생의 나이 44세였습니다. 잡혀가기 3일 전에 ‘이제부터는 입을 닫고 여생을 보내리(從此括囊聊卒歲)’라고 읊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권필 선생의 아름다운 수많은 시들을 단 한 편의 한시산책으로 풀어내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다뤄보겠습니다. 권필 선생이 그랬듯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바꿔보려는 이들에게 현실은 늘 고달프고 힘듭니다. 청명한 가을입니다. 때로 힘든 일들 내려놓고 가을의 소소한 행복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들에게 남경림 시인의 시 「늦가을의 행복」을 드리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늦가을의 행복
- 남경림
사위어 가는 국화꽃 앞에
앉아 있는 햇살 한 움큼
여위어 가는 낙엽의 등을
쓰다듬는 바람 한 스푼
메말라 가는 땅의 발끔치를
적셔주는 이슬 한 방울
이런
소소한 속삭임 때문에
가난한 늦가을도 행복하다.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
* 한시 번역은 존경하는 고전번역원 이상하 선생이 번역한 것을 원본으로 하였으며, 몇 군데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바꿨습니다.
2022년 9월 9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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