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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 선생의 시 「산중(山中, 산속에서)」에 붙여

 

 

마지막 사랑

- 남정림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두세요

모든 화려함이 떠난 쓸쓸한 자리에

그대 나와 함께 머물 수 있나요?

 

모든 사람이 떠난 외로운 자리에

그대 나와 함께 꿈꿀 수 있나요?

 

사랑스러움마저 허물어져도

그대 안의 사랑의 빛으로

마지막 사랑을 켤 수 있나요?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년)

 

 

사랑이란 누군가가 사랑의 빛으로 상대를 비출 때 비로소 나타나는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처럼 말입니다. 내 사랑의 빛은 얼마나 될까요. 내가 받는 사랑의 빛은 얼마나 될까요. 받는 사랑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아 그믐달처럼 내 존재가 묻힌다 해도 내 안의 사랑의 빛을 토해낼 수 있을까요.

 

남정림 시인의 절절한 사랑 시를 보면서 저는 따스함 보다는 절대의 고독을 보았습니다.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자꾸만 끝을 보여주니까요. 그 끝에서도 나의 사랑이 남아 있을까요. 그 끝에서 사랑은 당위와 존재 사이에서 흔들리게 마련이고, 그래서 외로운 거겠지요.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의 고뇌 또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주변의 불신 사이에서 계속 부대껴야 하니까요.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야 하니까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선생도 그런 지식인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시를 보겠습니다.

 

 

山中(산중)

 

天寒松檜靜無風(천한송회정무풍)

入夜深山萬籟空(입야심산만뢰공)

霜月滿廊僧獨起(상월만랑승독기)

氷泉幽咽小橋東(빙천유인소교동)

 

산속에서

 

하늘 찬데 소나무 전나무 바람 없어 고요하고

밤이 드니 깊은 산에는 오만 소리 다 멈췄구나

차가운 달빛 회랑에 가득한데 중은 홀로 일어나고

작은 다리 동쪽 얼음 밑 냇물은 졸졸 흘러가누나

 

 

추운 겨울밤입니다. 산 속에 있는 암자에는 인간 소리, 짐승 소리 모든 소리가 다 사라졌습니다. 차가운 달빛만 회랑에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어이해 홀로 일어났나요. 작은 냇물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얼음 밑으로는 보이지 않는 냇물이 졸졸 흘러갑니다. 어쩌면 홀로 일어나 있는 분은 이산해 선생 본인이 아닐까요. 세상은 온통 얼어 있지만, 어름 밑 냇물처럼 흘러가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계 이산해 영정(鵝溪李山海影幀)」입니다. 1600년대 초에 공신 초상화로 제작되었는데, 1894년(고종 31) 이산해의 후손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이 작품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한 초상화입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이산해 선생은 으뜸 관직인 영의정을 3번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학문 권력의 수장인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분입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 또한 잘 썼습니다. 이산해 선생이 활약하던 시대는 당쟁이 발생하였던 시대입니다. 사림(士林)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질 때 동인으로 활약했습니다.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질 때는 북인의 영수가 되었고,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뉠 때 대북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정의(正義)와 명분(名分)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물(公物)이므로 누가 홀로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서인보다는 동인이, 남인보다는 북인이, 소북보다는 대북이 정의명분에 더욱 집착했고, 그래서 강경파로 분류됐습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인 이건창(李建昌) 선생이 붕당정치사에 관하여 저술한 역사서입니다. 1575년(선조 8)에서 1755년(영조 31)까지의 약 180년간을 대상으로 하여 당론(黨論) 전개의 줄기를 잡고, 머리에 자서(自序), 말미에 원론(原論)을 붙였습니다. 자서에 따르면,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 1753년(영조 29)~1809년(순조 9))의 『국조문헌(國朝文獻)』 가운데서 당론 관계를 발췌해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산해 선생은 평생을 정의명분을 중시하며 살았음에도 권모술수의 정치인’, ‘편협한 정당인으로 이미지가 덮인 건 인조반정(仁祖反正)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산해 선생이 이끌던 대북당은 광해군 통치 기간 내내 집권당이었습니다. 1623(광해군 15)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은 쫓겨나고 대북당을 비롯한 모든 북인들이 숙청됩니다. 그리고 반대파인 서인(西人)이 집권합니다. 서인들이 대북당 영수였던 이산해 선생에게 호의적인 기록을 남길 리 없었겠죠.

 

이산해 선생은 매우 서정적인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시 하나를 보겠습니다.

 

 

送僧(송승)

 

一筇珍重遠衝寒(일공진중원충한)

數夜蒲團意未闌(수야보단의미란)

別後新梅開滿樹(멸후신매개만수)

草堂花月共誰看(초당화월공수간)

 

스님을 전송하며

 

추위 속에 지팡이 하나로 멀리서 찾아주니

며칠 밤을 함께 보내도 아쉬운 정 많아라

이별한 후 새 매화가 나무 가득 피련마는

초당의 꽃과 달을 뉘와 함께 구경할꼬

 

 

이산해 선생의 시 산중(山中, 산속에서)를 이번 한시산책의 중심 시로 삼은 것은 시 자체로 빼어나기도 하지만 상월(霜月)’이라는 단어에도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상월(霜月)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서리와 달입니다. 흰 서리 내린 풍경에 비친 달빛일수도 있고요,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내리는 흰 서리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찌됐던 차가운 겨울 풍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겨울이 갖는 서늘함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으로도 이입됩니다. 서늘해진 마음의 쓸쓸함은 이파리를 모두 떨군 나목(裸木)처럼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공감이 쉽게 되기도 합니다.

 

 

뒤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묘이고, 앞은 이색 선생의 막내아들 이종선(李鍾善, 1368년(공민왕 17)~1438년(세종 20)) 선생의 묘입니다. 각각 이산해 선생의 7대조(代祖), 6대조가 됩니다. 서천군 한산면 영모리에 있습니다. 이산해 선생의 호 아계(鵝溪)는 한산(韓山)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상월(霜月)’이라는 시어가 들어간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선생의 시를 보겠습니다. 이색 선생은 당대의 대학자였으며, 이산해 선생의 7대조(代祖)로 직계 조상이기도 합니다.

 

 

我歌(아가)

 

我歌誰和思依依(아가수화사의의)

流水高山世已稀(유수고산세이희)

霜月滿簾寒夜永(상월만렴한야영)

悄然危坐撫琴徽(초연위좌무금휘)

 

나의 노래

 

내 노래 누가 화답할까 애틋한 이 마음이여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이미 만나기 어렵도다

서리 비춘 달빛 발에 가득한 긴긴 겨울밤에

처연히 오똑 앉아 거문고 줄을 퉁겨 보네

 

 

시에서 쓸쓸함이 넘쳐나지요.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이미 만나기 어렵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와 그의 연주를 잘 알아주었던 벗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고 연주를 하면, 친구인 종자기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를 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였다고 합니다.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옥동금(玉洞琴)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의 셋째 형인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년(현종 3)~1723년(경종 3))가 만들어 연주하던 거문고입니다. 이 거문고는 제작 시기와 사용자가 분명하여 18세기 초 우리 악기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옥동금’은 옥동 이서가 금강산 만폭동의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얻게 되어 이로 거문고를 만들고, 뒤판에 시를 지어 새겼으며, 당시에는 이를 ‘군자금(君子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2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종자기와 달리 이색 선생은 이미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어도 홀로 거문고 줄을 퉁겨 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대를 이끌어갈 선비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없이 외롭더라도 말입니다.

 

끝으로 상월(霜月)’ 시어(詩語)를 쓴 구봉령(具鳳齡, 1526(중종 21)~1586(선조 19)) 선생의 시 죽수서원(竹樹書院)을 보겠습니다. 구봉령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제자로 선조 임금 시절 사법기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분입니다.

 

 

竹樹書院(죽수서원)

 

晶熒結構照溪濱(정형결구조계빈)

洞壑玲瓏絶點塵(동학영롱절점진)

萬死飄零當世事(만사표령당세사)

千年香火後來人(천년향화후래인)

祥雲瑞日瞻依遠(상운서일첨의원)

美玉精金景仰新(미옥정금경앙신)

瑤宇秋晴霜月白(요우추청상월백)

依然如見舊風神(의연여견구풍신)

 

죽수서원

 

수정처럼 밝게 지어 시냇가에 비치니

골짜기도 영롱하여 한 점 티끌 없네

온갖 고생하며 떠도는 건 당세의 일이고

천 년토록 향불 피우는 건 후세의 일이네

상서로운 구름과 햇살 멀리를 우러르고

고운 옥과 순수한 금 다시금 사모하네

맑은 가을 하늘에 차가운 달빛 밝은데

여전히 그 옛날 기상을 보는 듯하네

 

 

죽수서원(竹樹書院조광조(趙光祖, 1482(성종 13)~1519(중종 14)) 선생과 양팽손(梁彭孫, 1488(성종 19)~1545(인종 1)) 선생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조광조 선생이 귀양 왔다가 사약(賜藥)을 받아 숨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시내 맞은편에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과 양팽손 선생은 중종 임금 시절 개혁에 앞장섰던 동지입니다. 조광조 선생이 실각하자 양팽손 선생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 능주로 귀향했습니다. 조광조 선생의 개혁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을 천년 동안 이어갈 것임을 구봉령 선생은 조광조 선생을 모신 죽수서원에서 다짐하고 있습니다.

 

 

죽수서원(竹樹書院)입니다. 죽수서원은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양팽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었습니다. 죽수서원은 1570년(선조 3)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가 같은 해에 나라에서 ‘죽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전남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모산리)에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입니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오늘은 이산해 선생을 비롯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바꾸려고 애쓰셨던 분들의 시를 보았습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즈음 수없이 일어섰던 의병(義兵)들을 보더라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앞장 선 분들 중에 이름을 남긴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좋게 바꾸고자 묵묵히 활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이정하 시인의 시 바람 속을 걷는 법 3을 바치며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바람 속을 걷는 법 3

- 이정하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하고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 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 번 안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이정하 시집 『편지』 책만드는집, 2013년)

 

 

참고 : 본 글의 한시 번역은 한국고전종합DB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2022년 10월 12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