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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西山大師) 시(詩) 「청허가(淸虛歌)」에 붙여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먼지 한 점인지 모릅니다. 티끌 한 점인지도 모르고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비추어야만 드러나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비추어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찬란하고 황홀한 존재가 됩니다. 그대가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 비로소 그 온기로 내 몸이 살아납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한시(漢詩)의 주인공은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37)) 선사입니다. 대사의 시를 소개하려고 우리 현대시를 찾다 보니 김선우 시인의 시 「작은 신이 되는 날」이 내 가슴에 쏙 들어왔습니다. 서산대사의 시 한 수 보겠습니다.
杏院(행원)
春風吹杏院(춘풍취행원)
枝動鳥雙飛(지동조쌍비)
斷送落花雨(단송낙화우)
樽邊客濕衣(준변객습의)
살구밭
한 줄기 봄바람 살구밭에 불어오니
가지 흔들리며 쌍으로 새가 나네
하릴없이 꽃비 내리는 걸 바라보다
술동이 옆 나그네 옷이 젖어가누나
봄 풍경이 푹 빠진 스님의 모습이 그려지나요. 불교의 도(道)를 깊이 알지 못하지만, 핵심은 자연과 사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산대사의 시는 현재 600여 수가 넘게 전해오는데, 서정성이 듬뿍 묻어 있는 시들이 참 많습니다.
서산대사의 법명(法名, 이름)은 휴정(休靜)이고, 청허(淸虛)는 호입니다. 주로 묘향산에 계셨기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불가(佛家)에서는 대단한 고승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산대사가 남긴 시문(詩文)을 모아 후학들이 『청허당집(淸虛堂集)』이라는 문집을 간행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문집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년(선조 17)~1647년(인조 25)) 선생이 쓴 서문 「청허당집(淸虛堂集) 서(序)(1)」에 보면 서산대사의 제자 보진(葆眞) 스님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 스님은 임제종(臨濟宗)의 적종(嫡宗, 적통을 이으신 이)이시다. 원(元)나라 말기에 석옥 화상(石屋和尙)이 고려의 태고(太古) 선사에게 전하였고, 태고는 환암(幻庵)에게 전하였고, 환암은 귀곡(龜谷)에게 전하였고, 귀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였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였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였고, 영관은 우리 스님(서산대사)에게 전하였다.”
이것은 달리 해석하면 달마(達磨) 대사로부터 이어온 선종(禪宗) 정통이 서산대사에게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허균(許筠, 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 선생이 쓴 또 다른 서문 「청허당집(淸虛堂集) 서(序)(2)」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서산대사를 묘사합니다.
“노사(老師, 서산대사)의 융명(融明, 통달)하고 간조(簡造, 간명)함은 곧바로 달마(達磨) 대사와 6조 선사 혜능(慧能)의 맥을 이었고, 마음(心)을 강설하고 본성(性)을 강설하는 묘함은 중국의 고승 남양혜충(南陽慧忠), 영가현각(永嘉玄覺), 백장회해(百丈懷海),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께 노닐었다.”
襄陽途中(양양도중)
蓬萊何處在(봉래하처재)
山遠白雲深(산원백운심)
靑歸松竹葉(청귀송죽엽)
春入燕鶯心(춘입연앵심)
양양 가는 길에
봉래산은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산은 멀고 흰 구름에 깊이 잠겼네
푸르름은 솔과 대 이파리에 물들고
봄은 제비 꾀꼬리 마음으로 들갔네
봄날 금강산을 찾아가다 양양을 지나고 있었나 봅니다. 돌아올 ‘귀(歸)’와 들어갈 ‘입(入)’의 사용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봄의 정기를 받아 소나무와 대나무 이파리가 생기를 되찾습니다. 푸르름이 돌아왔습니다. 교미기를 맞은 제비와 꾀꼬리는 목소리가 한층 들떠 있습니다. 봄이 제비와 꾀꼬리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허균 선생이 대사를 칭한 ‘융명(融明, 통달)하고 간조(簡造, 간명)함’이 이런 건가요.
惜春戱贈竹馬(석춘희증죽마)
落花千萬片(낙화천만편)
啼鳥兩三聲(체조양삼성)
若無詩與酒(약무시여주)
應殺好風情(응살호풍정)
봄을 아쉬워하며 장난으로 죽마에게 주다
천만 이파리 꽃잎은 휘날리고
두세 가락 새 울음소리 들리네
여기에 시와 술을 빼놓는다면
좋은 풍경과 정취 망치고말고
꽃잎이 난분분 휘날리는 봄날 어린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무를 만났나봅니다. 어릴 적 동무가 편하고 꺼릴 것 없는 건 서산대사 같은 고승도 저와 같은 장삼이사와 다를 바 없나 봅니다. 그래서 더욱 정겹기도 하고요.
서산대사는 15세가 되던 1534년(중종 29)에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1세 되던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대사를 모시고 계(戒)를 받았습니다. 30세가 되던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당시 불교 최고위 직책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죠.
대사는 1556년(명종 11)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보호하고 진흥시키는 데 앞장섰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자 조정에서는 당시 불교의 상징 보우(普雨, 1509년(중종 4)∼1565년(명종 20)) 스님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때려죽이고, 유생(儒生)들은 당시 불교의 총 본산이며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인 양주 회암사(檜巖寺)를 1565년 사월 초파일에 불태워버립니다.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589년(선조 22) 이른바 ‘정여립(鄭汝立)의 난(亂)’ 때에는 제자 유정(惟政)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過華嵒寺(과화암사)
山川當落照(산천당낙조)
秋草臥龍龜(추초와용귀)
古殿月應吊(모전월응조)
破囱風亦悲(파창풍역비)
화암사를 지나며
산과 강에 바야흐로 해가 지는데
가을 풀 속에 비석돌 누워있네
낡아버린 전각을 달마저 애도하고
부서진 창으로 바람도 슬퍼하누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조선은 건국 200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합니다. 조선은 유학(儒學)의 나라라면 일본은 불교(佛敎)의 나라였습니다. 왜군은 조선의 불교와 절을 존중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신립(申砬, 1546년(명종 1)~1592년(선조 25)) 장군과의 충주 전투 이후 한강을 따라 연이어 있던 크고 작은 절들을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지금도 빈 터만 남은 여주의 고달사지, 원주의 법천사지, 거돈사지는 이때 왜군이 불태운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스님들은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항전에 나섭니다. 화암사 또한 왜군이 불태운 곳이었나 봅니다. 서산대사는 부서진 절터를 지나면서 느낀 회한이 이 시에 짙게 묻어납니다. 참고로 시에 나오는 ‘용귀(龍龜)’는 용 모양의 이수(螭首)와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라는 말로, 비석을 가리킵니다.
送普願上人(송보원상인)
太白山中草庵主(태백산중초암주)
普願其名字彦澤(보원기명자언택)
三年向壁工已做(삼년향벽공이주)
今日忽着移山屐(금일홀착이산극)
主人去兮草庵空(주인거혜초암공)
草庵空兮孤雲白(초암공혜고운백)
大野茫茫天又暮(대야망망천우모)
香山一帶傷心碧(향산일대상심벽)
보원 스님을 보내며
태백산 산속 초가 암자 주인은
이름이 보원이요 자는 언택이라네
삼년 동안 벽을 향해 공부 이뤘는데
오늘 홀연 산나막신 신고 떠났네
주인이 떠나고 초가 암자 텅 비었네
초가 암자 텅 비니 흰 구름만 떠있네
큰 들판 아득하고 하늘도 해 지는 때
향산 일대가 슬픔에 잠겨 푸르구나
‘산나막신(山屐)’ 신었다는 것은 스님의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시는 스님의 죽음을 기리는 일종의 만사(輓詞)입니다. 시를 보면 초월한 듯하면서도 슬픔이 묻어납니다. 서산대사는 슬픔마저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古意(고의)
風定花猶落(풍정화유락)
鳥鳴山更幽(조명산경유)
天共白雲曉(천공백운효)
水和明月流(수화명월류)
옛 사람들 뜻에 비추어
바람이 잦아져도 꽃잎은 떨어지고
새들 우짖어도 산은 더욱 그윽해라
하늘은 흰 구름과 더불어 밝아오고
물은 밝은 달과 함께 흘러가는구나
‘고의시(古意詩)’는 선인(先人)의 고사나 시를 따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독특한 시 형식입니다. 이 시는 ‘고의시’면서 ‘선시(禪詩)’의 느낌이 참 좋아 소개해봅니다.
서산대사는 자신에 대해 읊은 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 두 수(首)만 이어서 소개하겠습니다.
題一禪庵壁(제일선암벽)
山自無心碧(산자무심벽)
雲自無心白(운백무심백)
其中一上人(그중일상인)
亦是無心客(역시무심객)
일선암의 벽에 쓰다
산은 무심히 절로 푸르고
구름도 무심히 절로 하얗고
그 속에 있는 중 한 사람
역시 무심한 나그네라네
淸虛歌(청허가)
君抱琴兮倚長松(군포금혜의장송)
長松兮不改心(장송혜불개심)
我長歌兮坐綠水(아장가혜좌녹수)
綠水兮淸虛心(녹수혜청허심)
心兮心兮(심혜심혜)
我與君兮(아여군혜)
청허가
그대 거문고 안고 늙은 소나무에 기댔나니
늙은 소나무는 마음 변함없어라
나는 노래하며 푸른 물가에 앉았나니
푸른 물은 맑고도 텅 빈 마음이어라
마음이여! 마음이여!
그대와 나뿐이로구나!
「청허가」에서 ‘그대(君)’와 ‘나(我)’는 모두 청허(淸虛) 곧 서산대사 자신이겠지요. 늙은 소나무나 푸른 물처럼 살고자 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서산대사의 시는 조선시대 유학(儒學)을 신봉하던 선비들의 시에서 볼 수 없는 자유로움과 서정이 넘칩니다. 작은 지면으로 모두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맛 뵈기로 몇 편 소개해 봤습니다. 참고로 서산대사의 시는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https://kabc.dongguk.edu)’의 ‘한국불교전서’로 가면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서산대사의 시를 보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도덕적 경향의 시가 많은 반면 서산대사의 시는 좀 더 서정적이고 인간에 대한 깊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산대사는 힘든 이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이, 품이 넓은 이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커다란 나무처럼 품이 크지만 묵묵히 자기 길을 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늘을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나해철 시인의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이번 한시산책을 마무리 합니다.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
(장명규의 그림에 부쳐)
–나해철
나 내 몸에
녹색 잎이 돋길 바라
한자리에서 평생을 살아도
때 되어 잎 내리고
때 되어 잎 돋아
흐르는 하늘에
머리를 적시면 좋아
꼿꼿이 서서
희망 같은 걸로 꿈같은 걸로
부푸는 삶이
키를 키우면
그만치 높은 곳의 바람 속에
흔들려도 좋아
나 내 몸에
때 되면 잎 내리고
때 되면 잎 돋아
한자리에서 우주를 살아도 좋아
소리없이 열매를 맺고
기적도 그렇게
조용하니 좋아
(나해철 시집 『긴 사랑』, 문학과지성사 2010)
2022년 4월 12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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