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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한시 「도중(途中, 길 위에서)」에 붙여
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시집 『그 여자네 집』, 창작과비평사, 1998)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상실은 어떤 걸까요.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아픔일까요. 설움에 복받쳐 살얼음도 도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걷다 보니 발이 젖어 있을 뿐입니다. 이를 악물고 또 악물었지만, 사람이 없는 선운사 뒤편 한적한 곳에 이르니 눈물이 납니다. 요즘 울고 싶은 이들 많을 겁니다. 울고 싶다면 한번 마음껏 눈물을 흘렸으면 합니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도 하니까요.
선운사는 제가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특히 초봄 선운사를 좋아합니다. 선운사에서 마애불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선운사 끝나는 지점에 우측으로 조그마한 샛길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르면 선운사 동백숲의 속살을 볼 수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동박새도 볼 수 있습니다. 600년 된 동백숲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세월을 가늠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동백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지금은 불타고 담장과 솟을대문 그리고 빈 터만 남은 김성수 별장이 나옵니다. 봄날 별장 문간채 툇마루나, 주춧돌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한참 머무르는 것도 참 좋습니다.
오늘은 고려의 대학자이며 시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선생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목은 선생의 말년도 그렇고, 요즘 저의 심사도 그래서 김용택 시인의 시 「선운사 동백꽃」으로 한시산책의 문을 열었습니다. 목은 선생의 시를 한편 보겠습니다.
途中(도중)
駸駸惟我馬(침침유아마)
搖搖惟我心(요요유아심)
茫茫大地遠(망망대지원)
渺渺韓山岑(묘묘한산잠)
吾生涉此路(오생섭차로)
歲月何侵尋(세월하침심)
屈指可歷數(굴지가력수)
艱苦叢在今(간고총재금)
舊時所見物(구시소견물)
遠近森成林(원근삼성림)
胡爲淡無色(호위담무색)
爲爾長哀吟(위이장애음)
길 위에서
달려가는 건 오직 나의 말이요
흔들리는 건 오직 내 마음이네
머나먼 대지는 망망하기만 하고
한산 봉우리는 아득하기만 하네
내 평생에 이 길목을 걷는 동안
세월은 어찌 그리 흘러가는가
지난 일 손꼽아 셀 수도 있건만
어려움이 몽땅 지금에 몰리었네
원근에 무성히 늘어선 숲들은
옛날부터 보아왔던 것들이건만
어이해 담담하여 빛이 없는가
너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노라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던가요. 목은 선생도 그러했나 봅니다.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지키려고 했지만,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 일파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져만 갑니다. 결국 권력에서 축출되고, 귀양살이를 하다 고향 땅으로 돌아갑니다. 서울 개경(開京)을 오가면서 이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요. 늘 보던 숲은 여전하건만, 이제는 빛을 잃었습니다. 마치 ‘내’ 마음처럼요.
목은 선생은 수재 중의 수재였습니다. 14세인 1341년(충혜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21세인 1348년(충목 4)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었습니다. 26세 되던 1353년(공민왕 2) 고려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다음해인 1354년(공민왕 3) 원나라에 가서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 받았습니다.
선생은 고려와 원나라 두 나라에서 번갈아 벼슬을 지냈고, 학문권력의 상징인 대제학(大提學) 등 온갖 화려한 벼슬을 지냈습니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당대 대학자들을 제자로 두었습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색-정몽주·길재 선생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 선생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목은 선생이 승승장구하던 젊은 시절의 시 한편을 보겠습니다.
雨(우)
一雨蕭蕭客興多(일우소소객흥다)
吟鞭高豎去程賖(음편고수거정사)
雲濃雲淡疏還密(운농운담소환밀)
風去風來整復斜(풍거풍래정복사)
溪隔靑驢是何處(계격청려시하처)
隴分黃犢似吾家(농분황독사오가)
晴光忽上長林表(청광홀상장림표)
回首神京望日華(회수신경망일화)
비
부슬부슬 한바탕 비에 나그네가 흥겨워서
말채찍 높이 들지만 갈 길은 멀기만 하네
구름은 짙었다 옅었다 성기었다 빽빽해지고
바람은 갔다 왔다 가지런했다 또 비껴 부네
시내 저편 당나귀 있는 곳은 어드메인고
밭둑 너머 송아지 뵈는 데는 우리 집인 듯
맑은 햇살 갑자기 긴 숲 위로 내려오매
서울 쪽으로 고개 돌려 햇볕을 바라보네
세상일이 잘 풀릴 때는 모든 게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소낙비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가도 즐겁기만 합니다. 구름이 가시고 맑은 햇살이 산 위로 환하게 내립니다. 벼슬을 하는 서울은 여전히 밝은 햇살이 드는 희망찬 곳입니다.
午晴(오청)
十里雲煙圖畫中(심리운연도화중)
日光野色雨溟濛(일광야색우명몽)
午天小雨風吹去(오천소우풍취거)
無數靑山與我東(무수청산여아동)
한낮이 맑게 개다
십 리에 펼쳐진 구름 안개 그림 속 같고
하늘과 들 빛 어둑어둑 가랑비 내리다가
한낮 되자 가랑비를 바람 불어 데려가고
수많은 청산들이 나와 함께 동으로 가네
아마도 원나라에서 벼슬하다 고려로 돌아오는 도중에 쓴 시(詩)인 것 같습니다.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서 요동에 이르는 길은 넓은 평야지대입니다. 우리가 넓은 들 한가운데를 기차로 빠르게 지나갈 때 먼 산은 마치 나를 따라 가는 것 같습니다.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니 수많은 청산도 나를 따라 조국 고려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점점 기울어 갑니다. 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나 싶었는데,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 일파는 노골적으로 새 나라를 만들려고 합니다. 목은 선생은 고려를 부흥시키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위화도 회군 세력은 당시 왕인 우왕(禑王, 재위:1374년~1388년)과 실권자 최영(崔瑩, 1316년(충숙왕 3)~1388년(우왕 14)) 장군을 내쫓지만 목은 선생은 우왕의 아들 창왕(昌王, 재위:1388년~1389년)을 등극시켜 이성계 일파의 야욕을 막아보려 합니다. 그것도 잠시 이성계 세력은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恭讓王, 재위:1389년~1392년)을 세워 실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목은 선생은 귀양길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혹여나 귀양에서 풀려나도 어디 한 곳 마음 둘 곳 없는 망국의 지사(志士)일 뿐입니다. 이때 지은 시조 한 수 보겠습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는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합니다. 생명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을 잃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세상은 굴러갈까요. 목은 선생의 절창 「부벽루(浮碧樓)」를 보면서 그 심정을 조금은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浮碧樓(부벽루)
昨過永明寺(작과영명사)
暫登浮碧樓(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石老雲千秋(석로운천추)
麟馬去不返(인마거불반)
天孫何處遊(천손하처유)
長嘯倚風磴(장소의풍등)
山靑江水流(산청강수류)
부벽루(浮碧樓)
어제 영명사를 들렀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어라
텅 빈 성엔 조각달 하나 떠 있고
오래된 바위엔 구름만 천년을 떠도네
기린말이 가고는 돌아오지 않으니
하늘 간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니는고
길게 한숨 쉬며 바람 부는 언덕에 서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누나
천손(天孫)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동명왕(東明王)을 가리킵니다. 동명왕이 일찍이 기린말을 기르다가 뒤에 기린말을 타고 하늘에 조회(朝會) 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시(詩)는 고구려의 옛 서울인 평양에 가서 망국의 지사(志士)의 느낌을 읊은 것 같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산은 푸르고 강은 흐릅니다. 살아있는 한 절망을 딛고 무수한 아픔을 감내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머리와 심장 사이에 눈물의 대장간을 만들어 세상을 지키는 단단한 돌을 만들어야 합니다.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찾는 이들에게 김선우의 시 「눈물의 연금술」로 위로와 격려를 드리며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눈물의 연금술
- 김선우
그 돌은 작은 모래 한알로부터 자라났다
눈물이라는
모래 한알로부터
살다보면 틀림없이 닥치는 어느날
서둘러 눈물을 닦아 말려버리지 않고
머리와 심장 사이에 눈물의 대장간을 만든 이들이
그 돌을 가지고 있다
거래를 위한 셈법이 없는 문장들로
눈물을 벼려 담금질한 이들만이
투명하게 빛나는 돌을
손안에 쥔다
자신과 세상을 지킬 눈물의 돌
체념으로 증발하지 않는
아름다운 모서리를 가진 돌을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참고 :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엄청나게 많은 시(詩)를 남겼습니다. 지금 소개한 시들은 선생의 문집인 『목은집(牧隱集)』 중 일부에서 뽑은 것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목은 선생을 시를 한 번 더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소개된 시의 번역은 고전번역원 임정기 선생이 번역한 것을 토대로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제가 조금 손을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3월 13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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