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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를 찾아나선 여행 중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백운동원림 가는 길에 월남사지라는 간판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멋진 월출산 남쪽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절터입니다. 지금은 삼층석탑 하나와 진각국사비각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절터입니다.
나주까지는 날이 무척 맑았었는데, 영암에 들어서자 멀리 월출산이 소나기 구름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월출산 자락을 지날 때 옅은 소나기도 내리고요. 비는 그쳤지만 구름은 여전히 월출산을 가리고 있어 월출산의 멋진 전경을 모두 볼 수 없었습니다.
큰 길에서 볼 때 월남사지 초입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년~1234년)의 탑비가 있습니다. 당당하고 멋진 거북모양 받침돌과 달리 비문은 떨어져나가고 없습니다. 이 비석의 비문은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썼으며, 뒷면의 음기(陰記)는 혜심의 입적 후 16년이 지난 1250년(고종 37)에 최자(崔滋)가 짓고 탁연(卓然)이 썼습니다. 비문은 지워졌지만 내용은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있는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글 말미에 비문 전문을 싣고자 합니다.
이 분은 화순 사람으로 국자감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의 제자가 되어 스님이 되신 분입니다. 당대 무신 정권 집권자인 최우(崔瑀, ?~1249년)이 자신의 두 아들을 제자로 보낼 정도로 몹시 따랐다고 합니다. 물론 진각국사는 개성으로 나아가지 않고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합니다.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병서(幷序) 봉선술(奉宣述) - 비석에 새길 때 비면이 좁기 때문에 산삭하기를 청하였고, 여기에는 예전 것대로 하였기에 두 본이 같지 않다.
대저 심법(心法)이 있은 이래로 무릇 중으로서 불도를 닦는 자들의 그 마음을 추구해 보면 누구나 상월(霜月)과 함께 그 깨끗함을 다투려 하지 않겠는가마는, 종문(宗門)의 명품(名品)이 오르고 내리는 데 이르러서는 능히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가 없다.
그래서 이에 이것을 혐의로 여겨 드디어 암곡(巖谷)에 깊이 은둔하여 심요(心要)를 닦으며, 결코 그 명예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여도 명예가 스스로 쫓아와서 얽매인 자가 있으니, 누가 이럴까? 바로 우리 국사 같은 분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더구나 국사는 어릴 때부터 이미 문장에 종사하여 얼마 안 가서 현관(賢關)에 뽑혔음에랴. 그로 보면 학문이 정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운명이 불우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잠깐만 참았더라면, 문득 계적(桂籍)에 올라, 앞으로 길이 달려서 유명한 사대부가 되는 기회를 잃지 않았을 터인데도, 도리어 성취한 명예를 떼어 버리고 오히려 일찍이 속세에서 떠나지 못한 것을 한하였으니, 그의 속세에서 벗어난 초연한 마음을 또한 여기에서 징험할 수가 있다. 옛날에서 찾아 본다면 대개 법융(法融)이나 천연(天然)에게 비할 분이리라.
국사의 휘는 혜심(惠諶), 자는 영을(永乙)이고, 자호를 무의자(無衣子)라 했으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寔)으로 나주(羅州) 화순현인(和順縣人)이다. 부친은 휘가 완(琬)인데 향공진사(鄕貢進士)를 지냈다. 모친 배씨(裵氏)가 천문(天門)이 활짝 열려 보이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여 열두 달 만에 낳았는데, 그 태의(胎衣)가 거듭 감겨서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형상과 같았다. 분만되자 두 눈이 모두 감겼더니 7일이 지나서야 떴다. 그는 매양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려 모친을 등지고 누우매 부모는 그를 괴이하게 여겼다.
부친이 일찍 죽자, 모친에게 출가(出家)하기를 빌었더니, 모친이 허락하지 않고 유업(儒業)을 힘쓰게 하였으나, 항상 경(經)을 외고 주문(呪文)을 읽더니 오랜 후에 득력하였다. 음란한 무당과 요사스러운 신사(神祠)를 배척하고 헐어 버리기를 좋아하였고, 이따금 사람의 병을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6년인 신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이해에 태학(太學)에 들어갔다가 모친의 병보(病報)를 듣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와 족형(族兄)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모친의 병을 간호하였다. 정신을 집중하여 관불삼매(觀佛三昧)의 지경에 들어갔더니, 모친의 꿈에 제불(諸佛)ㆍ보살(菩薩)이 두루 사방에 나타나 보이고, 꿈이 깨자 병이 나았다. 배광한의 부부도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
이듬해에 모친이 작고하였다. 이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 있어 수선사(修禪社)를 새로 개설하여 도화(道化)가 한창 왕성하였는데, 국사는 급히 가서 참례(參禮)하고 재(齋)를 올려 모친의 명복을 빌기를 청하고 나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니, 보조국사는 이를 허락하였다.
이날 밤에 그 외삼촌은 국사의 죽은 모친이 하늘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처음 국사가 보조국사를 뵐 때에 보조국사는 보고 중이라 생각하였는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이에 앞서 보조국사의 꿈에 설두 현선사(雪竇顯禪師)가 사원에 들어오므로 마음에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튿날 국사가 와서 참례하였다. 이래서 더욱 기특히 여긴 것이다.
국사가 일찍이 오산(蜈山)에 거할 때 한 반석(磐石) 위에 앉아서 주야로 항상 선정(禪定)을 닦으면서 5경(更)이 되면 매우 큰 소리로 게송(偈頌)을 읊으니 그 소리가 10여 리에 들렸고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았으므로 듣는 자들은 그것으로 아침이 된 것을 짐작하였다.
또 지리산(智異山) 금대암(金臺庵)에 거할 때에 대(臺) 위에서 연좌(宴坐)하는데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마른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죽었는가 의심하고 흔들었으나 반응이 없었으니, 그의 각고(刻苦)는 이와 같았다. 무릇 도(道)와 함께 정기가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형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서 그 누가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을축년 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국사가 선승(禪僧) 몇 사람과 함께 보조국사를 뵈려고 가다가 산 밑에서 쉬는데, 암자와의 거리가 1천여 보나 떨어졌건만, 보조국사가 암자 안에서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국사는 그 소리를 듣고 게(偈)를 지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시자 부르는 소리 송라의 안개에 울려 퍼지고 / 呼兒響落松蘿霧
차 달이는 향기 석경 바람에 전해 오네 / 煮茗香傳石徑風
보조국사에게 참례할 때 이와 같이 이야기하니, 보조국사는 그를 인가(印可)하였다. 그리고 손에 쥐었던 부채를 주니, 국사는 또 게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옛날엔 스승의 손에 있더니 / 昔在師翁手裏
이제는 나의 수중에 있구나 / 今來弟子掌中
만약 들끓는 번뇌 있으면 / 若遇熱忙狂走
맑은 바람 일으켜도 무방하리 / 不妨打起淸風
보조국사는 더욱 큰 인재로 여겼다. 또 하루는 보조국사를 따라가는데, 한 떨어진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신은 저기 있는데 사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국사는 대답하기를,
“어찌 그때에 서로 보지 않았을까요?”
하매, 보조국사는 크게 기뻐하였다. 또 조주구자무불성(趙州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를 들고 이어 대혜고선사(大慧杲禪師)의 십종병(十種病)을 들어 물으니, 여러 중들은 대답이 없었는데, 사가 대답하기를,
“삼종병인(三種病人)이라야 바야흐로 그 뜻을 해득할 것입니다.”
하니, 보조국사는 말하기를,
“삼종병인은 어떤 곳을 향하여 기운을 내느냐?”
하자, 국사가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니, 보조국사는 크게 껄껄 웃었다. 방장(方丈)에 돌아온 뒤에 다시 은밀히 국사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고, 곧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 너는 마땅히 불법을 펼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고 본원(本願)을 폐하지 말라.”
하였다.
태화 무진년에 보조국사가 국사에게 사석(師席)을 계승시키고 곧 안규봉(安圭峯)으로 물려가려고 하니, 국사는 굳이 사양하고 드디어 지리산으로 가서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대안(大安) 경오년에 보조국사가 입적(入寂)하자, 그 문인들이 임금에게 알려서 칙명을 받들어 그를 계승하게 하매, 국사는 부득이 사원에 들어가 법당을 여니, 이에 사방의 학자 및 도인(道人)ㆍ속인(俗人) 중의 높은 사람과 은일의 노숙한 사람들이 마치 구름이 달리듯, 그림자가 따르듯 마구 모여들었다. 그래서 법당이 매우 좁게 되었는데,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증축하게 하고, 자주 중사(中使)를 보내어 공사를 독려, 드디어 넓힌 다음, 또 사자를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한 벌과 다(茶)ㆍ향(香)ㆍ보병(寶甁) 등을 내리고 따라서 법요(法要)를 구하매, 조사는 《심요(心要)》를 찬(撰)하여 바쳤으니, 그 책이 지금 세상에 행한다.
이때부터 공경(公卿)ㆍ귀척(貴戚)과 사방의 방백(方伯)들이 소문을 듣고 그 도(道)를 사모하여 혹은 멀리서 예를 갖추어 스승으로 섬기고, 혹은 친히 그 문하에 나아간 자도 있었으니, 그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무릇 선강(禪講)에서 강한 힘을 자부하여 자기만한 이가 없다고 뽐내던 자도 국사를 한번 보게 되면 깜짝 놀라서 태도를 고치지 않은 이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스승으로 섬기기에 바빴다.
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진양(晉陽) 최공(崔公 우(崔瑀))이 국사의 풍운(風韻)을 듣고 성의를 기울여 마지않아, 여러 번 서울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국사는 끝내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천리의 거리에서 서로 마음의 합함이 마치 대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공은 다시 두 아들을 보내어 국사를 모시게 하였고, 무릇 국사의 생활 도구를 힘을 다해서 마련해 주었으며, 심지어 다(茶)ㆍ향(香)ㆍ약이(藥餌)ㆍ진수(珍羞)ㆍ명과(名菓)와 도구(道具)나 법복(法服)까지를 항상 제때에 공급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또 대선사(大禪師)를 더 내렸으니, 그 선발하는 자리를 거치지 않고 승관(僧官)에 오른 일은 국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참정(參政) 최공 홍윤(崔公洪胤)이 아직 정승이 되기 전에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니, 국사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는데. 얼마 후에 최공은 정승이 되고 국사는 조계(曹溪)에 머무르자, 최 정승은 제자라고 자칭하고 그 사(社)에 이름 올리기를 원하여 편지로 그 뜻을 전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불광(佛光)은 백 학사(白學士)를 기꺼이 대하여 친히 대승(大乘)을 전수하고, 숭악(崇岳)은 하 비서(賀祕書)를 흔연히 맞이하여 은밀히 묘지(妙旨)를 전했습니다.”
조사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전에 공의 문하에 있었으니, 공이 이제 나의 사중(社中)에 들어오니 돌려가면서 빈주(賓主)가 되고 번갈아서 사제[師資]가 되는구려.”
이것을 들은 자들은 서로 전하여 훌륭한 일로 삼았다.
정우(貞祐) 기묘년에 조서를 내려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게 하였다. 국사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자, 그 이듬해에 원(院)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사(本社)를 상주하는 처소로 삼았다. 본사에 있으면서 병이 나니, 진양공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임금에게 알리매, 어의(御醫) 모(某)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였다.
봄에 월등사(月登寺)로 이주하였다. 마곡(麻谷)이 방에 들어오니, 조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고통이 몹시 심하다.”
하였다. 마곡이,
“무엇 때문에 이러합니까?”
물으니, 국사는 게(偈)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중생의 고뇌가 이르지 못하는 곳에 / 衆苦不到處
따로 하나의 건곤이 있다 / 別有一乾坤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 且問是何處
크게 적멸한 열반의 문이다 / 大寂涅槃門
국사는 주먹을 불끈 쥐어 내보이며 말하기를,
“이 주먹으로 선(禪)을 설명하리니, 너희들은 믿겠느냐?”
하고, 드디어 주먹을 펴 보이면서 말하기를,
“펴면 다섯 손가락의 길고 짧음이 제각기 다르다.”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합하면 한 덩어리가 된다. 펴는 것도 합하는 것도 자유자재하여 하나이거나 여럿이거나 구애됨이 없다. 그러나 이러기도 하고 이렇지 않기도 한 것이 주먹의 본분 설화(本分說話)이다. 어떠한 것이 본분 설화인가?”
하고,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번 내려치며 껄껄 웃었다.
갑오년 6월 26일에 문인들을 불러서 뒷일을 부탁하고, 마곡에게 말하기를,
“늙은 내가 오늘 몹시 바쁘다.”
하자, 마곡이 대답하기를,
“무엇을 가리키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국사는 말하기를,
“늙은 내가 몹시 바쁘다.”
하였다. 마곡이 멍하니 있으니, 국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부좌(跏趺坐)하고 죽었다. 이튿날 월등사의 북쪽 산봉우리에서 화장하고 그 유골을 주워서 본산(本山)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진각국사(眞覺國師)하는 시호를 내렸다.
을미년 여름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를 세우니, 임금이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향년은 57세이고, 승랍(僧臘)은 32년이었다.
국사가 병이 나던 때부터 그가 태어난 곳의 산석(山石)이 무너져 떨어지고 또 새 떼가 골짜기에 가득하게 날아와서 울기를 10여 일이나 하였으니,
아, 그 이상함이여. 그가 평생에 남긴 명감(冥感)한 신이(神異)의 일로 말하면, 거북이가 계(戒)를 받고, 두꺼비가 법(法)을 듣고, 까마귀가 산가지[籌]를 머금고, 황소가 길에 꿇어앉는 등의 일이 있는데, 그는 모두 세상에서 전하는 바이고 문인들이 기록한 바이지만, 또한 유자(儒者)가 말할 바 아니므로 여기에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국사는 천성이 온화하고 충실하였다. 이미 유(儒)에서 석(釋)으로 갔으므로 모든 내외(內外)의 경서(經書)를 널리 통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승(佛乘)을 담양(談揚)할 때나 게송(偈頌)을 찬저(撰著)할 때에 이르러서는 마치 능숙한 재인(宰人)이 여유만만하게 칼을 놀리듯 자유자재하였다. 이와 같지 않고서야 어떻게 능히 서울 땅을 밟지도 않고서 앉아서 온 나라의 숭앙(崇仰)함을 누림이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 참으로 선문(禪門)의 정안(正眼)이며 육신(肉身)의 보살이라고 할 만하도다.
국사의 법통을 계승한 선로(禪老) 몽여(夢如)도 법왕(法王)이다. 그가 일암거사(逸庵居士) 정분(鄭奮)을 청하여서 국사의 행록(行錄)을 초해 갖추어서, 비석 세울 일을 진양공에게 청하였다. 진양공은 말하기를,
“화상(和尙)이 세상에 생존할 때 사람들을 이롭게 함이 많았으니,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임금에게 알리자,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명(銘)을 짓게 하므로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미소(微笑)이후 심법(心法)을 전한 자 누구인가. 우리 삼한(三韓)에서는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있었다. 태어날 때 태의(胎衣)가 가사(袈裟)를 멘 듯하여 그 징조 이미 기이하더니, 과연 정안(正眼)을 얻어 당시를 초월해 보았네. 자신이 불성(佛性)을 보고 남에게 말로 전하였다. 법을 전함이 없다면 명미(冥迷)한 자가 무엇을 자뢰할까. 당(堂)에 올라가 설법함은 매우 부지런하였네. 국사의 그 혀는 곧 부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곧 부처의 혀였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본래 자연의 자세이나 말하는 것도 또한 즐거워할만하였네. 몸이 깊은 암혈에 은둔하였는데 이름이 어디로부터 새었을까. 학자들이 모여드니 그 문하는 마치 구름이 끼듯하였네. 좌우에서 질문하니 응대할 겨를이 없어도 한가히 앉아있게 자신을 놓아두지 않았다. 오교(五敎)가 와 참여하여 반야(般若)에 훈도(薰陶)되고, 여러 방백(方伯)들이 몸소 달려와 입사(入社)하기를 간청하였네. 왕공(王公)들은 멀리서 모셔 친히 교훈을 받은 것처럼 하였다. 승랍 32년 동안 고택(膏澤)의 미친 것은, 허다한 사람들에게 두루 흡족하였네. 국사가 입적하자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샘솟 듯하였고, 임금은 매우 애도하여 안색이 참연(慘然)하였네. 종말에 추증함이 매우 성대하여 은전(恩典)을 원만히 하였다. 따라서 소신에게 명하여 큰 비석에 공적을 새기게 하였으니, 이 산은 기울지언정 이 비석은 변동이 없으리라.(한국고전번역원 김동주 역)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幷序○奉宣述 - 刻石次以地窄請删。於此仍故。二本不同。
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耶。然至於宗門之名品升降。則有不能大忘情者。於是有以此爲嫌。遂深遁巖谷。潛修心要。切不欲嬰其名累。而名自逼逐者孰是歟。如我國師當之矣。況自妙齡。業已從事於文章。未幾旋擢賢關。則學非不精也。命非不偶也。若小忍須臾。便登桂籍。長驅前途。不失爲名士大夫。而反割棄垂就之名。猶以不早落染爲恨。其超然出世之心。亦於此可驗。求之於古。蓋法融天然之比也。國師諱惠諶。字永乙。自號無衣子。俗姓崔氏。名寔。羅州和順縣人也。考諱琬。鄕貢進士。母裴氏夢天門豁開。又夢被震者三。因而有娠。凡十有二月乃生焉。其胞重纏。又如荷袈裟狀。及拆。兩目俱瞑。經七日乃開。每飮乳後。輒轉身背母而臥。父母怪之。父早薨。從母乞出家。母不許。勉令業儒。然常念經持呪。久乃得力。喜毁斥淫巫祅祠。或往往救人病有效。承安六年辛酉。擧司馬試中之。是年入大學。聞母病。遂還鄕侍疾於族兄裴光漢家。斂念入觀佛三昧。母夢諸佛菩薩遍現四方。覺而病愈。裴氏夫婦。亦同此夢。明年。母卽世。時普照國師在曹溪山。新開修禪社。道化方盛。師徑造參禮。請營齋薦母。因乞剃度。國師許之。是夜。阿舅夢師之亡母升天。始師之謁國師也。國師見之以爲僧。更見則非也。先是。國師夢雪竇顯禪師入院。心異之。明日師來參。由是益奇焉。師嘗居蜈山。坐一磐石。晝夜常習定。每至五更唱偈。其厲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此候旦。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雪積沒頂。猶兀坐如枯株不動。衆疑其死。撼之不應。其刻苦如此。非夫與道凝精。外生死遺形骸者。孰至是哉。乙丑秋。國師在億寶山。師與禪者數人方往謁。憩山下。距庵千餘步。遙聞國師在庵中喚侍者聲作偈。其略云。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石徑風。及參禮。擧似此話。國師頷之。以手中扇授之。師呈偈曰。昔在師翁手裏。今來弟子掌中。若遇熱忙狂走。不妨打起淸風。國師益器之。又一日隨國師行。國師指一破鞋云。鞋在遮裏。人在什麽處。答曰。何不其時相見。國師大悅。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因續擧大慧杲老十種病問之。衆無對。師對曰。三種病人。方解斯旨。國師曰。三種病人。向什麽處出氣。師以手打窓一下。國師呵呵大笑。及歸方丈。更密召與話。乃喜曰。吾旣得汝。死無恨矣。汝當以佛法自任。不替本願也。泰和戊辰。欲命師嗣席。卽退安圭峯。師固辭。遂去智異山。絶跡滅影者數載。大安庚午。國師入寂。門徒聞于上。承勑繼住。師不獲已入院開堂。於是四方學者及道俗高人逸老。雲奔影騖。無不臻赴。社頗隘。康廟聞之。命有司增構。屢遣中使督役。遂闢而廣之。又遣使就賜滿繡袈裟磨衲各一領幷茶香寶瓶。因求法要。師撰心要以進。今行于世。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聞風慕道。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不可勝紀。凡禪講之負氣屈強。自謂莫己若者。及一見。莫不愕然改容。猶師事之不暇也。今門下侍中晉陽崔公聆師風韻。傾渴不已。屢欲邀致京輦。師竟不至焉。然千里相契。宛如對面。復遣二子參侍。凡師之常住資具。莫不盡力營辦。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常以時餉遺。連亘不絶。今上卽位。制授禪師。又加大禪師。其不經選席。直登緇秩。自師始也。參政崔公洪胤。於未相時。嘗掌司馬試。師出其門下。未幾公入相。師住曹溪。相國稱弟子。願登名社裏。以書致意。其略曰。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嵩岳欣迎於賀祕書。密傳妙旨。師答之。其略曰。我昔居公門下。公今入我社中。互爲賓主。換作師資。聞者傳以爲勝事。貞祐己卯。詔住斷俗寺。累辭不允。明年入院。然以本社爲常棲之所。癸巳仲冬。在本社示疾。晉陽公聞之大驚。遂聞于上。遣御醫某診視。春。徙處月登寺。麻谷入室。師曰。老漢今日痛甚。谷曰。爲甚麽如此。國師以偈答曰。衆苦不到處。別有一乾坤。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師豎起拳頭云。遮箇拳頭也解說禪。汝等信否。遂展掌云。開則五指參差。握拳云。合則混成一塊。開合自在。一多無礙。雖然。如是未是拳頭本分說話。怎生是本分說話。卽以拳頭打窓一下。呵呵大笑。甲午六月二十六日。召門人囑事。謂麻谷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審導什麽。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師微笑跏趺而化。明日茶毗於月燈寺之北峯。拾靈骨還本山。上聞之震悼。贈諡眞覺國師。乙未仲炎。葬于廣原寺之北。遂立浮圖。上賜額曰圓炤之塔。享壽五十七。臘三十有二。自師之示疾。生緣處山石崩落。又群雀滿洞。飛鳴者十餘日。嗚呼其異哉。其平生冥感神異。則有龜受戒。蟾聽法。慈烏含籌。特牛跪途等事。皆世所傳。門徒所記。又非儒者所說。故於此不詳云。師性沖和碩實。旣自儒之釋。凡內外經書。無不淹貫。故至於談楊佛乘。撰著偈頌。則恢恢乎游刃有餘地矣。不如是。安能迹不踐京都。而坐享一國所仰若是哉。噫。眞可謂禪門正眼。肉身菩薩者歟。嗣法禪老夢如。亦法王也。請逸庵居士鄭君奮草具行錄以立碑。請於晉陽公。公曰。和尙住世利人多矣。樂石不可不立。遂聞于上。上命小臣爲之銘。其詞曰。微笑已後。傳心者誰。於我三韓。國師得之。生荷袈裟。其兆已奇。果得正眼。超視當時。自見是性。傳人曰辭。不有傳法。迷者何資。上堂擧話。亹亹其說。舌是佛心。心是佛舌。默固自然。談亦可悅。身遁深巖。名從何洩。學者趁追。雲蒸丈下。左右扣之。應接靡暇。曾不放我。片時閉坐。五敎來參。熏染般若。列岳躬趨。痛求入社。王公遙挹。謂若親炙。三十二臘。膏液所及。有許多人。飽飫周洽。法棟云摧。萬眼同泉。上甚哀悼。玉色慘然。贈終孔縟。寵典靡諐。仍命小臣。豐碑是鐫。此山寧騫。此石不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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