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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지배 이념인 성리학 외에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매우 제약된 사회였습니다. 특히 당쟁이 극심해지면서 송시열의 주창으로 주자의 성리학 해석을 한 자, 한 구절도 바꿀 수 없다는 사상보안법이 조선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조상에 대한 제사도 부정하는 천주교가 들어왔으니 그에 대한 탄압이 어떠했겠습니까.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선생의 집안은 조선의 천주교 초기 전도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가문입니다. 여기서 다산 선생 집안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최초로 천주교를 들여온 이벽(李蘗)은 큰 형수의 동생입니다. 조선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李承薰, 1756년(영조 32)∼1801년(순조 1))은 큰 매형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尹持忠)은 외사촌이고요.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 때 큰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학종이 참수당합니다. 그리고 다산 선생은 경상도 장기로,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년(영조 34)∼1816년(순조 16))은 강진 신지도(당시는 신지도가 완도가 아니라 강진현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로 유배를 갑니다.
1801년 겨울 유명한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이 일어납니다. 황사영은 다산 선생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입니다. 이 사건으로 다산 선생과 둘째 형 정약전 선생은 귀양지에서 잡혀와 의금부 옥에 갇혀 혹독한 심문을 받습니다. 아무런 관련 증거가 없어 무죄석방을 해야 하는데, 반대파의 강력한 주장으로 다시 유배형을 받습니다. 이번 유배지는 다산 선생은 강진, 형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입니다. 음력 11월 9일 형제는 유배길을 함께 떠납니다. 11월 21일 형제는 나주 율정(栗亭, 밤남정)에 주막집에 머뭅니다. 비록 유배길이었지만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는 형제는 10여일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형제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형은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요. 새벽에 일어나 이별을 앞두고 다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栗亭別(율정별)
茅店曉燈靑欲滅(모점효등청욕멸)
起視明星慘將別(기시명성참장별)
脈脈嘿嘿兩無言(맥맥묵묵양무언)
強欲轉喉成嗚咽(강욕전후성오인)
黑山超超海連空(흑산초초해연공)
君胡爲乎入此中(군호위호입차중)
鯨鯢齒如山(경예치여산)
吞舟還復噀(탄주환복손)
蜈蚣之大如皁莢(오고지대여조엽)
蝮蛇之紏如藤蔓(복사지두여등만)
憶我在鬐邑(억아재기음)
日夜望康津(일야망강진)
思張六翮截靑海(사장육핵절청해)
于水中央見伊人(우수중앙견이인)
今我高遷就喬木(금아고천위교목)
如脫明珠買空櫝(여탈명주매공독)
又如癡獃兒(우여치애아)
妄欲捉虹蜺(망욕착홍예)
西陂一弓地(서파일궁지)
分明見朝隮(분명견조제)
兒來逐虹虹益遠(아래측홍홍익원)
又在西陂西復西(우재서파서부서)
율정의 이별
초가 주막 새벽 등불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슬프다 이제는 이별이네요
두 눈만 말똥말똥 두 사람 말을 잃어
애써 목청 다듬지만 울음이 터지네요
머나먼 흑산도, 하늘 바다 연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드시나요?
고래 이빨이 산과도 같아
배를 삼켰다가 다시 뿜어내고요
지네는 크기가 주엽나무 꼬투리만하고
독사가 등나무 덩굴처럼 엉겼다네요
이 몸이 장기현에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강진 땅 바라보면서
두 날개 활짝 펴고 푸른 바다 가로질러
바다 가운데서 그 사람 보렸는데
나는 지금 큰 나무에 드높이 올랐으나
진주 없는 빈 상자만 사버린 격이요
마치도 바보 같은 아이 하나가
멍청하게 무지개를 잡으려는데
서쪽 언덕 바로 앞에
아침 무지개 분명히 보고서
아이가 쫓아가면 무지개 더욱 멀어져
다시 또 서쪽 언덕 또다시 서쪽이네요
(송재소 역, 『다산시선』, 창비 2013년)
다산 선생의 둘째 형 정약전 선생은 얼마 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졌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공부벌레 샌님 스타일의 다산 선생과 달리 풍채도 크고 성격도 호걸스러웠다고 합니다. 다산 선생에게 정약전 선생은 단순한 핏줄의 형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가장 믿고 의지했던, 때로는 스승 같고 때로는 벗과 같은 그런 형입니다. 형제는 10여일 마지막 유배길을 나주 율정점(栗亭店, 밤남정)까지 말머리를 맞대고 함께 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함께 한 마지막 날 동이 터옵니다. 이제는 이별입니다.
다산 선생의 나이 40세, 형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반대파가 득세하는 세상이라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습니다. 뭐라 말할지 몰라 멀뚱멀뚱 서로 처다 봅니다. 말문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울음만 나옵니다. 형이 가는 곳은 머나먼 바다 건너 흑산도입니다. 바다는 험하고 섬에는 커다란 지네와 독사가 득시글댄다고 합니다. 옛날 자신이 포항 옆 장기현에 유배 살 때 형은 이곳 강진 신지도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러기나 갈매기 되어 날아서 바다를 건너 형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제 형이 있어 그리던 강진 땅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는데, 형은 더 서쪽 바다 흑산도로 들어가야 합니다. 마치 쫓아가면 또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말입니다.
1803년(순조 3) 겨울에 수렴청정 중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특명으로 다산 선생을 석방하려고 했지만 좌의정 서용보(徐龍輔, 1757년(영조 33)∼1824년(순조 24))가 저지하였습니다. 서용보는 다산 선생이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경기감사였습니다. 다산 선생은 서용보의 비리를 지적해 시정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악연이 되어 이후 서용보는 다산 선생의 앞날을 사사건건 막으며 방해했습니다. 다산 선생에 대한 석방 명령은 이후로도 계속 되지만, 그때마다 서용보는 방해를 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다산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던 정약전 선생은 동생이 석방되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흑산도에서 육지에서 훨씬 가까운 지금의 우이도로 몰래 거처를 옮깁니다. 당시 우이도는 내흑산도(內黑山道)로 불렸습니다. 물론 정약전 선생을 아낀 흑산도 사람들이 찾아와 흑산도로 함께 돌아갈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대역죄인 유배객을 떠나지 말라고 말렸던 예는 정약전 선생의 경우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 주민들에게 신망을 얻었다는 증거일 겁니다. 정약전 선생은 몸 약한 동생이 흑산도까지 오다가 탈이 날까 걱정이 돼서 우이도로 온 것입니다. 정약전 선생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우의도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흑산도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형제는 끝내 만나지 못합니다. 이때 서로 만날 수 없었던 동생과 형은 율정에서 헤어지던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시로 화답하며 노래합니다. 동생은 헤어지는 아픔을 노래하고, 형은 열흘 동안 함께 해서 행복했던 추억을 노래합니다.
生憎栗亭店(생증율정점) 제일 미운 것은 율정 주점의
門前歧路叉(문전기로차) 문 앞 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分飛似落花(분비사낙화) 낙화처럼 뿔뿔이 흩날리다니
- 「奉簡巽菴(봉간손암, 손암 형님에게 받들어 올리다)」 중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 역)
尙愛南來路(상애남래로)남쪽으로 오던 길 아직도 사랑하는 것은
引到栗亭叉(인도율정차)율정의 갈래길로 이어지기 때문이네
十日雙髦馬(십일쌍모마) 갈기 늘어진 말 함께 타고 열흘 올 때에
眞成一萼花(진성일악화) 우리는 참으로 한송이 꽃이었지
-「次韻和美庸弟(차운화미용제, 미용 아우의 시에 화답하다」 중
그러나 간절한 바람도 소용없었습니다. 유배 온지 16년 되는 1816년(순조 16) 음력 6월 6일 정약전 선생은 간절히 바라던 동생을 보지 못하고 우이도에서 죽었습니다. 다산 선생의 시처럼 ‘제일 미운 것은 율정 주점 문 앞 길이 두 갈래로 난 것’입니다. 율정에서의 이별이 이제는 영영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19년(순조 19) 드디어 다산 선생이 석방됩니다. 다산 선생은 곧바로 상여를 우이도로 보내 형 정약전의 시신을 싣고 율정(栗亭)을 거쳐 충청도 충주 하담 선영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릅니다.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로 유배된 뒤 호를 손암(巽菴)으로 바꿉니다. 다산 선생은 1822년(순조 22) 회갑을 맞아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새로 짓습니다. 자기를 알아줄 이가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뜻에서 기다릴 ‘사(俟)’를 썼지만 손암을 따라 같은 ‘암(菴)’ 자 돌림으로 호를 집니다. 아마도 이는 먼저 세상을 떠난 형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 너무나 현명했던 형에 대한 존경의 표시는 아니었을까요?
2021년 9월 19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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