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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6일 아침 일찍 제주도에 도착했다. 1박 2일 혼자하는 제주 여행의 시작이다. 시간이 여유로운 첫째 날 한라산 윗세오름을 오르고 싶었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다. 그냥 등반이 아니라 윗세오름 철쭉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맑은 날 오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라산은 다음날 오르기로 하고 급히 비양도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비양도에서 14시 15분 배를 타고 나와서 신제주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제주목 관아로 향했다. 보우(普雨) 스님이 살해당한 현장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주목사의 집무실인 연희각(延曦閣). 나는 보우스님이 여기서 살해되었다고 생각했다.

 

제주목 관아는 입장료가 1,500원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마침 넷째 주 수요일 문화의 날이라 무료 입장이다. 왠지 기분이 좋다. 나는 다른 전각을 제쳐 두고 맨 안쪽에 있는 연희각(延曦閣)으로 갔다.  제주 목사가 집무를 보던 공간이다. 내 기억 속에는 보우 스님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먼저 보고 싶어서였다.

 

보우(普雨, 1509(중종 4)~1565(명종 20))  스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초지일관 밀고 나갔던 조선의 지배계급 사대부들은 보우 스님을 '요승(妖僧)'으로 일관되게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로 북한 부수상까지 역임한 홍명희 선생 조차 그의 불후의 소설 임꺾정』에서 보우 스님을 요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회주의자이지만, 정통 유학을 계승한 조선 사대부의 일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보우 스님은 조선시대 측천무후라 불리던, 그래서 사대부들이 무척이나 싫어했던 문정왕후와 친밀했던 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배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어려서 그를 요승으로 듣고 자랐다.

 

내가 보우 스님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읽으면서다. 광해군 시대 활약하다 인조 반정 이후 사형당한 유몽인 선생의 어우야담』에 보우 스님 얘기가 나온다. 당연히 좋은 얘기가 아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주목사는 보우에게 객사(客舍)를 청소시키고 날마다 힘이 센 무사 40명에게 각각 한 대씩 늘 때리도록 하니 보우는 마침내 주먹에 맞아 죽었다."

 

어린 나에게 이 대목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권세가 떨어져 귀양을 왔다고 해도 그래도 한 때 시대를 주름잡았던 스님인데 객사 청소를 시키는 것도 뭐한데 무뢰배들을 시켜 때리는 모욕을 주면서 살해했을까 하고 말이다. 나중에 보우 스님을 불교계에서는 매우 높이 쳐주는 것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임진왜란의 영웅 서산대사나 사명대사가 보우 스님의 제자라는 것도 알았다. 

 

 

망경루(望京樓). 제주 목사가 한양에 있는 임금에게 예를 올리던 장소이다. 보우 스님이 살해된 객사는 망경루 뒷쪽 제주북초등학교 쯤에 있었따고 한다.

 

어우야담을 다시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보우 스님이 연희각 앞에서 살해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찾아보니 객사에서 살해되었다. 객사는 망경루 뒷쪽 제주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미리 알았다면 그쪽으로도 가봤을 걸 그랬다. 그러고 보니 제주목 관아가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컸던 것던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관공서는 1차적으로 해체되었으니까 말이다.

 

 

幻人來入幻人鄕(환인래입환인향)

五十餘年作戲狂(오심여년작희광)

弄盡人間榮辱事(농진인간영욕사)

脫僧傀儡上蒼蒼(탈승괴뢰상창창)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로 들어와

오십년 넘도록 미친 짓 하였구나

인간 영욕의 일을 다 희롱하고서

중의 탈 벗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노라

 

 

보우 스님의 임종계(臨終偈)다. 임종계는 스님들이 입적, 즉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다. 보우 스님의 임종계를 본 소감은 어떤가. 그래도 요승으로 보이는가. 보우 스님이 어떻게 임종계를 남겼는지 기록은 없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괴뢰(傀儡)'라는 용어는 냉전세대는 많이 들어 본 것이다. 뜻은 큰 꼭두각시라는 뜻이다.

 

보우 스님을 무뢰뵈로 하여금 모욕을 주면서 때려 죽게 한 자는 변협(邊協, 1528년 ~ 1590년 9월 5일)이라는 자이다. 그 자는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다. 불교계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보우 스님이 잘 나갈 때 인사 청탁을 했었는데, 보우 스님이 들어주지 않아 앙심을 품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했을 거라고 한다. 그런 점도 작용했겠지만 나는 더 큰 원인은 조선시대에 성리학 이외에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을 용인하지 않는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면서 권력에 가까이 간 것이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우 스님을 죽이자고 앞장 선 이 중에 하나가 고매한(?) 이이 선생 아니던가.

 

어느 시대든 사상의 자유가 위축이 되면 그 사회 자체가 위축된다. 조선은 더욱 더 성리학 일변도로 나아가고, 더욱이 주자의 말 한 자도 바꿀 수 없는 절대 교조화에 이르면서 사회는 활기를 잃고 끝내 식민지로 전락했다. 암튼 한 시대의 지성 보우 스님은 모욕하는 무뢰배의 주먹질에 속절없이 내팽겨쳐진 채 죽어갔다. 상대를 괴물화 시켜 잔혹하게 살해한 한국전쟁 전후의 비극은 이 때에도 있었던 것이다.

 

 

목사의 개인 휵식 공간인 귤림당(橘林堂).

 

연희각을 들러보는 게 목적이었지만, 온 김에 다른 곳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망경루 옆에 있는 선정비들을 들러봤다. 선정비는 말 그대로 좋은 정치를 했다고 고을 백성들이 수령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말 그대로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함양에는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선정비도 있으니 그야말로 선정비를 세우는 것은 백성에 대한 마지막 착취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선정비 옆으로 목사의 개인 휴식공간인 귤림당(橘林堂)이 있다.

 

 

제주목사의 다른 집무실 홍화각(弘化閣)이다. 목사는 군 사령관인 절제사(節制使)도 겸임했는데, 절제사로 역할을 할 때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홍화각(弘化閣)에 들렸다. 홍화각은 제주목사의 또 다른 집무실이기도 하다. 제주목사는 군 사령관인 절제사(節制使)도 겸임했다. 흥화각은 절제사 역할을 할 때 집무실로 보인다.

 

 

목사의 연희공간인 우련당(友蓮堂).

 

연지에서 바라본 우련당. 연못이 연희공간과 잘 어울린다. 우련당 뒤에 보이는 건물이 흥화각이다.

 

 

이번에는 우련당(友蓮堂)으로 갔다. 우련당은 목사의 연희공간이다. 운치 있는 연못도 있다.

 

 

군관들의 집무실인 영주협당(瀛洲協堂)

 

제주목 관아 중대문. 멀리 망경루가 보이는데, 중간에 내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목 관아의 정문인 진해루(鎭海樓)

 

군사들의 조련장으로도 이용했던관덕정(觀德亭)

 

제주목에 잡혀와 심문 받는 죄수. 거대한 관아에 잡혀오면 백성들은 누구나 주눅이 들었을 것 같다.

 

제주목 관아를 들러보고 나서 첫번 째 드는 생각은 참 웅장하구나 하는 것이다. 마치 작은 궁궐 같다. 그런데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거대하게 관아를 지었을까? 물론 고려에 완전 복속되기 전까지 제주도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목 관아는 왕궁 자리에 그대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거대한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의문이 드는 건 제주의 역사 때문이리라.

 

조선시대는 사상적으로 성리학이 지배했던 사회고, 성리학은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삶에 필요한 크기 이상으로 큰 건축을 하는 걸 꺼리고 있다. 그럼에도 제주목 관아를 이렇게 키운 건 조선시대 내내 제주를 피지배 지역으로 간주했기 아닐까? 마치 일본 제국주의가 광화문에 거대한 석조 총독부 건물을 세운 것처럼 말이다. 외대문을 들어서면 옆 행랑에 죄수로 잡혀온 백성을 심문하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백성들이 이 거대한 관아에 들어서면 그 기분이 어떨까. 저절로 주눅이 들지 않았을까?

 

 

관아 건너편 골목에 있는 곤지암소머리국밥 식당. 노부부가 30년 동안 운영하는 식당인데, 짬 깔끔하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내온다.

 

관아 관람을 마치니까 오후 5시가 훌쩍 넘었다. 숙소가 있는 신제주보다는 사람들이 오래 살았던 구제주가 음식점이 더 많고 서민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식당을 찾았다. 관아 건너편 골목으로 갔다가 소머리국밥집이 있기에 평균은 되겠거니 하고 들어갔다. 노부부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정쩡한 시간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소머리국밥을 시키고 한라산 소주를 시켰다. 당연히 21도다.

 

소주와 약간의 반찬이 나왔다. 에게 할 정도로 조금씩 나왔다. 나는 그게 좋았다. 물론 반찬이 그게 다이면 서운하겠지만 말이다. 이윽고 국밥이 나오고 김치와 깎두기가 따로 나왔다. 덜어먹는 거였다. 국수도 함께 나왔다. 국물도 깔끔하다. 서빙도 능숙하고 섬세했다. 나는 낯을 가려 모르는 사람하고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래도 너무 잘 먹어서 이말 저말을 걸었다. 노부부는 이 자리에서 30년 째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다시 근처를 가면 또 한번 들르고 싶다. 제주목 관아 건너편 곤지암소머리국밥집이다.

 

 

2021년 5월 26일 여행

2021년 6월 15일 기록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