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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윗세오름의 철쭉은 보통 6월 10일 전후가 절정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빨리 필 수도 있다고 하여 저는 약 1달 전에 5월 26일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예매했습니다. 모처럼 가는 제주도 여행이라 같이 갈 일행이 있으면 2박3일로 하고, 일행이 없으면 1박2일로 다녀올 요량이었습니다.
끝내 일행을 구하지 못하여 5월 26일 홀로 제주로 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나요. 26일은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 했습니다. 계획은 첫째 날 한라산 등반을 하고, 둘째 날 편한 곳을 다녀오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비 때문에 날을 바꿨습니다. 첫째 날 비양도와 주변을 걷고, 둘째 날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숙소는 예약 어플을 통해 아주 싼 가격에 제법 깨끗한 호텔을 잡았습니다.
제주도 날씨를 검색하니 27일 오전은 흐림, 오후는 맑음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최대한 늦은(?) 시간에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아침 7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어리목으로 가는 240번 버스는 한라병원 기준으로 오전 6시부터 매시 42분에 출발합니다. 나는 오전 8시 42분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약 1시간 전에 호텔을 나섰습니다. 검색해보니 마침 안성맞춤인 카페가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에이바우트입니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는데, 합하여 4,500원입니다. 더욱이 홀 안은 넓고 깨끗했습니다.
어리목 가는 중에 지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서울은 비가 많이 온다면서 날짜 잘 잡았다며 샘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제주도는 날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비 안 와 하고 답장을 보냈는데, 에고 10분이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비옷을 챙겨 가서 어리목 정류장에서 갈아 입었습니다. 참고로 어리목 정류장에는 나 혼자서 내렸습니다. 차 안에 배낭 맨 이들은 모두 영실로 가는 모양입니다.
만 3년 만에 어리목에 왔습니다. 그때는 아주 맑았는데 오늘은 비가 옵니다. 어리목 코스는 오르기 쉽지 않습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970m로 1280m인 영실 탐방센터보다 약 300m가 낮습니다. 그만큼 더 올라가야 합니다. 스틱을 꺼내 키를 맞추고 출발합니다.
탐방센터를 지나면 숲이 좋은 평탄한 등산로가 나옵니다. 역시 한라산은 경사가 심하지 않은가봐 하고 안심하면 큰코 다칩니다. 어리목 목교를 지나면 사제비동산까지 1.9km 구간은 모두 계단길입니다. 저는 윗세오름 대피소를 1차 목표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더 난다면 남벽 분기점까지 가 볼 생각입니다.
사제비동산으로 오르는 길은 끝없는 계단길입니다. 오르는 동안에 1,100m, 1,200m, 1,300m, 1,400m 표식이 나타납니다. 표식과 표식 사이의 거리는 왜 그리 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계단 간격이 넓어지면 계단길이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수직 해발고도를 약 450m, 수평 거리를 약 2,400m 오르면 거짓말처럼 평평한 데크길이 나타납니다.
사방이 온통 감싼 게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는 계속 내립니다. 사제비동산은 안개 넘어에 숨어버렸습니다. 한참을 오르고 또 오르니 주변이 가끔씩 환해졌습니다. 이내 만세동산을 앞두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비는 거의 그쳤습니다. 나는 비옷을 접어 배낭에 넣었습니다.
만세동산을 앞드고 드디어 파란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세동산이 가까워질수록 푸른 하늘은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웬지 운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세동산은 해발 1,600m 정도입니다. 역시 고산이라 그런지 날이 추워졌습니다. 나는 가지고 간 점퍼를 꺼내 입었습니다.
비는 그쳤다곤 하지만 순식간에 안개같은 구름이 몰려와 사방을 덮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맑아지는 대세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짜짠. 갑자기 만세오름이 전체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오르는 저 길 끝부분을 넘으면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제법 평탄한 길이 나타납니다.
만세오름 언덕 막바지에는 구상나무 군락지가 있습니다. 기후 변하로 구상나무들이 죽어간다는데, 이곳의 구상나무들은 아주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거짓말처럼 탁 트인 벌판이 나타납니다.
어리목 쪽은 물이 많습니다. 특히 만세동산을 지나고 만나는 벌판에는 위에서처럼 사철 물이 흐릅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식생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이곳 식생을 모니터링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물론 이곳도 조릿대의 습격으로 작은 나무들이 조릿대에 묻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개울 위에 바위들이 널려 있는 너덜겅에는 철쭉과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조릿대가 습격하기 전 이곳 풍경이 저랬을 것 같습니다. 고립된 채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보이는 게 요즘 우리나라 젊은 세대를 보는 것 같아 안스럽기만 합니다. 부디 저기만이라도 오래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윗세오름 대피소 앞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일행과,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은 혼자 각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습니다. 나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간단한 행동식으로 준비했는데, 점심은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날은 점점 맑아집니다.
점심을 먹고 일어나면서 뒤돌아보니 한라산 남벽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남벽 분기점까지 가서 한라산 정상을 보다 가까이 보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곧바로 영실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윗세붉은오름은 철쭉이 가득하지만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붉은 철쭉이 가득한 붉은오름의 장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6월 10일 전후에는 온 산이 붉게 타오를 것 같습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영실 쪽으로는 넓고 평탄한 초원이 이어집니다. 물이 있는 곳은 평평한 땅에 고여 고산습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망대에는 바람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래도 오르기를 잘 했습니다. 만세동산 쪽 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윗세누운오름의 철쭉 군락지가 보입니다. 영실 쪽으로는 넓은 구상나무 숲이 보입니다. 평원 끝으로는 바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조릿대가 조금은 덜했습니다. 기후 변화 때문인가요. 죽거나 죽어가는 구상나무들이 많았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영실이 가까워지면서 데크길이 이어집니다. 바위가 많아 데크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입니다. 영실입니다. 제주도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를 가나 온통 도시 같은데, 이곳에서 바라보니 제주도는 아직 숲이 넓습니다.
영실 쪽으로는 계속 계단이 이어집니다. 영실은 움푹 꺼진 듯이 보이기도 하고 불끈 솟은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높은 바위 절벽이 이어지고, 깊은 숲이 있어 정말 신령한 무엇이 있는 듯 보입니다. 어제와 오전에 내린 비 때문에 폭포까지 만들어져 더욱 신령하게 보입니다.
영실 매표소가 가까워지면서 길은 다시 평탄해집니다. 이곳 숲의 소나무는 특히 아름다워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영실 매표소입니다. 윗세오름 오르기는 이곳이 어리목 코스보다 쉬워서인지 차들이 제법 많습니다.
버스를 타려면 2.1km를 더 걸어 내려와야 합니다. 내려오는 길은 숲이 참 좋아 걸을만 합니다. 다만 비슷한 숲이 계속 이어진다는 게 함정이죠. 드디어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15시 36분 버스를 타려고 합니다. 아직 오후 3시도 안 되었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이번에 혼자 여행하면서 바뀐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시간을 넉넉하게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ㅎ
2021년 5월 27일 한라산 윗세오름 방문
2021년 5월 31일 기록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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