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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6일. 드디어 제주도로 떠났다. 당초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는데, 같이 갈 동행을 찾지 못해 1박 2일로 단축했다. 아침 7시 비행기를 예매했다. 제주 공항 버스 정류장에 8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날은 한라산 윗세오름에 올라 철쭉을 보고 싶었다.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가까운 데를 가볍게 둘러보고 올라오고 싶었다. 그런데 예보를 보니 첫날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제주에 내렸을 때 날이 잔뜩 흐렸다. 한라산 등반은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약 25년 만에 홀로 멀리 여행을 왔다. 늘 누군가와 같이 다니다 혼자 오니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오히려 허둥댄다. 어디로 갈까? 서쪽으로 가서 애월 쪽 해변을 걸어서 배를 타고 비양도를 다녀올까? 아니면 사려니숲으로 가 호젓한 길을 걸어볼까? 버스 시간표를 보고, 정류장을 왔다갔다 하다 비양도로 가기로 했다. 202번 서쪽으로 서귀포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애월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리기로 했다. 다른 뜻이 있기 보다는 비양도로 가는 배가 있는 한림항에 가까우면서도 일주도로에서 해안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첫 단추였지만, 어쩌랴 그게 여행을 맛이기도 한 걸. 고내리 해안 도로를 조금 걷다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비는 오락가락 한다. 마을길은 말 그대로 평범한 마을길이라 별로 감흥이 없었다. 얼마를 더 가니 바다 쪽으로 어마어마한 공사장이 나타났다. 애월항 확장공사장이다.
애월항을 지나 올레코스는 내륙으로 향했다. 난 코스를 벗어나 바닷가 길을 걷기로 했다. 지도에는 '애월 환해장성' '봉수대' 등의 지명이 나온다. 잘 됐다.
코스를 벗어나 애월 환해장성이 있는 해안 산책로로 길을 잡았다. 그곳에는 멀리 집 한 채가 있었다. 지도를 보니 어촌계 건물이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그 건물 쪽으로 걷고 있다. 길을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숫기 없는 건 환갑이 넘어도 여전하다.
어촌계를 지나자 호젓한 길에 사람이라곤 나 혼자다. 예쁜 바다다. 거기에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누군가 함께 왔다면 아마도 저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한라산 소주를 마셨을 것 같다. 지금은 혼자고, 술도 없다.
바로 옆으로는 제주도의 평범한 담처럼 보이는 곳에 환해장성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유난히 외부의 침탈이 많았던 제주도다. 저들이 지키고자 했던 게 단지 왜구 뿐이었을까? 팻말을 조금 지나면 제법 규모가 있는 무너진 성벽이 나와 여기가 환해장성 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검은 현무암 바위 위에 노란 꽃들이 피어 있다. 육지의 돝나물을 닮았다. 나는 나물로 돝나물을 참 좋아하지만, 돝나물꽃도 참 좋아한다. 돌아와 검색해 보니 바위채송화라고 한다. 바닷가 쪽으로는 야생 선인장 군락이 끝없이 이어진다. 천년초라고도 하고, 백련초라고도 하는데, 꽃핀 자리에 맺힌 열매가 익으면 자줏빛을 변한다.
시간을 보니 뱃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타야 할 것 같았다. 도중에 봉수대가 있으니 들렸다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지름길이라고 들어선 길을 가다 보니 길이 아니었다. 그래도 직진했다. 밀림(?)을 뚫고 담을 넘었다. 뱀이 걱정이지만 든든한 신발을 믿기로 했다.
연대는 잘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튼튼하게 쌓았기 때문이리라. 바다를 경계하는 망루 역할과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던 봉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사다리가 아니면 오를 수 없는 구조다. 최후의 순간에는 사다리를 올리고 마지막 저항을 하려고 했나 보다.
애월에서 일주도로로 나와 버스를 탓다. 뱃시간에 맛추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도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다. 바로 옆 곽지해수욕장 일대는 이 해안에서 걷기에 가장 좋은 코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주도로 옆으로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해안가 도보 전용 길을 보면서 후회를 거듭했다. 경치도 보면 볼수록 좋았다. 후회는 또 후회를 낳는다. 머리가 냉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귀덕리에서 내렸다. 제길. 곽지해수욕장 멋진 길은 이미 끝났고, 처음 걸었던 고내리와 별반 다름 없다. 결국 꼭 보고 싶었던,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경지정리된 밭이 널게 펼쳐진 수원리 들판도 못 보고 건너 뛸 수밖에 없었다.
한림항 여객선 부두로 갔다. 시간이 없어 배를 얼른 타려고 배로 달려갔더니 표를 끊어 오란다. 맞은편에 대합실 겸 매표소가 있다. 나는 비양도 행 여객선이 한 대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대다. 다만 타고 간 배로 올 때도 타고 와야 한다. 왜 그런지는 안 물어봤지만 참 이해가 안 되었다. 운임 정산 문제는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초급 산수문제 같은데 말이다. 암튼 나는 12시 표를 끊었다. 몇 시에 나오느냐 묻는다. 같은 배를 타야 한다면서 말이다. 돌아오는 배편은 14시 15분 표로 끊었다.
배는 15분만에 비양도에 닿았다. 나는 허기가 져 있어 식당을 찾았다. 새벽부터 움직였는데 먹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인에게 식당 추천을 의뢰했다. 그러나 받은 번호로 전화를 해봐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지도를 보고 보말이야기로 가기로 했다. 사람이 좀 적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잘 한 것 같았다.
메뉴를 보면서 주저하는 나에게 주인장은 보말죽을 권했다. 보니까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손님이 시키면 바로 줄 수 있는, 중국집으로 치면 짜장면 같은 거였다. 그렇다고 싫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먹을만 했으니 말이다. 나는 한라산 소주를 시켰다. 당연히 흰 병 21도 짜리로 말이다. 밥을 먹으니 행복했다. 들어오기 전 보이지 않던 식당 풍경도 보인다. 예쁘다. 식당 바로 옆으로 비양도 일주도로가 시작된다. 그것도 좋다.
식당 옆으로 난 길로 시작해서 비양도를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조금 가니 비양도 산 정상으로 난 계단 언덕이 보였다.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높지는 않았지만 오르는 길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길 옆으로는 산뽕나무가 참 많았다. 마침 오디가 익는 철이라 나도 하나 따 먹었다. 비를 맞아서인지 달지 않았다.
능선길에 올라 제주도 본섬을 바라봤다. 제비들이 오락가락 한다. 재수 좋게 제비 두 마리가 사진에 찍혔다. 한라산을 보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안 가기를 잘했다. 모슬포 쪽 서쪽 바다를 봤다. 멀리 서쪽 바다에는 풍력발전소 흰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언젠가 걸어서 제주도를 한 바퀴 돌고 싶다. 무모하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떤가. 등대에 올랐다. 계획은 등대를 지나 밑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그런데 길이 막혔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등대가 있는 정상에서 내려와 작은 언덕을 넘으면 이내 해안길이다. 언덕에는 야생이 된 열무의 보랏빛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비양도는 서기 1002년에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섬이다. 고려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참 젊은 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젊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바닷가 바위도 좀 더 젊은 것 같다. ㅎ
모퉁이를 돌아서니 안내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만 있다는 특이한 화산 구조물인 호니토를 설명한 것이다. 용암이 찬 바닷물 위로 덮치면 밑에 있는 물이 끓어 수증기로 솟구치며 용암을 뚫고 분출하는데, 이때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따라 올라온 용암이 굳어져 개미탑 같은 구조물이 생긴다고 한다. 그게 호니토라고 한다. 확실히 비양도가 젊은 섬인 건 맞는 모양이다.
이내 펄랑못이 나왔다. 지도를 좋아하는 나는 비양도 지도를 볼 때 늘 이곳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민물이 섞이기는 했지만 짠물이 만든 염습지라고 한다. 낯설고 좋은 풍경이었다. 배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온 것이 아쉽다.
비양도 옛 포구를 지났다. 정말 작은 포구다. 주변을 현무암으로 정성스레 쌓아 방파제를 만들었다. 바람이 유난히 심한 제주도에서 이런 포구는 주민들의 배를 보호하는 훌륭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 포구 덕에 비양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고, 돈도 벌었을 것이다.
포구에서 비양도를 다시 바라본다. 아름다운 섬이다. 물론 사는 주민의 입장에서는 좁고 답답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암튼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시간을 좀 넉넉하게 잡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엔 안내자로 다시 오길 기대해 보자.
2021. 5. 26. 탐방
2021. 6. 12. 기록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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