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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태(洪世泰)의 시(詩) 「견민(遣悶, 넋두리)」에 붙여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농무(農舞), 창작과비평사 1992)

 

 

점점 경쟁은 치열해지고, 맘 편히 기댈 친척도 벗도 멀어져가는 세상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희망을 공유하는 게 사치로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게 정상일까요? 사람들이 그렇게만 살아야만 할까요? 인류의 역사를 작게 잡아 5만년이라고 쳐도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간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길게 잡아야 기껏 2천년 정도이고, 짧게 잡으면 2~3백년이겠지요. 그 전까지는 서로 돕지 않으면 함께 살아갈 수 없었을 겁니다. 생산력이 낮았으니까요. 생활 속 습관이 DNA에 저장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의 DNA에는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현대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신경림 시인의 파장(罷場)첫 구절을 꼽습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 시는 1960년대 또는 1970년대 초반에 쓰였을 겁니다. 1973년에 출판된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農舞)에 실려 있으니까요. 그때는 농촌사회 공동체가 여전히 끈끈했을 때여서 그랬을까요. 장날 모인 벗들은 그냥 얼굴만 봐도 즐겁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양파주통일을만드는사람들 2020년 설맞이 축제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인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시(漢詩)는 일단 한문(漢文)을 알아야 쓸 수 있는 시입니다. 지금은 물론 예전에도 한문은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한시를 쓸 수 있는 층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조상들이 즐기던 한시를 소개하고 싶은데 그러자니 자연 한문을 쓰던 당대의 귀족층의 정서를 대변하기 십상입니다. 비록 당대 서민들의 삶은 담은 한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민층 자신의 시는 아닙니다. 다수의 서민들의 삶을 문화의 중심으로 삼고 싶은 저로서는 이런 상황이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 시로써 보완을 하지만요. 오늘은 그래도 사대부층이 아닌 중인(中人)들의 시를 소개하는 것이 이런 모순에 빠진 저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시인은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 재위 : 1674~1720)시대 주로 활동하였던 홍세태(洪世泰, 1653(효종 4)~1725(영조 1)라는 분입니다.

 

 

鹽谷七歌(염곡칠가) 其一(기일)

 

有客有客字道長(유객유객자도장)
自謂平生志慨忼(자위평생지개강)
讀書萬卷何所用(독서만권하소용)
遲暮雄圖落草莽(지모웅도락초망)
誰敎騏驥伏鹽車(수교기기복염거)
太行山高不可上(태항산고불가상)
嗚呼一歌兮歌欲發(오호일가혜가욕발)
白日浮雲忽陰結(백일부운홀음결)

 

염곡칠가(1)

 

나그네여! 그대의 자가 도장이라지

스스로 평생 강개한 뜻 지녔다 하고

만권 독서하였다지만, 무슨 소용인가

늙으니 웅대한 포부 풀숲에 떨어졌네

누가 천리마를 소금수레 끌게 했나

태항산은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부르려니

뜬구름 짙어지며 밝은 해 가려버리네

 

 

위 시는 홍세태 선생이 69세 때 지은 시입니다. 자신의 삶을 7편의 시로 엮은 자전적 연작시 중 첫 번째 시입니다. 스스로 자부하였듯이 뜻이 높고 강하며 만권을 독서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분의 벽은 높기만 합니다. 재능은 천리마인데, 현실에서는 소금수레나 끌라고 합니다. 이제 늙어 웅대한 포부도 검은 먹구름에 가려 가는 흐릿한 햇살처럼 흐려집니다. 그저 안타깝기만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갑계회도(壽甲稧會圖)」. 무인년(1758년)에 태어난 22인의 동갑 중인들이 57세인 1814년에 한성의 중부 약석방(藥石坊) 정윤상(丁允祥)의 집에서 모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입니다. 중인들은 이런 모임을 통해 시와 음악 그리고 그림으로 교유했습니다.

 

홍세태 선생은 자()가 도장(道長)이고 호는 창랑(滄浪)입니다. 만년에는 유하(柳下)라는 호를 씁니다. 5세에 책을 읽고 7, 8세에는 글을 지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으나 신분이 중인(中人)이라 제약이 많았습니다. 시로 이름이 나서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 이규명(李奎明) 등 사대부들과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임준원(林俊元), 최승태(崔承太), 유찬홍(庾纘弘), 김충렬(金忠烈), 김부현(金富賢), 최대립(崔大立) 등 당대의 뛰어난 중인(中人)들과 시 동호회 낙사시사(洛社詩社)를 결성해 교유하였습니다. 김창흡과 이규병은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이 달랐지만 동갑내기인데다 뜻이 맞아 중인인 선생과 신분을 초월한 망형지교(忘形之交)’를 맺었습니다. 선생이 38세가 되던 1691(숙종 19) 당시 북촌 장동(壯洞)에 있던 청송당(聽松堂)에서 벗 이규명과 이별하며 지은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聽松堂別李秀才(청송당별이수재)

 

落日溪頭別(낙일계두별)
君歸水亦流(군귀수역류)
空留春草色(공류충초색)
寂寞使人愁(적막사인수)

 

청송당에서 이수재와 작별하면서

 

해저물녘 계곡 입구에서 이별이라

그대 가니 시냇물 또한 흘러가네

화사한 봄빛은 괜스레 남아있어서

쓸쓸하니 나를 시름 짖게 하는구나

 

 

청송당(聽松堂)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中宗, 재위 : 1506~1544)시대 대 학자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1564(명종 19))이 지은 서실(書室)입니다. 성수침은 기묘사화 때 스승 조광조(趙光祖, 1482(성종 13)~1519(중종 14))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북악산 기슭의 집 뒤에 지은 이 서실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그 뒤 퇴락한 것을 외증손 되는 윤선거(尹宣擧, 1610(광해군 2)1669(현종 10)) 형제가 재건하였습니다. 그 뒤 서인세력과 그들이 후원하는 중인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던 곳입니다.

 

 

국립박물관 소장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년(숙종 2)~1759년(영조 35))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중 「청송당(聽松堂)」 부분입니다.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지금의 경기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홍세태는 19세 되던 1675(숙종 1)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체직(遞職, 벼슬이 바뀜. 일종의 파직)되었습니다. 그러다가 47세가 된 1698(숙종 24)이 되서야 역과 합격 때에 제수된 이문학관에 실제로 부임하게 됩니다.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그 해에 글 잘하는 이들이 주로 맡는 제술관(製述官)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둔전장(屯田長),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 서부주부 겸 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郎),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파직되었습니다. 그가 재능과 맞지 않게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67세 되던 1719(숙종 45)에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이 되었습니다. 감목관으로 있던 3년여 동안이 경제적으로 그나마 나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규장각 소장 『嶺南地圖』 중 「울산부지도(蔚山府地圖)」입니다. 오른쪽 아래 마성이 보입니다. 그곳이 울산목장(蔚山牧場)에 있던 남목마성(南牧馬城)입니다. 마성 바로 위에 있는 붉은 네모 안이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의 관사입니다. 홍희태 선생은 말년에 3년 여 이곳에서 감목관을 지내며 200편에 달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때가 그나마 가장 경제적으로 덜 궁핍했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홍세태 선생은 벼슬을 하기 전에 당시 여항문학의 강력한 후원자인 임준원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홍세태는 호를 창랑(滄浪)이라 하였으며 시를 잘 지어서 명성이 당시 함께 높았다. -중략- 홍세태는 모친이 연로하였지만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었다. 임준원은 자주 재물로써 홍세태를 도와서 그가 궁핍하지 않게 하였다.”

 

라는 내용이 선생의 제자 정내교(鄭來僑, 1681(숙종 7)~1757(영조 33))의 문집 완암집(浣巖集)임준원전(林俊元傳)에 전하고 있습니다. 재주는 많고 기개는 높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음을 잘 표현한 선생의 시 견민(遣悶)을 보겠습니다.

 

 

遣悶(견민)


臥愛靑山起每遲(와애청산기매지)
浮雲流水亦吾詩(부운유수역오시)
此身却笑非仙骨(차신각소비선골)
滿腹煙霞未解飢(만복연하미해기)

 

넋두리

 

누워서 청산을 즐기느라 매번 늦게 일어나

뜬구름과 흘러가는 냇물 모두 나의 시라네

우스워라 이내 몸 정녕 신선이 못 됨이여

뱃속 가득 자연 사랑도 주린 배 못 채우네

 

 

홍세태 선생은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를 보는 안목 또한 높았던 것 같습니다. 문집에 실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들, 특히 중인이나 승려 등의 시들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란 이름의 시선집(詩選集)을 냅니다. 해동(海東) 즉 조선(朝鮮)의 버려진 진주(珍珠)같은 시들이란 뜻입니다. 자신과 같은 중인 등 하층민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제목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시의 주류 사대부가 아닌 중인(中人) 등 이른바 여항인(閭巷人)들의 시를 소개하여 우리들이 지금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선생은 가난한 와중에도 은자 70냥을 저축했습니다. 자신의 시()와 문장(文章)을 모아 문집(文集)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6년 뒤에 사위 조창회(趙昌會)와 문객들에 의해 14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유하집(柳下集)이라는 이름의 이 문집에는 부() 3, () 1627, () 42수 등 모두 167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가난한 와중에도 문집을 꼭 내고 싶었으니 그의 문학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홍세태 선생은 82녀를 두었지만 모두 선생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선생은 죽은 뒤 지금의 구파발 역 뒤편에 있는 이말산 남동쪽 자락에 묻혔습니다. 선생을 흠모한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1752(영조 28)) 선생은 홍세태 선생의 묘에 묘비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묘비 건립운동을 주도하고, 스스로 묘비명을 씁니다. 그러나 지금 이말산에는 홍세태 선생의 무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비석도 못 찾고 있고요.

 

 

구파발역 뒤편 이말산에 있는 시인 홍우필(洪禹弼) 묘. 홍세태 선생보다 한세대 뒤에 활동한 시인입니다. 홍세태 선생 묘는 홍우필 선생 묘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 1690년(숙종 16)∼1752년(영조 28))의 기록에 의하면 홍세태 선생의 묘에는 전면에 ‘시인창랑홍세태지묘(詩人滄浪洪世泰之墓)’라고 쓴 묘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번에 홍세태 선생의 시를 알게 되면서 중인들의 시를 접하게 된 것도 저에게는 큰 수확입니다. 앞으로 중인 등 여항(閭巷)의 시를 좀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조선시대 서민들의 삶과 문학을 좀 더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마지막으로 백무산 시인의 기차를 기다리며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바뀌어도, 아무리 빠르게 달려가도 희망은 여전히 사람임을 외치며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꿔봅니다.

 

 

기차를 기다리며

- 백무산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백무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도서출판 청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