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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산책 – 유몽인 선생의 「분하(盆荷)」에 부쳐
밤길
- 임화
바람
눈보라가 친다
앞길 먼산
하늘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
아 몹시 춥다.
개 한 마리 안 짖고
등불도 꺼지고
가슴 속
숲이
호올로
흐득이는 소리
도깨비라도 만나고 싶다
죽는 게
살기보다도
쉬웁다면
누구가
벗도 없는
깊은 밤을.......
참말 그대들은 얼마나 갔는가.
발자국을
눈이 덮는다
소리를 하면서
말 소리를 들 제도
자꾸만
바람이 분다.
오 밤길을 걷는 마음.
얼마나 외로우면 도깨비라도 만나고 싶을까요. 차가운 눈보라가 치고, 등불도 꺼지고, 벗도 없습니다. 앞길이나 먼 산, 심지어 하늘에도 보이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개 짖는 소리도 없으니 벗은 가까운 거리에 없을 뿐더러 가까운 시간 안에 오지도 않을 겁니다. 1930년대 말, 암울한 식민지 조선을 근근이 견디며 살아가야 했던 청년 사회주의자의 외로움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꿈꾸는 혁명은 멀기만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밤 깜깜한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를 쓴 임화(林和, 1908~1953)는 일본 식민지 시절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과 「조선 공산당」을 이끌던 분입니다.
외로움은 어쩌면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이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시대와 불화하는 이는 소수이기 쉽고, 때로는 목숨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인 광해군 시대를 시대와 불화하면서 보냈고, 인조반정 뒤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유몽인(柳夢寅, 1559년(명종 14)~1623년(인조 1)) 선생 또한 그런 분 중 한 분입니다.
유몽인 묘 : 유몽인(柳夢寅) 묘. 아래 비석이 있는 무덤은 아들 유약(柳瀹)의 묘다. 유약은 아버지와 함께 역모죄인으로 문초를 받다가 고문으로 옥사했다. 경기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 80에 있다.
유몽인 선생은 지금도 많이 읽히는 조선시대 유명한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서른 한 살 되던 1588년(선조 22) 과거(科擧)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한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당대 대학자인 노수신(盧守愼) 선생과 유성룡(柳成龍) 선생은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나라에 없던 훌륭한 문장"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능력과 별개로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본인이 사양한 것도 많지만요. 1607년(선조 40) 황해도 관찰사에서 경질된 다음에 지은 「분하(盆荷)」라는 시(詩)를 먼저 보겠습니다.
盆荷(분하)
一盆花結子(일분화결자)
一盆葉長大(일분엽장대)
一盆抽數莖(일분추수경)
一盆無一箇(일분무일개)
早晩各有時(조만각유시)
天意誰能解(천의수능해)
欲待明年花(욕대명년화)
明年吾何在(명년오하재)
화분에 심은 연
화분 하나는 꽃이 열매 맺었고
화분 하나는 잎이 길고 크며
화분 하나는 줄기 몇 가닥 돋고
화분 하나는 아무것도 없구나
이르건 늦건 각기 때가 있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리오
내년에 피는 꽃을 기다리고 싶지만
내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연꽃하면 넓은 연못에 심어진 풍경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하필 화분 속 연(蓮)일까요. 벼슬살이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가 ‘화분 속 연’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까요. 각자 운이 맞는 때가 있으니 내게도 운이 돌아와 언젠가 피어날 꽃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내 생에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1608년(선조 41) 선조 임금이 갑자기 죽습니다. 이때 유몽인 선생은 공교롭게도 도승지(都承旨)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자리입니다. 선조는 늦은 나이에 낳은 유일한 왕비 소생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승하하게 되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싫어해도 세자(世子)인 광해군이 왕이 될 테니까요. 숨을 거두기 전 선조는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는 취지의 유교(遺敎, 유언)를 남겨 도승지인 유몽인 선생으로 하여금 중요한 일곱 명의 대신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이 일로 유몽인 선생은 광해군 시대의 핵심 실력자인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탄핵을 받아 재야로 물러납니다. 이른바 ‘영창대군 파’로 몰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벼슬에 나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합니다.
광해군 시대는 당파싸움이 격렬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때 주도권을 장악한 당파는 북인(北人)입니다. 북인은 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제자들입니다.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남명 선생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 항쟁을 주도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선을 돌면서 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광해군은 누구보다도 그들의 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동지애가 생긴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북인들은 명분이 지나치게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몽인 위성공신교서(柳夢寅 衛聖功臣敎書). 유몽인 또한 임진왜란 당시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많은 공을 쌓았다. 교지는 살아남은 후손들이 전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12월 22일 보물 1304호로 지정되었다.
명분은 정의롭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명분이 절대화되고, 소수의 전유물이 됩니다. 경쟁자나 경쟁세력을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독재가 되는 거죠. 북인(北人)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나뉘고, 여기서 승리한 대북은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인목대비 폐위를 둘러싸고 중북(中北)이 떨어져 나갑니다. 광해군 말기가 되면 대북(大北) 중에서도 육북(肉北)이 정권을 주도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소수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정파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독재가 된 것이죠.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부른 실질적 빌미가 됩니다.
1608년(광해 10)은 전년부터 조금씩 나오던 인목대비에 대한 폐위논의가 본격적으로 공론되던 해입니다. 덩달아 역적 고변(告變, 고소)도 넘쳐 났습니다.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반대 정파를 사전 숙청하였던 것이죠. 역적 고변이 들어오면 이를 심판하는 재판정이 열리는데, 이를 추국청(推鞫廳)이라고 합니다. 유몽인 선생도 추국청의 재판을 담당하는 관리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지은 시 때문에 선생은 대북(大北) 정권으로부터 완전 밉보이기 시작합니다.
南麓聽銀介歌辭仍赴推鞫廳(남록청은개가사잉부추국청)
滿城花柳擁春遊(만성화류옹춘유)
玉手停杯詠柏舟(옥수정배영백주)
壯士忽持長劍起(장사홀지장검기)
醉中當斫老奸頭(취중담작노간두)
남산에서 은개의 노래를 듣고 추국청으로 가다
서울은 온통 꽃과 버들 봄놀이 즐기는데
미인은 잔 멈추고 백주장(栢舟章)을 부르누나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들고 일어나서
취중에 늙은 간신 목 베려 하는구나
백주(栢舟)는 『시경』 「용풍(鄘風)」의 편명으로, 남편을 잃은 공강(共姜)이 재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시(詩)입니다. 시의 1구와 2구는 너희들이 봄이 온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세하지만, 나는 거기에 함께 하지 않겠다는 은유입니다. 더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장사가 목을 베려한 늙은 간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혹시 공포정치를 이끌고 있는 대북(大北) 정권의 대신들을 말하는 것 아니냐고 따집니다.
유몽인 선생은 이어진 인목대비 폐위 논의에 불참합니다. 이 일로 대북(大北)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버림을 자초했는지도 모릅니다. 성균관 동문인 이정귀(李廷龜) 선생이 자신의 후임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추천했을 때도 극구 사양했듯이, 대북 정권과 함께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입니다.
남원 운봉과 지리산 지도.(『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에서 재인용) 유몽인 선생은 53세 때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있으면서 지리산을 다녀와 생생한 기행문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遊頭流山錄)」을 남긴다. 향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많아서인지 기행문 속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 이야기가 특히 많이 나온다.
유몽인 선생은 이후 서강(西江) 와우산(臥牛山) 자락에 집을 짓고 은거합니다. 1622년(광해 14)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유점사, 표훈사 등에서 머뭅니다. 1623년(광해 15)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선생은 금강산 표훈사에서 반정 소식을 듣습니다. 반정 세력은 선생에게 함께 벼슬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의 실정도 싫었지만, 그래도 광해군은 자신이 섬겼던 임금입니다. 왕조시대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선비정신의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권에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담아 시(詩)를 씁니다.
題寶蓋山寺璧(제보개산사벽)
七十老孀婦(칠십노상부)
單居守空壼(단거수공곤)
慣讀女史詩(관독여사시)
頗知妊姒訓(파지임사훈)
傍人勸之嫁(방인권지가)
善男顔如槿(선남안여근)
白首作春容(백수작춘용)
寧不愧脂粉(영불괴지분)
보개산 사찰의 벽에 쓰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단정히 빈 방 지키며 살았네
여사의 시를 익숙하게 읽고
임사의 교훈을 제법 알았네
이웃 사람 시집가라 권하니
미남의 얼굴 무궁화 같네
흰머리에 젊은 모습 꾸민다면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 임사(妊姒) : 문왕(文王)의 모친 태임(太妊)과 무왕(武王)의 모친 태사(太姒)의 합칭으로, 현숙한 부녀를 말한다.)
이 시는 금강산에 머무르던 저자가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하산하여 선영으로 돌아가던 중, 철원 보개산에 남긴 것입니다.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이 시가 선생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이끈 서인 세력은 광해군 시대에 권력을 잡았던 북인(北人)들을 철저하게 숙청하였습니다. 북인이었지만 대북(大北) 핵심세력에 반대했던 유몽인 선생도 숙청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인조반정 공신들은 결국 이 시를 문제 삼습니다. 백이(伯夷) 숙제(叔齊)처럼 새 정권에 동참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되고, 결국 자신들의 명분이 약해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유몽인 선생을 위하여 전라도 선비들은 선생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바치고 고흥(高興) 운곡사(雲谷祠)에 배향했습니다. 그 뒤 170년이 지난 1794년(정조 18) 정조 임금은 유몽인 선생을 복권하고 ‘의정(義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손수 선생을 복권하는 글(어제신설판부(御製伸雪判付))과 벼슬을 높이고 시호를 내리는 글(어제 추증 판부(御製貤贈判付))을 써서 내립니다.
유몽인 선생 묘 오르는 계단. 유몽인 선생의 묘는 소문난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멸문을 당한 뒤에 명당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끼 낀 높은 계단길이 더욱 쓸쓸하게 보인다.
얼마 전 시간을 억지로 내 가평에 있는 유몽인 선생의 묘를 다녀왔습니다.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하고요. 왕조시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건 바로 반역이었고, 죽음이었습니다.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경우에서 보듯이 개혁을 위해 세력을 규합하는 것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가슴에 담고, 올바른 한 길로 가고자 했던 그 정신은 오늘 우리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들은 비록 지지부진하지만 사회를 바꾸기 위해 결사를 하고, 서로에게 힘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에 서로를 응원하는 시(詩)로 선생에게 고마움과 동지적 연대를 보냅니다. 송경동의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입니다.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번 다시는 속지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2020년 11월 16일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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