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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건(常建)의 시 제파산사후선원(題破山寺後禪院, 파산사 선원에서)에 붙여

 

 

春山(춘산)

- 남덕현

 

하아!

큰불이 났구나

꽃불이 났구나

저 불 봄바람에 번지면

내 속 천불은 불도 아니겠구나

스님 염불은 불도 아니겠구나

삼세제불은 불도 아니겠구나

무엇으로 맛불을 놓아

저 불을 잡으랴

다 타 죽겠구나

저 불에 다 불타 죽겠구나

적요로구나

적멸이로구나

(유랑노마드북스, 2016)

 

 

불이죠. 암요. 불이고 말고요. 그것도 아주 큰 불이죠. 몇 년 전 봄날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에 갔었습니다. 진달래를 보려고요. 온 산을 다 덮은 진달래 풍경은 정말 봄바람에 번진 꽃불 그 자체였습니다. 꽃피는 봄날 하루 정도는 맘의 끈을 풀고 꽃불 속에 푹 잠기는 것은 어떨까요. 남덕현 시인처럼 오로지 꽃불에 취하여 세상 삼라만상을 다 잊고, 자신도 잊고요.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의 봄 풍경. 마치 온 산에 꽃불이 난 것처럼 보인다.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한시(漢詩)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활약했던 시인 상건(常建, 708~765)의 시 제파산사후선원(題破山寺後禪院)입니다. 상건은 727(당 현종 16) 문과(文科)인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합니다. 관리 생활을 하였지만 그리 오래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별나고 유난히 곧은 성격은 관리생활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명산대찰을 유람하다 끝내 서산(西山)에 은거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그를 산수(山水)전원(田園)시파 시인으로 분류합니다. 시를 보겠습니다.

 

 

題破山寺後禪院(제파산사후선원)

- 常建(상건)

 

淸晨入古寺(청신입고사)

初日照高林(초일조고림)

曲徑通幽處((곡경통유처)

禪房花木深(선방화목심)

山光悅鳥性(산광열조성)

潭影空人心(담영공인심)

萬籟此俱寂(만뢰차구적)

惟聞鐘磬音(유문종성음)

 

파산사 선원에서

 

맑은 새벽 옛 절에 들어서니

뜨는 해는 높은 숲을 비추네

오솔길 지나 그윽한 곳 이르니

우거진 꽃나무 속 선방이 있네

봄날 산 빛 새들 달뜨게 하고

못 속 그림자 마음 비우게 하네

온갖 소리 예서 다 사라지고

들리느니 오직 풍경소리 뿐

 

 

시인 상건(常建)은 청명한 봄날 아침 일찍 절에 갔나봅니다. 해는 막 뜨기 시작해 서산 봉우리부터 비추기 시작합니다. 절 뒤 오솔길을 따라 스님들이 수도하는 선방(禪房)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시만 보아도 시인 상건의 행로가 그려집니다.

 

때는 꽃피는 봄날입니다. 햇살은 밝고 나무들은 연초록 새잎을 틔우고 있었을 겁니다. 이때는 새들의 교미 철입니다. 새들은 구애를 위해 한껏 목소리를 올리죠. 그러나 그와 반대로 연못 속 그림자를 보면서 내 마음은 한없이 비어만 갑니다. 세상의 온갖 소리와 잡념이 이곳에서 사라집니다. 다만 들리는 건 오직 풍경소리 뿐입니다.

 

앞의 남덕현 시인의 시나 여기 상건 시인의 시 모두 끝은 적요(寂寥), 적멸(寂滅)로 맺음 합니다. 다만 남덕현 시인의 시는 꽃불 속에 푹 잠겨서 모두를 잊은 적멸이고, 상건 시인의 시는 고승처럼 어떤 경지에 이른 적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남덕현 시인의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상건 시인의 시에 이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월정사  8 각 9 층탑 ( 국보 제 48 호 ).  세상 사람들에게 적멸세상을 보여주려는 듯 탑 앞에 있는 보살의 모습이 간절하다 .

 

4월에는 청명(淸明)이 있죠. 청명은 24절기 중 하나로 천지가 맑은 공기로 상쾌하게 가득 찬다는 절기입니다. 청명은 우리나라 식목일인 45일 전후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역시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시 청명(淸明)을 보겠습니다.

 

 

淸明(청명)

-杜牧(두목)

 

淸明時節雨紛紛(청명시절우분분)

路上行人欲斷魂(로상행인욕단혼)

借問酒家何處有(차문주가하처유)

牧童遙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청명

 

청명 시절에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길가는 나그네 외로워 넋이 나가려 하네

주막집 어디 있나 목동에게 물어보니

말없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 가리키네

 

 

두목(杜牧)은 당나라 말기인 만당(晩唐)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복을 빌 때 문장은 이태백이오, 인물은 두목지(杜牧之)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이가 커서 문장으로는 이태백을 닮고, 인물은 두목지를 닮으라는 축원이지요. ‘목지(牧之)’ 두목의 자()입니다. 그만큼 잘 생겼었다고 합니다. 물론 시도 잘 썼습니다. 그의 시는 특히 낭만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홍도의  「 마상청앵도 ( 馬上聽鶯圖 ) 」 .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그림이다 .  봄날에는 때로는 이렇게 세상 시름을 잊고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 ( 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호우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노래했습니다. 고향 동네 어디에든 살구꽃이 피어날 터이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살구꽃이 피는 풍경은 왠지 따뜻한 느낌을 주니까 고향처럼 느끼는 것 아닐까요.

 

청명시절 내리는 비는 농사에 약이 되는 단비겠지만, 외로운 나그네에겐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그 무엇이었을 겁니다. 따뜻한 술 한 잔이 생각납니다. 목동에게 주막집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는데, 마침 저 멀리 있는 살구꽃 피는 마을이라네요. 소동파(蘇東坡, 1037~1101)의 유명한 시 월야여객음주행화하(月夜與客飮酒杏花下, 달밤에 손님과 함께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다)는 두목의 이 시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합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살구꽃 주렴에 날아들어 남은 봄 흩날리고

밝은 달 창문에 들어와 그윽한 사람 찾아주네

 

杏花飛簾散餘春(행화비렴산여춘)

明月入戶尋幽人(명월입호심유인)

 

저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당()나라 시를 좋아하는 건 느낌을 그대로 시에 옮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학(儒學), 그중에서도 특히 사변적인 성리학(性理學)이 사회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송()나라부터는 시에 교훈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서 시의 맛이 조금은 떨어지지 않나 여겨집니다. 저에게 당나라 시는 신선한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라면 송나라 시는 공장에서 생산된 가공재료를 이용한 음식 같은 느낌입니다. 조선시대는 특히 성리학이 사회를 이념적으로 지배했던 사회입니다. 그만큼 교조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시들이 교훈적인 게 많죠. 물론 그런 분위기에 반발했던 이들도 있지만요.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정신세계가 자유로웠던 고려시대 시를 한 편 보겠습니다.

 

 

感懷(감회) 二首(2수)

- 이제현(李齊賢)

 

杜鵑花發杜鵑啼(두견화발두견제)
香霧空濛月欲西(향무공몽월욕서)
立馬得詩還忘却(입마득시환망각)
鳳城東望草萋萋(봉성동망초처처)

 

光風轉夜露華微(광풍전야로화미)

零落春紅欲滿衣(영락춘홍욕만의)
喚取佳人騎細馬(환취가인기세마)
敎吹玉笛月中歸(교취옥적월중귀)

 

 

감회

 

진달래 피어나고 소쩍새 우는데

향 안개 자욱하고 달은 기우네

말 멈추고 얻은 시 바로 잊고서

동쪽 대궐 바라보니 풀만 가득해

 

비바람 개인 밤 이슬도 적은데

붉은 꽃잎 옷자락 그득 떨어지네

미인을 불러 좋은 말에 함께 타고

옥피리 불게하며 달밤에 돌아가리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말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입니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선생이 이제현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당대는 물론 후학들의 커다란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제현 ( 李齊賢 )  선생 초상 .  충숙왕  6 년 (1319) 33 세의 이제현 선생은 절강지방에 향을 내리러 가는 충선왕을 시종하였다 .  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진감여 ( 陳鑑如 ) 라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  이제현 선생은 초상을 잃어버렸다가  31 년 뒤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되찾았다고 한다 .  국립박물관 소장으로 국보 제 110 호이다 . ( 사진  :  국립박물관 )

 

첫 구에 나오는 두견화는 진달래입니다. 두견새는 소쩍새고요. ‘두견(杜鵑)’이 반복되는 게 좀 더 시적 표현으로 보이지만 현대 사람들은 두견화나 두견새를 잘 모르기에 우리말로 바꿔 번역해보았습니다. 소쩍새도 현대 도시인에게 여전히 낯설겠지만요. ‘봉성(鳳城)’은 임금이 사는 곳, 곧 대궐을 이르는 말입니다. 대궐이 풀만 우거져 있는 것으로 봤을 때 1360(고려 공민왕 9)에 홍건적이 쳐들어 와 궁궐이 폐허가 된 다음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때라면 이제현 선생은 이미 일흔 살이 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미인을 불러 피리 불며 함께 돌아가겠다는 것은 봄의 흥취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봄날 꽃들이 활짝 핀 야산의 풍경 .  때로는 온갖 시름을 잊고 꽃바람 든 꽃잎처럼 훨훨 날아다니자 .

 

봄은 대부분의 이들이 좋아하는 계절입니다. 저도 유난히 봄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때 겨울을 몹시 싫어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봄이 되면 꽃그늘이 묻혀서 봄날의 행복을 실컷 누려보고 싶습니다. 잠시라도 세상 시름을 잊으면서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 한시산책을 시작했는데, 잘 안 되네요. 역시 속세의 번뇌를 벗어나기 힘든가 봅니다. 그래도 봄은 제대로 누려야겠지요. 아무 생각 없이 꽃바람이 든 꽃잎처럼 가볍게 봄을 즐겨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김용택 시인의 봄봄봄 그리고 봄을 드리면서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봄봄봄 그리고 봄

- 김용택

 

꽃바람 들었답니다

꽃잎처럼 가벼워져서 걸어요

 

뒤꿈치를 살짝 들고

꽃잎이 밟힐까 새싹이 밟힐까

사뿐사뿐 걸어요

 

봄이 나를 데리고

바람처럼 돌아다녀요

나는, 새가 되어 날아요,

꽃잎이 되어, 바람이 되어

나는 날아요 당신께 날아가요

 

나는, 꽃바람 들었답니다

당신이 바람 넣었어요

 

 

2021년 3월 10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