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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상(鄭知常)송인(送人)에 붙여

 

 

그대 생각

- 김용택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

푸른 보리밭에 아침 이슬 반짝입니다. 밭 언덕에 물싸리꽃은 오래된 무명 적삼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세상을 한참이나 벗어 나온 내 빈 마음 가장자리 부근에 꿈같이 환한 산벚꽃 한 그루 서늘합니다.

산이랑 마주 앉을까요. 돌아서서 물을 볼까요.

 

꽃 핍니다.

배꽃 핍니다.

우리집 뒤안에 초록 잎 속에 모과꽃 핍니다

민들레 박조갈래 걸럭지나물 시루나물 꽃 봄맞이꽃 꽃다지도 핍니다

저 건너 산 끄트머리 돌아서는 곳 아침 햇살 돌아오는 논두렁에 느닷없이 산복숭아 한 그루 올해 연분홍으로 첫 꽃입니다. 저 작은 몸으로 꽃을 저렇게나 환하게 피워내다니요.

눈을 감아도 따라옵니다.

 

꽃입니다 꽃이요 꽃, 만발한 꽃밭입니다.

꽃 피면 꽃 따라 다니며 어쩔 줄 모르던 나이 지나, 꽃나무 아래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피는 꽃도 지는 꽃도 한참씩 건너다봅니다.

 

꽃이야 지겠지요 꽃이야 지겠지요

저기 저 하얀 탱자꽃 꽃잎 다섯 장이 다 진다구요.

 

그대도 없이 나 혼자 허리 굽혀 탱자꽃을 줍습니다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저는 이 시를 읽고는 숨이 턱 막혔습니다 다시 제목(그대 생각)을 보고 시를 읽었습니다. 무언가 가슴에 가득 차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리움이란 이런 거지요. 시인은 어쩌면 그리움을 이렇게 오롯이 그려냈을까요.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주자(朱子)는 충성 충()을 진기지위충(盡己之謂忠)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의 모든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충()이라고 하는 것이죠. 내 마음을 담는 틀을 상자에 비유한다면 그 상자에 한 가지 마음으로 꽉 채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마음이나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겠지요. ‘()’ 뿐만 아니라 ()’믿음()’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마음으로 자기를 가득 채우려면 무엇보다도 정성()’이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시를 다시 봅니다. 탱자꽃 꽃잎을 세어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평소에는 탱자꽃 꽃잎이 몇 개인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보리밭의 이슬도 보입니다. 물싸리꽃도 보이고요. 그렇게 산벚이 피고, 배꽃이 핍니다. 모과꽃도 피고요. 어느 꽃이 먼저 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꽃이 피어나고 또 만발하고 또 지고 또 피고. 피는 꽃도 지는 꽃도 한참씩 건너다봅니다. 꽃들이 지고, 탱자꽃도 지고, 그 꽃잎을 그///////자 줍습니다. 시간이 천천히 가고 눈앞에 잡히는 꽃들을 비롯한 사물의 변화도 촘촘하기만 합니다. ////////////////.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고, 눈에 안 뜨이던 것이 연이어 보인다면 당신은 아마도 누군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시()의 주제는 벗과의 이별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벗을 지음(知音)’이라 하고 그런 벗의 사귐을 지음지교(知音之交)’라고 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 명인이 있었습니다. 백아에게는 종자기(鍾子期)라는 벗이 있었는데 종자기는 백아의 연주만 들어도 백아의 기분을 알았다고 합니다. 종자기가 죽자 더 이상 자기의 연주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한 백아는 가지고 있던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벗을 만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진 이를 찾기 힘들어집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그런 벗의 존재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선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벗이 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습니다.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고려(高麗)의 대 시인이며 풍운아인 정지상(鄭知常, ?~1135(인종 13))의 시를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입니다.

 

 

送人(송인)

- 정지상

 

雨歇長提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洞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벗을 보내며

 

봄비 개인 긴 둑엔 풀빛이 짙어지는데

남포에서 그대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강물은 어느 때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

 

 

정지상의 고향은 대동강(大同江)이 흐르는 평양(平壤)입니다. 대동강 가 평양 남쪽 포구에서 벗과 이별을 합니다. 아마도 수도인 개경(開京, 개성)로 떠나가겠죠. 봄비가 개고 강 가 긴 둑엔 봄빛이 완연해집니다. 오랜 겨울을 벗어나 벗과 함께 있기 좋은 계절이건만 벗은 떠납니다. 노래를 부르며 벗을 송별하지만, 가슴 속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정지상의 같은 제목의 시 한편을 더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시가(詩歌)를 모아놓은 책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

 

 

벗이라고 가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걸 알고 있어도 잡고 싶은 걸 어쩌란 말입니까.

 

送人(송인)

- 정지상

 

庭前一葉落(정전일엽락)

床下百蟲悲(상하백충비)

忽忽不可止(홀홀불가지)

悠悠何所之(유유하소지)

片心山盡處(편심산진처)

孤夢月明時(고몽월명시)

南浦春波綠(남포춘파록)

君休負後期(군휴부후기)

 

벗을 보내며

 

뜰 앞엔 나뭇잎 하나 떨어지고

마루 밑엔 벌레들 슬피 우네

훌훌 떠나는 그대 말릴 수 없지만

유유히 떠나는 곳 어디란 말인가

일편단심 찾는 건 산 깊은 곳

외로이 꿈꾸는 건 달빛 밝을 때

남포에 봄이 와 물결 푸르러지면

잊지 말게나 그대 만나자는 약속

 

 

귀뚜라미 울고 나무들 낙엽을 막 날리기 시작하는 가을이었나 봅니다. 이백(李白)의 시처럼 닭들이 모여 먹이를 다투는데 봉황은 홀로인 세상입니다.(雞聚族以爭食(계집족이쟁식), 鳳孤飛而無鄰(봉고비이무린)) 도마뱀이 용을 비웃고 생선 눈알이 진주에 섞여 진주인 척합니다.(蝘蜓嘲龍(언정조룡), 魚目混珍(어목혼진)) 벗은 이제 세속을 버리고 멀리 떠납니다. 잡을 수 없지만 잡고 싶습니다. 벗은 약속을 합니다. 내년 봄에 다시 오마 하고요. 약속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그 약속을 꼭 지키라고 벗에게 다짐 받습니다.

 

 

거꾸로 되어가는 세상에 벗은 절망합니다. 몸은 산으로 산으로 향하지만 마음은 공정한 세상이 다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벗과 이별하는 시를 무수히 썼습니다. 이백 특유의 호방함보다는 담담함이 묻어나는 이별 시 한 수를 보겠습니다.

 

 

送友人(송우인)

- 이백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

白水繞東城(백수요동성)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

孤蓬萬里征(고봉만리정)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

落日故人情(낙일고인정)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

 

벗을 보내며

 

푸른 산은 북쪽으로 비껴가고

흰 강물 동쪽으로 휘돌아가네

이곳에서 한번 이별하고 나면

그대 외롭게 만리를 떠돌겠지

뜬구름이 정녕 그대 뜻이런가

지는 해는 바로 내 심사라네

손을 흔들며 그대 떠나가메

그대 태운 말도 쓸쓸히 우네

 

 

벗은 뜬구름처럼 훌훌 날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벗을 보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지는 해처럼 안타깝기만 합니다. 벗이라고 어찌 이별이 아쉽지 않겠습니다. 웃으며 손을 흔들지만 그를 태운 말마저 아쉬워 쓸쓸하게 웁니다.

 

 

그대는 바람결에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이 되고 싶은가요? 그대를 보내는 내 마음은 지는 해처럼 아쉽기만 합니다.

 

이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별시를 볼까요. 먼저 조선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시대에 활약한 대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선조 2)~1612(광해군 4))의 시를 보겠습니다.

 

 

送玄翁歸湖南(송현옹귀호남)

- 권필

 

聽雨江樓淸夜深(청우강루청야심)

離情到此已難禁(이정도차이난금)

湖南去去一千里(호남거거일천리)

他日相思何限心(타일상사하한심)

 

호남(湖南)으로 돌아가는 현옹(玄翁)을 보내며

 

강루(江樓)엔 밤 깊도록 빗소리만 들릴뿐

이별의 슬픔 이제 주체할 수 없어라

가시는 곳 호남 땅은 일천리 먼 길

훗날에도 그리는 마음 한량 있으랴

 

 

현옹(玄翁)은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 선생의 호입니다. 신흠 선생은 권필 선생보다 세 살 위입니다. 당시로는 세 살 차이는 벗으로 지냈습니다. 벗은 천리 먼 길 호남으로 떠나려고 합니다. 송별을 위해 술 한 잔을 나누는 강가 누각엔 비가 추적추적 내릴 뿐 사위는 고요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이별의 시간은 다가옵니다. 아쉬움은 크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밤 깊도록 누각엔 빗소리만 들릴뿐. 날이 밝아 그대 떠나더라도 그대 그리는 마음 어이 한량 있으리오.

 

이번에는 신흠 선생의 이별시를 한 수 보겠습니다.

 

 

送人(송인)

- 신흠

 

蕭蕭海上風(소소해상풍)

杳杳山頭雨(묘묘산두우)

風雨無休時(풍우무휴시)

行人發前浦(행인발전포)

 

벗을 보내며

 

바다 위엔 쓸쓸하게 바람이 불고

산마루엔 아스라이 비가 내리네

비바람 줄기차서 그치지 않건만

길나선 벗 떠나가네 앞 포구로

 

 

길을 나서려는 벗을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마침 비바람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벗은 야속하게도 길을 나섭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마음의 덧문을 닫고 오로지 그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류시화의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을 보면서 이번 한시산책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 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열림원 2002)

 

 

2021년 1월 10일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