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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누리길 안내도

 

 

고봉누리길은 일산 신도시의 주산인 고봉산과 옆에 있는 황룡산을 돌아오는 길이다. 고봉산도 한 바퀴, 황룡산도 한 바퀴 돌기 때문에 크게 보면 ‘8’자 모양이다.

 

 

1. 고봉산과 두 사찰 영천사, 만경사

 

 

시작점인 안곡초등학교의 담장을 지나면 왼편으로 길을 따라 커다란 공원이 나온다. 아이들의 생태학습원으로 사랑받는 안곡습지공원이다. 산지형 천연용출습지를 활용한 안곡습지공원은 물이 맑아 요즘 보기 힘든 가재, 맹꽁이, 개구리 등을 볼 수 있다. 부들과 갈대가 우거지고 그 반대편으로는 무논을 만들어 오리 백로 등 각종 새가 날아든다. 계절별 곤충들도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다.

 

 

안곡습지공원. 환경부장관상을 탄 어린이들의 소중한 자연학습원이다.

 

 

안곡습지공원을 지나 산길로 올라가자. 헬기장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영천사, 오른쪽으로는 만경사 방향이다. 영천사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지만 조망이 좋다. 일산 신도시와 멀리 한강이나 인천 계양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영천사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절이 나온다. 조선 중기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명종 4)1615(광해군 7)) 선생이 가문의 원당(願堂)으로 세운 절이다. 홍이상은 광해군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인물로 고양팔현(高陽八賢) 중 한 분이다. 절 밑 성석로 옆에는 홍의상의 묘와 신도비(고양시 향토유적 제13)가 있다.

 

 

2. 화려했으나 뿌리가 깊지 못했던 장희빈 친정의 묘역

 

 

누리길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장희빈 친정 묘역을 둘러보자. 만경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최수원 장군 묘가 나온다. 장군은 천연기념물 제60호 덕이동 백송을 처음 심은 이로 전해온다. 장군 묘역 위 등산로를 따라가면 장희빈 친정 묘역이 나온다. 묘역 입구에는 커다란 거북이 모양 받침돌인 귀부에 올려진 당당한 신도비가 보인다. 바로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경의 신도비이다.

 

 

장경 신도비. 멀리 뒤에 보이는 곡장을 두른 무덤이 장희빈 부모 묘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도비는 1691(숙종 17)에 세웠고, 무덤의 문인석 등 석물은 1689(숙종 15)에 세웠다. 모두 300년이 지났는데도 요즘 새로 만든 것처럼 깨끗하다.

 

장희빈은 예전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금도 요녀(妖女)의 이미지가 강하다. 심지어 어머니가 노비였다는 등의 악의적인 기록이 버젓이 유통된다. 물론 이런 기록이 잘못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장희빈의 가계도를 보자.

 

 

<장희빈 가계도>

 

장희빈의 외삼촌은 당시 재벌급 상인인 육의전 주인이다. 장희빈의 진외가 아저씨뻘인 변승업은 당대 한양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변 부자의 실제 모델이라고 전해온다. 장희빈의 후원자인 역관 장현은 조선왕조실록국중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장희빈 가문도 그렇고 외갓집도 그렇고 모두 재벌급 부를 누리던 집안이다. 그런 가문이 노비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3. 승자총통을 만든 김지 장군 묘

 

 

만경사에서 수연약수를 지나 장사바위 갈림길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왼쪽 경사로로 굽어지는 즈음 오른쪽에 옛 무덤이 나온다. 비석이 있는 무덤이 김지(金墀) 장군의 무덤이다. 장군은 1578(선조 11)까지 경상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를 지냈는데, 이때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발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인 1783(선조 16) 함경도에 여진족이 대거 침범하였다. 이를 니탕개의 난이라 한다. 이때 승자총통은 난을 진압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승자총통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선조 임금은 장군에게 증직(贈職, 죽은 뒤에 벼슬을 높이는 것)을 명하고 또 그의 아들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지 장군 묘. 조선군의 중요한 화약무기 승자총통을 발명한 이다. 위는 아들 김여강 장군 묘이다.(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763-2)

 

 

1579(선조 12)에 제작된 승자총통. 보물 제648호다.

 

 

김지 장군 묘 위로 비석 없는 무덤이 하나 있다. 장군의 아들 김여강 장군 묘이다. 김여강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15925월 임진강 방어 전투에 참전하여 분투하다 순절하였다. 시신을 찾지 못해 의관으로 묘를 썼다고 한다.

 

 

4. 걷기 좋은 황룡산과 민족상잔의 비극 금정굴

 

 

고봉산을 내려와 황룡산을 오르면 금정굴이 나온다. 금정굴은 일제 강점기 때 금광으로 개발되다 버려진 수직 폐광이다. 한국전쟁 시기 19509.28 서울 수복 직후 일산경찰서에서 부역 혐의가 있는 이나 부역자 가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을 적법한 재판절차 없이 금정굴로 끌고 가서 집단총살 후, 수직 갱도 속에 암매장하였다. 희생자는 최소 153명 이상이며 그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정굴에서부터 능선길은 경사가 별로 없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황룡산은 예전에는 학의 날개를 뜻하는 학령산(鶴翎山)’이라고 했다. 깃을 늘어트린 학이나, 구불구불 긴 황룡이나 다 황룡산 형상에 어울리는 것 같다.

 

 

5. 옛 서원(書院)과 천재 시인을 품고 있는 상감천 마을

 

 

황룡산 정상부에 있는 쉼터에서 군부대 오르내리는 길을 지나 골짜기로 내려가면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 ?~1402(태종 2)) 선생을 배향하는 용강서원(龍江書院)이 나온다. 이 서원은 원래 함경남도 영흥군(현 금야군) 용흥강(龍興江)변에 있었다. 한국전쟁 뒤 남북이 완전 분단됨에 따라 박씨 문중과 고양군의 유림에서 모금하는 한편 군과 도의 지원을 받아 1980년 이곳에 다시 지었다.

 

 

용강서원. 함흥차사의 주인공 충민공 박순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태종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고 조선 제3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함흥에 은거하였다. 태종은 이성계가 돌아오도록 함흥으로 차사(差使)를 보냈지만 보내는 대로 죽임을 당하였다. 여기서 어디 가서 소식조차 없는 것을 뜻하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겼다.

 

누구나 차사로 가는 걸 꺼릴 때 박순 선생이 선뜻 나섰다. 이성계는 옛 부하인 박순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부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뒤늦게 허락하였고, 박순은 용흥강가에서 쫓아온 이성계의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옛 부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석주 권필 선생 묘. 비각 뒤에 묘가 있다.

 

 

고봉누리길은 용강서원이 있는 상감천 마을을 나와 고봉로로 향한다. 300m쯤 가면 뜬금없이 권필 선생 묘 설명판이 있다. 이곳에서 황룡산을 바라보면 군부대 옆으로 비각이 있는데, 이곳이 조선 중기의 유명한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鞸, 1569(선조 2)1612(광해군 4)) 선생의 묘이다. 고봉누리길은 권필 묘 입구에서 500m쯤 더 가서 고봉산삼거리에서 고봉산으로 이어진다.

 

 

2020. 11. 24.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