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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普雨) 스님의 시 「등오도산(登悟道山)」에 붙여
무슨 말인가 더 드릴 말이 있어요
- 김 용 택
오늘 아침부터 눈이 내려
당신이 더 보고 싶은 날입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마음은 자꾸 눈처럼 불어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눈송이들은
빈 나뭇가지에 가만히 얹히고
돌멩이 위에 살며시 가 앉고
땅에도 가만가만 가서 내립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가 닿고 싶어요
아침부터 눈이 와
내리는 눈송이들을 따라가 보며
당신이 더 그리운 날
그리움처럼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들을 보며
뭔가, 무슨 말인가 더 정다운 말을
드리고 싶은데
자꾸 불어나는 눈 때문에
그 말이 자꾸 막힙니다
눈 오는 날 그리운 추억이 있었나요. 눈이 오니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아니면 ‘당신’이 그리워지는 것이 눈이 오면 당신에게 달려갈 수 없어서일까요. 추억 때문일까요. 물리적인 단절 때문일까요. 눈이 내리면 내릴수록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은 자꾸만 불어납니다. 내가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은 나뭇가지 위에도, 돌멩이 위에도 땅 위에도 자기 맘대로 가서 앉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 닿을 수 없어도 눈처럼 쌓이는 ‘당신’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더욱더 더욱더 정다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어나는 눈처럼 그리움이 사무치니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따뜻한 봄날을 참 좋아합니다. 그건 아마 스무 살 무렵 겨울에 닥친 모진 시련 때문에 생긴 겨울에 대한 트라우마의 반작용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봄날이면 들과 산에서 꽃들을 꺾어와 누나와 함께 꽃병을 만들던 유년의 추억이 깊어서인지도 모르지요.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듯, 희망도 솟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인지도 모르고요. 이번에 한시산책에 인용하고자 봄을 갈구하는 시를 찾으려고 이 시인 저 시인의 시들을 기웃거렸는데, 제 마음에 김용택 시인의 시 「무슨 말인가 더 드릴 말이 있어요」가 딱 와 닿았습니다. 아마도 저한테는 봄에 대한 갈구가 시인의 사랑만큼 컸나봅니다.
오늘 한시산책에서 소개하려고 하는 주인공은 보우(普雨, 1509년(중종 4)∼1565년(명종 20)) 스님입니다. 보우 스님은 참 논란이 많은 스님이죠. 특히 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탄압했던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나 사대부 관료들이 한결같이 그를 요사스러운 승려 요승(妖僧)이라며 적대시했습니다. 보우 스님의 시를 볼까요.
登悟道山(등오도산)
以道名山意欲看(이도명산의욕간)
杖藜終日苦躋攀(장려종일고제반)
行行忽見山眞面(행행홀견산진면)
雲自高飛水自湲(운자고비수자원)
도를 깨친 산에 오르다
도라 이름 지은 산이 보고 싶어
지팡이 짚고 종일 고생하며 올랐네
오르고 오르다 문득 산의 참 모습을 보니
구름은 절로 높이 날고 물은 절로 흐르네
(불교신문 2021. 12. 14.)
이 시는 보우 스님이 도를 깨치고 지은, 이른바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합니다.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님이 번역한 것인데, 저는 이보다 잘 번역할 자신이 없어 학장님 번역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저는 불교의 ‘도(道)’를 잘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저와 관계없이 불교계에서는 보우 스님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은가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스님은 1573년(선조 6) 보우 스님의 문집 『허응당집(虛應堂集)』을 출간하면서 발문(跋文,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과 관련된 사항 등을 짧게 적은 글)을 씁니다. 이 발문을 보면 사명대사가 보우 스님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대사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백세(百世)에 전하지 못하던 법을 얻었다. 지금의 학자들이 대사로 말미암아 나아갈 곳을 얻었고 불도가 마침내 끊어지지 않았다. 대사가 아니었다면 영산(靈山)의 풍류와 소림(少林)의 곡조가 없어질 뻔하였다.”(불교신문 2021. 12. 14.)
惟我大師 生吾東方偏小之域 有得乎百世不傳之緖 而今之學者 賴之而得其所歸 使斯道終不滅絕 微斯人 靈嶽風流少林曲子 幾乎息而無聞矣
문집의 발문이니 의례 과장되게 칭송의 말을 썼을 거라고 지례짐작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존경심을 갖지 않고는 발문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물을 터무니없이 높이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에 꼭 맞게 칭송하는 것을 가장 그분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예도 있지만, 적어도 학식 높은 도학자(道學者)나 고승(高僧)들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대사의 저 발문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우 스님의 시 중 참 좋아하는 시는 다음의 시입니다.
春山卽事(춘산즉사)
春到還多事(춘도환다사)
人應不自閑(인응불자한)
求齋僧下市(구재승하시)
尋友客來山(심우객래산)
茗得風柔嫩(명득풍유눈)
禽因日暖𠴨(금인일난관)
惟吾緣病瀨(유오연병뢰)
無計動禪關(무계동선관)
봄날 산에서
봄이 오니 또 다시 일이 많아져
사람들은 모두 한가롭지 못하네
스님은 재 올리려 마을로 내려가고
나그네는 벗을 찾아 산을 오르네
차나무는 봄바람에 싹을 틔우고
새들은 따뜻한 햇살에 지저귀네
오직 나만은 어리석은 집착으로
이 선방을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시는 참으로 평이해서, 읽으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집니다. 평이하다고 낮은 경지라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평이하기 때문에 이 시가 좋습니다. 도(道)가 어떻고, 성인(聖人)이 어떻고 그런 얘기 하나도 없어서 좋습니다.
이 시를 보면 봄날 모습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사람들은 봄을 맞아 분주합니다. 차나무는 봄바람에 막 햇잎을 틔우고, 새들은 따뜻한 봄날에 교미기를 맞아 목청을 한껏 올립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만은 어리석은 집착에 매어 자연과 하나 되지 못합니다. 물론 ‘나’는 보우 스님 자신이 아니라 선방(禪房)에서만 도(道)를 찾으려는 스님들을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미연(尾聯) 제7구 ‘유오연병뢰(惟吾緣病瀨)’에 대한 제 번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려워 한 부분은 ‘병(病)’입니다. 육신의 병일 수도 있고 마음의 병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육신의 병으로 번역하는데, 저는 마음의 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육신의 ‘병(病)’은 마음의 어리석고 미련한 ‘치(痴)’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 여기므로 ‘오직 나만은 어리석은 집착으로’라고 번역해 보았습니다.
보우 스님은 조선 제13대 임금 명종(明宗, 재위 1545년~1567년) 때 문정대비(文定大妃, 1501년(연산군 7)~1565년(명종 20))의 강력한 후원으로 불교 중흥을 위해 힘썼던 분입니다. 1551년(명종 6) 5월 문정대비에 의해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고, 보우스님은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로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승려 도첩을 주는 도승시(度僧試)가 실시되었고, 1552년(명종 7) 4월에는 승려 과거시험인 승과가 다시 열렸습니다. 이때 승과에 급제한 이들 중에 훗날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서산대사 휴정(休政,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37)) 스님이나, 사명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있습니다.
보우 스님이 불교 중흥에 힘을 쓰면 쓸수록 사대부 관료들과 유생(儒生)들의 저항은 커져만 갔습니다. 마침내 1565년(명종 10) 4월 문정대비가 죽자 보우 스님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그 해 8월 율곡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선생이 보우 스님을 죽여야 한다며, 만약 죽이지 못한다면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고 주장하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이름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 상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 마침내 보우 스님은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제주목사는 변협(邊協, 1528년(중종 23)~1590년(선조 23))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보우 스님에게 제주 무뢰배들로 하여금 매일같이 주먹질을 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매를 못 이기고 보우 스님은 입적(入寂, 고승의 죽음)합니다. 입적하기 전에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臨終偈(임종게)
幻人來入幻人鄕(환인래입환인향)
五十餘年作戲狂(오심여년작희광)
弄盡人間榮辱事(농진인간영욕사)
脫僧傀儡上蒼蒼(탈승괴뢰상창창)
임종게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로 들어와
오십년 넘도록 미친 짓 하였구나
인간 영욕의 일을 다 희롱하고서
중의 탈 벗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노라
임종게(臨終偈)는 고승이나 선승이 죽음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이나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열반송(涅槃頌)이라고도 합니다. 당대의 최고 지성인 보우 스님은 무뢰배의 주먹질에 스러져갔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살해입니다. 그럼에도 보우 스님의 임종게는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살았으면 되었지 그 결과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닙니다.
보우 스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결정타를 날린 이이 선생은 젊었을 때 스님이 되려고 금강산에 입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쓴 그의 시 한편을 보겠습니다.
贈楓岳小庵老僧(증풍악소암노승)
鳶飛魚躍上下同(연비어약상하동)
這般非色亦非空(저반비색역비공)
等閑一笑看身世(등한일소간신세)
獨立斜陽萬木中(독립사양만목중)
풍악산 소암 노 스님에게 드림
솔개 날고 물고기 뛰기는 마찬가지니
이것은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라네
무심히 한번 웃고 이내 몸 살피니
해 지는 깊은 숲 속 홀로 서있네
이 시를 보면 율곡 이이 선생 또한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보우 스님을 죽음으로 내 모는 상소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립니다. 이 상소 중에 이이 선생이 보우 스님의 죄상을 논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보우에게 털끝만치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우가 제 뜻을 마음대로 행한 지가 지금 몇 해입니다. 널리 죄와 복을 베풀어 임금을 속였으며, 궁내의 재정을 고갈시켜 백성들에게 환란을 끼쳤으며, 교만하고 뽐내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여 자신을 높여 사치하고 참람하니,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殿下信以普雨爲無一毫之罪乎 普雨之得行其志 今幾年矣 廣張罪福 欺罔君上 罄竭內帑 貽患生民 驕矜自聖 奉己奢僭 有一於此 罪當罔赦
열거된 죄상 중에 죽여야만 할 죄상이 있나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죽여야만 할 죄가 있다면 성리학 유일사상을 위태롭게 한 사상보안법(?)을 위반한 죄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는 거듭 얘기하지만 사상의 자유가 없으면 인간의 창의성 또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의성이 위축되면 사회의 활력도 위축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기 이전에 사회의 안위를 위해서도 사상의 자유는 확대되어야 합니다. 성리학 유일사상을 고집한 조선은 사상의 자유를 확대하고 권력을 나누는 국가가 중심 국가가 되었던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끝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흐름은 어떤가요. 사람을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흐름으로 가고 있나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물질이 인간보다 더 존중받는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더욱 팽배하고 있으며, 개인의 노골적인 욕망을 거르지 않고 표출합니다. 정치는 이를 조화시키기 보다는 목소리가 큰 쪽으로 왔다갔다 비틀거립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야겠지요. 끝내 열매 맺지 못하더라도 오늘은 꽃을 피워야겠지요. 빛나지 않아도 오늘도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아 최백호의 노래 「그쟈」를 드리며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그쟈
- 최백호
봄날이 오며는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꽃잎이 피면은 뭐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래도 우리 맘이 하나가 되어
암만 날이 가도 변하지 않으면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타 그쟈
우리는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그래도 우리 맘이 하나가 되어
암만 날이 가도 변하지 않으면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타 그쟈
우리는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2022. 01. 11.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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