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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진의 「호동거실(衚衕居室, 골목집)」에 붙여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미래사, 2016)

 

 

이 시는 지은이가 윤동주 선생인 줄 모르고 읽는다면 아마도 요즘 시인의 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윤동주 선생은 당신이 살던 시대상을 그렸겠지만, 우리 시대에 대입해도 충분히 공감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여전히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돌담을 더듬어 길을 찾지만, 찾을 수 없기에 눈물이 날만큼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득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절망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을 믿지도 않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부르주아라는 화신을 가진 악마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지극히 대담했으며 다감했다. 우리의 젊음을 욕되게 하지 않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도 끝이 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기력한 세계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런 세계에 대항하던 우리의 젊은이다운 활력은 이미 고갈되었으며, 다른 시대에도 그랬듯이 절대적인 신념은 정치로 썩어 들어갔고, 관객들은 뻔해진 싸움의 결말에 박수를 보냈다.”

 

68세대 프랑스 작가 올리비에 롤랭의 소설 수단항구에 나오는 독백입니다. 어쩌면 586 정치인들이 판치는 정치판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지금도 사회 진보의 이념을 간직한 이들의 심정도 이렇지 않을까요. 586 정치인들은 사회적 대의를 임의로 대표하고, 사회적 공통의 이익을 사적으로 전유하면서 권력을 차지해온 친일파로부터 이어온 고색창연한(?) 전통에 투항하였으면서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고 부끄러움이 가시는 건 아닙니다. 이런 현실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고통은 약자로부터 옵니다. 전체의 절반에 달하는 OECD 최고 빈곤율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그렇고, 일자리도, 주거도, 결혼도, 미래도 찾을 수 없는 젊은 세대가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합니까.

 

 

기댈 곳 없는 가난한 노인들, 길을 잃은 진보주의자들, 내몰리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빠저 나올 어떤 방법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일까요? 더듬더듬 찾아보면 저렇듯 찾는 곳이 나올까요?

 

오늘은 조선시대 후기 신분제의 한계 속에서 끝없이 길을 찾다 끝내 요절한 천재 시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바로 별처럼 반짝 떠올랐다가 별똥별처럼 갑작스레 스러져간 이언진(李彦瑱, 1740(영조 16)~1766(영조 42))입니다.

 

 

衚衕居室(호동거실) 2

 

一虞裳一蟹蕩(일우상일해탕)

我友我不友人(아우아불우인)

詞客供奉同姓(사객공봉동성)

畫師摩詰後身(화사마힐후신)

 

골목집 2

 

우상이라 하고 해탕이라고도 하지

나는 나를 벗하지 남을 벗하지 않네

글 잘하는 이백과 동성(同姓)이요

그림 잘하는 왕유의 후신이라네

 

 

이 시는 남아 있는 것만 해도 170수에 이르는 이언진의 연작시 호동거실(衚衕居室)중 두 번째 시입니다. 참고로 호동(衚衕)’은 골목을 뜻합니다. 서민들의 작은 집들이 꽉 차 있는 골목길 말입니다. ‘호동거실(衚衕居室)’은 그런 골목에 있는 집을 뜻합니다. 시의 제목부터가 서민지향적입니다.

 

우상(虞裳)은 이언진의 자()이고, 해탕(蟹蕩)은 호입니다. 공봉(供奉)은 이백(李白, 701~762)을 일컫습니다. 이백이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벼슬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힐(摩詰)은 한유(韓愈, 768~824)의 호()입니다. 한유는 시와 문장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합니다. 이언진은 동시대에 벗할 이가 없고 시대를 초월해 시와 문장으로는 이백과 같고, 그림으로는 한유와 같은 이와 벗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자부하였습니다.

 

이언진은 1740(영조 16) 역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자신도 20세에 역관이 되었습니다. 중국을 두 번 다녀오고 종6품 사역원(司譯院) 주부(主簿)까지 승진하였으나 국내에 별로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야말로 24세, 25세가 되던 1763(영조 39)~1764(영조 40) 통신사 일행으로 발탁되어 약 11개월 일본에 다녀오면서 벼락 스타가 됩니다.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조선국통신사행렬도(朝鮮國通信使行列圖) : 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 제4차 통신사 일행이 일본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입니다. 이언진은 통신사 일행 중 일본에 줄 국가 선물을 관리하는 압물판사(押物判事)로 1763년(영조 39)~1764년(영조 40) 약 11개월 동안 일본에 다녀왔습니다.(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조선은 노론(老論)이 거의 일당독재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미 죽었지만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은 여전히 노론당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송시열은 성리학(性理學)을 완성한 주자(朱子)의 이론을 한 자도 바꿀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주자의 이론이 완전무결하므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공격했습니다. 조선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을 해치는 범죄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반역죄로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아 공격한 우리 현대사 모습처럼 사회나 사상적으로 경직되고 교조화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당시 일본에서는 성리학을 불교화 된 유학(儒學)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언진의 스승은 남인 대학자이며,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대문장가인 이용휴(李用休,1708(숙종 34)~1782(정조 6)입니다. 이분은 성리학을 넘어서 양명학(陽明學)을 했던 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좌파인 이탁오(李卓吾, 1527~1602)를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이탁오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공자도 절대화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더욱이 유학뿐만 아니라 도교나 불교를 인정하는 등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습니다. 이언진은 타고난 자유로운 기질에 스승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리학에 질린 일본 학자들과 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정연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으며 시와 문장이 뛰어났기에 신분에 대한 편견이 없는 일본 학자들로부터 최고의 학자 대우를 받았습니다.

 

가문독재인 세도정치를 열기도 한 김조순(金祖淳, 1765(영조 41)~1832(순조 32))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이언진을 골탕 먹이려고 부채 500개를 가져와 시를 청했다고 합니다. 일필휘지로 500개의 부채에 500개의 시를 써주니 이번에는 다시 부채 500개를 가져와 이언진의 기억력을 보고 싶다며 앞서 쓴 500개의 시를 다시 써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이번에도 외우면서 써내려 가는데 마치 보고 베끼듯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과장되었겠지만 이언진의 명성이 일본을 진동시킨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언진의 시집은 지금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를 다녀오는 동안 오오사카(大阪)에서 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은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기도 전에 한양에 전해져 이언진의 시는 한양에서도 주목받게 됩니다.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중 「대판성관소남망(大阪城館所南望, 숙소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입니다. 1748년 10차 무진년 통신사행의 부산에서 에도에 이르는 전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당시 오오사카(大阪)는 상공업의 발전이 눈부셨다고 합니다. 이언진이 이곳까지 필담으로 주고받은 시(詩)가 에도(江戶, 도쿄)에 다녀오는 사이 출판되었다고 합니다.(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硯滴銘(연적명)

 

滿腹非水非墨(만복비수비묵)

先生十年血淚(선생십년혈루)

一淚復成一珠(일루복성일주)

只堪奉獻知己(지감봉헌지기)

 

연적에 새기다

 

배속 가득 물도 먹도 아닌 건

선생의 십년 쌓인 피눈물이지

한 방울 눈물 한 개 구슬 되니

오직 알아주는 이에게 바치리라

 

 

이언진은 자신의 글을 구혈초(嘔血草)’ 피를 토한 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글 하나하나에 얼마만큼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마치 획 하나하나에 영혼을 실어 그림을 그린 고흐가 연상됩니다. 이에 대하여 이언진이 자신을 알아주는 이(知己)’로 여겼던 유일한 이이면서 스승인 이용휴의 평을 보겠습니다.

 

“이군(李君)은 뛰어난 지식과 오묘한 생각으로 먹(墨)을 금(金)같이 아끼고 글귀 다듬기를 단약(丹藥)같이 하여 종이에 붓을 대기만 하면 전(傳)할만한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알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남에게 이기기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이겨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나에게만 보여주고는 도리어 상자에 넣어 둘 뿐이었다.”

 

남인 명문가 출신 이용휴는 중인 제자 이언진을 매우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언진의 재능을 묻자, 이용휴는 문득 손바닥으로 벽을 만지면서, “벽을 어떻게 걷거나 건널 수 있겠는가? 이언진은 벽과 같다.”고 했답니다. 아마도 신분의 벽을 넘어 중인 제자를 이렇게 극찬한 것은 만민을 평등하게 대해여야 한다는 이탁오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적 바탕으로 삼아서였을 것입니다. 거꾸로 만인은 평등하다는 생각, 따뜻한 마음이 이미 있었기에 그런 사상을 받아들였겠지만 말입니다.

 

 

衚衕居室(호동거실) 33

 

詩不套畫不格(시불투화불격)

翻窠臼脫蹊徑(번과구탈혜경)

不行前聖行處(불행전성행처)

方做後來眞聖(방주후래진성)

 

골목집 33

 

시와 그림은 틀에 매이면 안 되지

격식을 버리고 관행을 벗어나야지

옛 성인이 간 곳을 가지 말아야

바로 후대의 진짜 성인이 되리니

 

 

이언진은 시나 그림을 교본을 통해 배우되 따라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성인의 길도 배워야 하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옛날과 다른 길로 가야 지금의 성인의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이언진의 예술 이론을 집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사상을 바탕으로 탄생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집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교조화된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론 주류의 성리학 독재에 대하여 결연히 반대합니다. 실제로 이언진은 불교에 경도되긴 하였지만 사상적으로 유불선(儒彿仙)을 편견 없이 대했던 것 같습니다.

 

 

衚衕居室(호동거실) 31

 

人情百煖百寒(인정백난백한)

身世多苦多惱(신세다고다뇌)

尊客前爲鮑老(존객전위포로)

假頭面假啼哭(가두면가제곡)

 

골목집 31

 

사람들 인심은 이랬다저랬다 하고

이내 신세는 고통과 번민이 많네

높은 사람 앞에선 못난이 배우 되어

가면 쓰고 웃는 척, 우는 척하네

 

 

이언진의 신분은 중인이고 직업은 역관입니다. 6품이라고 하나 한낮 잡직 서리에 불과합니다. 어디를 가나 사대부 관료들의 비위를 맞춰야 합니다. 뜻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이언진으로는 참으로 참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시를 보는 저도 가슴이 저립니다. 지금도 뛰어난 인재들이 돈 있는 자들 앞에서 연극을 해야 합니다. 알량한 월급을 위해서요. 이언진은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농촌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시에 나오는 포로(鮑老)’는 고대 연극에 나오는 못난이 배역의 이름이랍니다.

 

 

衚衕居室(호동거실) 30

 

時來三台八座(시래삼태팔좌)

管甚才也命也(관심재야명야)

道在行商市儈(도재행상시쾌)

任他譽者毁者(임타예자훼자)

 

골목집 30

 

운때 맞아 정승 판서지

어떤 재주 어떤 운명인가

거리의 상인과 거간꾼은

칭찬이나 비난 관심 없네

 

 

시래(時來)’운도시래(運到時來)’의 약자입니다. 무슨 일을 이룰 운수(運數)와 시기(時期)가 한꺼번에 오는 것을 일컫습니다. ‘삼태팔좌(三台八座)’는 고대 벼슬 이름입니다. ‘삼태(三台)’는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세 벼슬을 가리키며, ‘팔좌(八座)’는 육조의 상서 및 일령, 일복야를 통틀어 이르던 말입니다. 조선식으로 말하면 정승 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재능보다 문벌가문에 의해 독점되는 벼슬 구조에 대한 야유와 서민들의 솔직하고 건강한 삶의 태도를 그렸습니다. 정승 판서야 가문 좋아서 된 것 아니냐고요. 그리고 상인이나 거간꾼은 자기 일에 충실할 뿐 남의 평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요.

 

이언진은 자신의 시를 평가해달라고 당대의 대 문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에게 의뢰합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박지원만은 자신의 시를 정당하게 평가할 것이라 기대하면서요. 그러나 박지원의 평가는 야박했습니다. 이언진이 죽은 뒤 미안했던지 박지원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虞裳傳)을 지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거야말로 오(吳)나라의 간드러진 말투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 했더니, 우상이 성을 내며, “시골뜨기가 기분 나쁘게 하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어 줄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

 

박지원은 이언진과 사상적 바탕이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했을 겁니다. 유학(儒學)에서는 덕()과 재능()을 모두 중요시 하는데, 덕을 더 근본적으로 바라봅니다. 덕은 마음의 그릇이기 때문에 덕이 적으면 재능을 담을 수 없고, 그릇보다 재능이 넘치면 세상을 해치는 자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까지는 이언진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릇을 무엇으로 평가하느냐에서 서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노론 명문가의 자제인 박지원에게는 그릇은 당연히 형이상학인 성리학의 심학(心學)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이언진은 그런 교조적인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자고 했고요.

 

 

조릿대가 적군처럼 사방에서 몰려와 고산에 사는 키 작은 식물들을 뒤덮여 죽이고 있습니다. 고산 식물들은 물이 흐르는 개울 너덜겅 위에서 고립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고립된 채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보이는 게 요즘 우리나라 젊은 세대를 보는 것 같아 안스럽기만 합니다. 부디 저기만이라도 오래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박지원의 그런 답변을 듣고 이언진은 불과 몇 달 뒤에 죽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7세였습니다. 물론 원래부터 병약했었던데다 일본 사행길에서 얻은 병으로 돌아와서 내내 병마에 시달리기는 했었습니다. 이언진이 죽고 나서 스승 이용휴는 이언진에 대한 만가(輓歌) 10수를 짓습니다. 그 첫 번째 시를 보겠습니다.

 

 

輓歌(만가)

 

五色非常鳥(오색비상조)

偶集屋之脊(우집옥지척)

衆人爭來看(중인쟁래간)

驚起忽無跡(경기홀무적)

 

애도의 노래

 

오색무늬 빛나는 비범한 새가

우연히 지붕 용마루에 날아왔네

사람들 다투어 찾아와 바라보니

문득 놀라 날아가서 자취가 없네

 

 

시는 이해하는데 하나도 어려운 데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도 아끼는 재능 있는 제자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애도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기엔 반전이 있습니다. 이 시는 사실 제자 이언진에게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아끼고, 사랑했고, 존경했음을 스승은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이언진의 시를 보겠습니다.

 

 

衚衕居室(호동거실) 129

 

在鳥獸爲翬尾(재조수위휘미)

金漸綠紫漸靑(금점록자점청)

除是野烏一種(제시야조일종)

黑色萬羣同形(흑색만군동형)

 

내가 새였다면 꿩이 되었겠지

금빛에 녹색, 보라에 청색까지

들새들 중 꿩 하나를 빼면

천편일률 검은색 일색일 뿐

 

휘미(翬尾)는 휘적(翬翟) 즉 꿩을 말합니다. 꿩의 흰 바탕에 5색의 무늬가 있는 것이 휘()이고, 산꿩[山雉]의 꼬리가 긴 것이 적()이라고 합니다. 수꿩인 장끼가 더 화려하기에 휘미(翬尾)라고 하였습니다.

 

이덕무는 이언진의 죽음을 전해들었을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고를 받고 꽃나무 아래를 방황하며 정신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성대중이 보낸 부고를 내가 들고서 슬피 말하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이장길(李長吉)이 죽었다. 아아, 같이 한 시대에 태어나 그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나는 촌스럽구나.” 하였다.’

 

참고로 이장길(李長吉)27세에 요절한 ()나라 대 시인 이하(李賀, 791~817)를 가리킵니다. 이언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저 또한 먹먹합니다. 기댈 곳 없는 가난한 노인들, 길을 잃은 진보주의자들, 내몰리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이언진 시처럼 하나의 거대한 감옥일까요. ‘빠저 나올 어떤 방법도 없는감옥 말입니다. 그래도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우리는 가야 하지 않을까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라도요. 그것이 뭔지 지금은 모르겠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절망 속에서도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황지우의 시를 드립니다. 함께 길을 나서자고 권하면서요.

 

 

나는 너다 40-1

- 황지우

 

이곳을 먼저 다녀간 누군가가

흰 석회 벽에 손톱으로 써놓았다.

날개, 날개가 있다면.

(나는 너다문학과지성사, 2019)

 

 

2021. 6. 10.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