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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讀退陶遺書(독퇴도유서)」에 붙여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신동엽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창작과비평사 1989)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습니다.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을 더듬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그리운 이의 얼굴 닮은 화사한 꽃들이 산과 들에 피어나고, 그리운 이의 노래 닮은 맑은 숨결이 숲속에 살아 날 것이라는 것을요. 지금 보이는 것 없어도, 지금 어찌할 바 모를 지라도 우선 내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언젠가 그리운 이의 모습이 들의 언덕에 피어날 테니까요.
혹독한 식민지 시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열망과 달리 세상은 거꾸로 갑니다.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이들과 외세의 식민지 통치에 앞잡이 되어 겨레를 핍박하며 호의호식했던 친일 모리배들이 힘을 합치고, 나라를 분단시켰습니다. 전 국토가 지옥의 전쟁터가 된 동란(動亂)이 일어납니다. 그 와중에 이승만 정권은 영구집권을 꿈꿉니다. 젊은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젊은 넋들이 스러져 갔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이 모두 그랬듯이 한편으로는 4.19혁명에 환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스러져간 젊은 넋들에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러나 꽃다운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그리운 이들은 갔어도, 그들의 넋은 화사한 꽃이 되고, 맑은 숨결이 되어 겨레의 마음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나올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한시(漢詩)의 주인공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선생입니다. 저에게 선생은 너무나 큰 존재여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소개를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선생의 살아왔던 행적을 읽어보면 외롭게 민주화 운동을 해왔던 선배들, 아니 더 외롭게 독립운동을 해왔던 선조들이 떠오릅니다. 먼저 다산 선생의 시 한 편을 볼까요.
古意(고의)
洌水流不息(열수류불식)
三角高無極(삼각고무극)
河山有遷變(하산유천변)
朋淫破無日(붕음파무일)
一夫作射工(일부작사공)
衆喙遞傳驛(중훼체전역)
詖邪旣得志(피사기득지)
正直安所宅(정직안소택)
孤鸞羽毛弱(고란우모약)
未堪受枳棘(미감수지극)
聊乘一帆風(료승일범풍)
杳杳辭京國(묘묘사경국)
放浪非敢慕(방랑비감모)
濡滯諒無益(유체량무익)
虎豹守天閽(호표수천혼)
何繇達衷臆(하요달충억)
古人有至訓(고인유지훈)
鄕愿德之賊(향원덕지적)
옛 뜻
한강수 흘러흘러 쉬지 않고
삼각산 높아높아 끝이 없는데
산하는 차라리 변할지언정
무리진 못된 것들 깨부실 날이 없네
한 사람이 중상모략을 하면
뭇 입들이 너도 나도 전파하여
편파스러운 말들이 기승을 부리니
정직한 자 어디에 발붙일 것인가
봉황은 원래 깃털이 약해
가시를 이겨낼 재간이 없기에
불어오는 한 가닥 바람을 타고서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리라네
방랑이 좋아서는 아니로되
더 있어야 무익함을 알기 때문이야
대궐문을 호랑이가 지키고 있으니
무슨 수로 이내 충정 아뢰오리
옛 분이 교훈 남기지 않았던가
향원은 덕(德)의 적이라고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 역)
전후 사정을 몰라도 시를 보면 슬픔이 느껴질 겁니다. 상처 입은 봉황이 더 이상 날아오를 힘을 잃은 것 같아 안타까움도 느껴집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벼슬에 나아간 뒤 반대파에 의해 끊임없이 탄핵을 당합니다. 서학(西學) 즉 가톨릭을 믿는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정조 임금의 총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반대파의 시기와 질투가 심해졌습니다. 마침내 1799년(정조 23) 모든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다산 선생은 더 이상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고향 마재로 귀향하려고 했습니다. 다산 선생을 진심으로 아껴서 나중에 재상(宰相)으로 삼으려고 했던 정조 임금은 이듬해인 1800년 갑작스럽게 승하합니다. 더 이상 희망을 잃은 다산 선생은 마침내 마재, 즉 지금의 남양주 능내 고향으로 귀향합니다. 이 시는 아마도 귀향하면서 지은 시가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향원(鄕愿)은 신조와 주견 없이 그때그때 세태에 따라 맞추어서 주위로부터 진실하다는 칭송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의 사이비한 행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을 흐리게 만들므로 공자님은 그를 일러 덕(德)의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산 선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산 선생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거대 여당인 서인(西人)당과 노론(老論)당을 이끌었던 송시열은 성리학을 완성시켰다는 주자(朱子)의 경전 해석을 절대 완벽한 것이라 하여 한 자도 바꿀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리학, 그것도 주자의 성리학 이외에는 어떤 사상도, 이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상보안법이나 다름없습니다. 실제로 주자의 경전 해석에 이의를 달거나 주자와 다른 해석을 하면 학문을 어지럽힌 죄인 즉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간주하여 역적으로 몰아갔고, 실제로 사형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상보안법은 마치 민주화운동을 죄악시하여 무소불위로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던 독재정권의 국가보안법을 연상시킵니다.
시대가 변하면 시대에 맞는, 시대에 필요한 사상과 제도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장자(莊子)에 보면 위나라 대부 거백옥(遽伯玉)은 60세가 될 때까지 60번을 변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끊임없이 고치려 했던 그런 모습 때문에 공자님도 거백옥을 평생 존경했습니다. 개인도 끝없이 변화해야 하거늘 만인이 함께 사는 사회야 오죽하겠습니까. 당연히 끝없이 바뀌어야 합니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새로운 사고, 새로운 사상이 끝없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송시열과 그가 이끌었던 주류세력은 새로운 사고, 새로운 사상의 등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했습니다. 1755년(영조 31) 마침내 임금의 압력에 밀려 소론(小論)당과 소북(小北)당이 송시열 후예들이 이끌던 노론당에 투항하면서 사실상 당쟁(黨爭)은 끝났습니다. 이때부터 사실상 노론당의 일당독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론당의 일당독재는 사상독재이기도 했습니다.
1777년 영조 임금이 승하하고 마침내 개혁군주 정조 임금이 등극합니다. 영조 임금 시절에 남인당은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 고위 관직인 정3품 이상 당상관에는 채제공(蔡濟恭, 1720년(숙종 46)~1799년(정조 23))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실용학문인 실학(實學)이고, 한편으로는 서학(西學) 즉 가톨릭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한 때 서학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남인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서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혁군주 정조 임금은 새로운 기풍을 세우려 합니다. 새로운 기풍은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나오기도 합니다. 채제공을 중용한 정조 임금은 이가환(李家煥, 1742년(영조 18)~1801년(순조 1)), 정약용 등 남인들을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조 임금이 이들을 사랑하고 중용하면 할수록 이들에 대한 비방이 늘어만 갔습니다. 구실이 없어도 이들을 해치고 싶은데 이들이 학습하고, 더러는 신앙으로 믿는 서학은 좋은 구실을 했습니다. 송시열이 만들어 놓은 사상보안법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게다가 서학을 종교로 믿는 일부는 제사조차 거부하였기에 반대파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서학 신자로 몰려 끊임없이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다산 선생은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지만 대단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사회 고발시도 많지만 서정시도 잘 썼습니다. 서정시 한 편을 볼까요.
到舊廬述感(도구려술회)
水閣煙光內(수각연광내)
黃薇晚色深(황미만색심)
田園猶慣眼(전원유관안)
花木舊怡心(화목구이심)
樑燕亦新乳(양연역신유)
林鸎空好音(임앵공호음)
得時堪羨物(득시감선물)
倚杖一悲吟(의장일비음)
옛집에 들러
아지랑이 끼어 있는 강 언덕 집에
백일홍 늦꽃이 짙게 짙게 피어 있네
전원은 아직도 눈에 익은 풍경이고
꽃과 나무 내 마음 즐겁게 하여주네
들보의 제비는 올해도 새끼 낳고
숲속의 꾀꼬리는 속절없이 고운 노래
제철 만난 만물이 부럽기만 하여서
지팡이 짚고 서서 슬퍼 탄식하노매라
(『다산시선』 송재소 역, 창비 2013)
다산 정약용 선생은 34세이던 1795년(정조 19) 병조참의, 동부승지 등 정 3품 당상관 핵심 요직에 있다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종 6품이 맡는 금정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었습니다. 그해 말에 다른 직책을 맡아 서울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한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시는 1796년 음력 4월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꽃과 나무 무성하고 제비와 꾀꼬리는 제철을 만나 새끼를 기르고 노래 부르는 등 그려지는 풍경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아름답고 활기찬 자연을 보니 완숙한 경륜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외롭습니다.
讀退陶遺書(독퇴도유서)
閒裏纔看物物忙(한리재간물물망)
就中無計駐年光(취중무계주년광)
半生狼狽荊蓁路(반생랑패형진로)
七尺支離矢石場(칠척지리시석장)
萬動不如還一靜(만동불여환일정)
衆香爭似守孤芳(중향쟁사수고방)
陶山退水知何處(도산퇴수지하처)
緬邈高風起慕長(면면고풍기모장)
퇴계의 문집을 읽으며
한가함 속에 겨우 보니 모든 일이 바쁜데
이 가운데 가는 세월 잡아맬 길이 없네
반평생 가시밭길에 희망 기대 어긋나고
칠척 몸이 싸움터에 갈피를 잡지 못했네
만 가지 움직임이 조용함만 못하고
흔한 향취 따르느니 외론 향기 지킴 나아
도산이며 퇴수는 그 어디에 있는지
아스라이 높은 기풍 끝없이 흠모하네
(한국고전번역원 송기채 역)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선배 학자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 선생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1)~1570년(선조 4)) 선생입니다. 1795년(정조 19)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퇴계 선생의 문집 중 일부를 얻어서 읽었습니다. 매일 매일 읽은 것에다 자기 느낌을 담아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책으로 묶기도 했습니다. 다산 선생은 퇴계 선생의 문집, 특히 당대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서간문(편지)을 읽으면서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문을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가 보이는 것 같은 환호가 보입니다. 이런 다산 선생의 마음이 느껴졌기에 이번 한시산책 주제시(詩)로 이 시를 뽑았습니다.
나중에 제자 정수칠(丁修七)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옛 사람은 말하기를 제 일등이 의리(義理)라고 하였으나 나는 이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땅히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 의리라고 바로잡아야 한다.”(「위반산정수칠증언(爲盤山丁修七贈言)」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산 선생은 ‘의리(義理)’라는 것이 이것저것 있는 중에 그중 나은 어떤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가장 절실한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말합니다. 제가 이번 한시산책의 제목을 「뭇 향기 따르느니 외로운 향기 지키려네」로 잡은 이유가 다산 선생의 신념이 여기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커다란 숲과 같아서 남긴 흔적을 다 둘러보려면 평생 걸려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또 둘러보겠습니다. 이번 한시산책을 준비하면서 다산 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전기를 읽고, 시들을 읽으면서 저는 안타까움 보다는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바꾸어 보려는 노력은 끝내 외롭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글이 제가 받은 위안의 십분의 일도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지만 독자들도 혹시 조금이라도 느낌이 있다면 다산과 관련된 책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는 “낡은 것들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들은 태어나지 않는” 그러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를 한마디로 ‘위기’라고 하지요. 적어도 이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위기라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저는 잘 압니다. 이들에게 신경림 시인의 시로 응원과 위로를 드리면서 한시산책을 마치고자 합니다.
먼 길
(가을 숲에서)
- 신경림
버릴 것은 버리고 줄일 것은 줄이자
아까울 것 없다 자를 것은 자르자
어둡고 먼 길을 떠나야 하니까
다가오는 어둠 끝내 밝지 않으리라
생쥐들 설치는 것쯤 거들떠도 볼 것 없다
불어닥칠 눈보라와 비바람 이겨내자면
겉에 걸친 것 붙은 것 몽땅 떨쳐버려야지
간편한 맨몸으로만 꺾이지도 지치지도 않고
먼 길 끝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다 버리고 가지와 몸통만이 남거든
그래 나서자 젊은 나무들아
오직 맨몸으로 단단한 맨몸으로
외롭고 험한 밤길을 가기 위해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2021년 8월 11일
풀소리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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