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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목련 지던 밤
- 남덕현
그대 비오면 하얀 불이 지고
나는 죽어야 지는 붉은 불이다
어느 최후의 봄날이 오고
다시 돌아와 그대에게 쓰러져
마지막 불을 당기고 가리니
우느냐, 그때에
하얀 불덩이
그깟 최후에도 활활 울겠느냐
(남덕현 시집 『유랑』 - 노마드북스, 2016년)
죽어야 지는 불은 어떤 불일까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소년에게) 노인은 말했다. “인간은 좌절하라고 피조된 존재가 아니야.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 그러나 누구도 인간을 좌절하게 할 수는 없어.”(“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죽음으로 추구하는 걸 멈추게 할 수는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 추구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인간의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술과 문학을 감상할 때 늘 이 기준을 적용해보곤 합니다.
시인은 최후의 봄날이 오더라도, 마지막 불길을 그대에게 당기고 말겠다고 결기를 보입니다. 말이 그렇지 죽음이 삶을 멈추게 하는 순간까지 가슴속에 불꽃을 간직하고 있는 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그 불꽃을 전하려 하는 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년(광해 9)~1680년(숙종 6)) 선생 같은 이가 바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휴 선생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 활약했던 대학자이며 정치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조 때에는 병자호란(1636년, 인조14)으로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맹약했던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습니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청나라의 속국이 된 것이죠.
병자호란이 있던 해에 윤휴 선생은 갓 스무 살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보은 삼산에 피난하고 있었습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은 남한산성의 패배를 목격하고 속리산으로 내려옵니다. 송시열은 윤휴 선생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렇게 해서 둘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만납니다. 송시열로부터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고 둘은 손을 잡고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윤휴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
남한산성 남문.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仁祖) 임금은 이 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병자호란의 항복은 조선 백성, 특히 사대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기에 향후 정치 전개와 사회 이념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사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이른바 ‘북벌(北伐)’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송시열과 북벌을 실질적으로 추진했던 윤휴 선생이 이렇게 만나 북벌을 다짐했습니다. 윤휴 선생의 시 한편을 보겠습니다.
甲寅季夏疏後漫成(갑인계하소후만성)
吾廬東郭隱如壺(오려동곽은여호)
山有喬松水有蒲(산유교송수유포)
獨夜病中成小夢(독야병중성소몽)
乘秋欲繫北單于(승추욕계북선우)
갑인년 유월 상소를 올리고 나서
내가 사는 동곽이 은은하기 병 속 같아
산에는 소나무 있고 물에는 부들 있지
병중에 홀로 자며 꿈을 하나 꾸었는데
가을 들면 북녘의 오랑캐놈 잡아매야지
제목에 ‘상소를 올리고 나서’라면서 ‘가을이 들면 오랑캐놈 잡아매겠다’고 합니다. 특히 ‘북선우(北單于)’는 청나라 황제를 지칭하는데, 가을에 청나라 황제를 잡아오겠다고 합니다. 자신감이 대단합니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상소를 올린 해인 갑인년은 1674년(현종 15)입니다. 전 해인 1673년에 청나라에서는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평남왕(平南王) 상지신(尙之信)과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이 호응합니다. 중국 남부를 장악하고 있던 한인 출신 세 왕이 반란을 이르킨 것입니다. 이른바 삼번의난(三藩之亂)입니다. 이 소식은 3월 초 조선 조정에도 알려집니다. 윤휴 선생은 평생의 숙원인 북벌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해 6월 윤휴 선생은 북벌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담은 비밀 상소 「대의소(大義疏)」를 올립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한 임금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입니다. 효종은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패배한 다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수도 심양에 끌려가 볼모가 되었던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이 컸었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효종은 송시열을 끌어들어 함께 북벌을 하고자 하였지만, 송시열과 그의 당인 서인(西人)들은 북벌의 명분만 챙기고 실제로는 북벌을 추진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이제 진짜 북벌을 실행하자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백호 윤휴 선생입니다.
삼번의 난이 조선에 알려질 즈음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으면서 시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어떻게 입어야할 지를 두고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났습니다. 차남이지만 왕통(조선에서는 이를 ‘종통(宗統)’이라 부름)을 이은 효종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송시열은 효종이 종통을 이었어도 차남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암튼 그의 논리대로라면 장남인 소현세자의 후손들도 정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아닌 다른 이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효종의 뒤를 이은 제18대 임금 현종은 어려서 등극한데다, 송시열과 서인들의 위세에 눌려있어서 그들의 논리대로 따랐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2차 예송논쟁에서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서인 책임자들을 추방하고 남인을 대거 등용합니다.
그 해 8월 18일 2차 예송논쟁을 정리하고 정권을 바꾸던 현종이 갑자기 승하합니다. 그리고 14세 숙종이 등극합니다. 어린 숙종 앞에는 거대한 서인(西人)당이 있었고, 서인당을 이끄는 68세의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효종도, 아버지 현종도 못마땅해도 송시열을 어떻게 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송시열과 서인 세상이 올 것만 같았습니다.
「전(傳) 윤호전 초상」 윤효전(尹孝全, (1563년(명종 18)~1619년(광해 11))은 윤휴 선생의 부친이다. 예전에는 윤휴 선생의 초상으로 알려졌었는데, 지금은 부친 윤효전의 초상이 아닌가 추측한다. 윤휴 선생의 초상이든 부친의 초상이든 초상화 상단이나 우측 상단에 이름이 있었을 텐데,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후손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조상의 초상이 훼손될까봐 일부러 잘라낸 것이 아닌가 한다. 보물 제1502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숙종은 어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정치의 맥을 정확히 집어 나갑니다. 그리고 윤휴 선생의 출사를 거듭 요청합니다. 사실 효종 임금이나 현종 임금도 여러 차례 윤휴 선생의 출사를 요청했었습니다. 윤휴 선생은 남인 최고의 이론가였습니다. 어쩌면 당대 최고의 이론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윤휴 선생보다 열 살 위입니다. 윤휴 선생이 21세 때 둘은 만나서 3일 동안 학문과 정치를 논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송시열은 ‘우리의 30년 공부가 헛된 것 같다’고 송준길에게 터놓습니다. 그만큼 학문적 깊이가 깊었습니다.
예송논쟁에서도 윤휴 선생은 당연히 남인 최고의 이론가였습니다. 그러나 윤휴 선생은 정권의 장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청나라에 복수하는 북벌이 중요했습니다. 벼슬을 받아들여 조정에 나가는 것의 기준도 자신이 북벌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느냐 여부였습니다. 어린 숙종은 윤휴 선생에게 북벌을 비롯하여 함께 정치를 하자고 힘껏 제안합니다. 이렇게 해서 윤휴 선생은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으로 출사합니다.
조정에 나아간 윤휴 선생은 북벌을 위한 정책을 제안합니다. 정책의 핵심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지 없이는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윤휴 선생은 먼저 군역제도 개혁을 제안합니다.
당시 조선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토지세는 어느 정도 개혁이 되었다고 하지만 군사의무인 군역(軍役)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장정은 군사의무를 지어야 했는데, 베 2필 납부로 이 의무를 대신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군포라고 합니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은 군역을 지지 않는다는데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양반의 숫자는 급증했는데, 양민만 군포를 내야 하니 재정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죽은 자에게 군포를 걷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어린 아이에게 걷는 황구첨정(黃口簽丁), 도망자가 생기면 친척에게 걷는 족징(族徵), 이웃에게 걷는 인징(隣徵) 등 수없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백성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양반이고 평민이고 모두 공평하게 군포를 낸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호패(戶牌)를 지패(紙牌)로 바꾸는 정책을 제안합니다. 호패는 일종의 신분증입니다. 그런데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이 달랐습니다. 고위관료는 상아로 만들고, 그 다음은 동물의 뿔로 만들고, 평민은 나무로 만들고 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통일하여 두꺼운 종이로 호패를 만들어서 신분 평등을 어느 정도 실현하자는 발상이었습니다.
강화도 월곳 돈대. 윤휴는 북벌을 위해 침략할 수 있는 군대 양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서인(西人)과 숙종은 돈대와 산성 같은 방어를 위한 시설을 구축한다. 북벌 보다는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 다음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입니다. 신분 구별 없이 다섯 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하여 그 중에 한 사람을 통수로 뽑아 부역 동원과 세금 납부를 원활하게 하자는 정책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창(社倉) 제도입니다. 사창은 환곡(還穀)과 관련이 있습니다. 환곡은 흉년이 들 때 정부나 지방 행정기관으로부터 쌀을 빌렸다고 추수를 한 다음 갚는 것입니다. 이때 이자로 1/10을 정부가 거두는데, 이를 사창에 모아 마을 기금으로 활용하여 마을을 경제적으로 안정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군사를 총 지휘할 수 있는 도체찰부(都體察府)를 만들어 북벌을 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만들고, 군사를 이끌 수 있는 장수를 선발하기 위해 무과(武科)에 만인과(萬人科)를 두어 전국적으로 상무(常武) 기풍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영의정 자리는 뺐겼으나 당시 실질적으로 여당이었던 송시열과 서인은 아예 북벌의 의지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방편으로 평민과 여자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예(禮)를 사회이념으로 강화시키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물론 명분이 중요하기에 입으로만 북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실질적인 북벌론자 윤휴 선생이 나타났으니 서인 정당의 집권에 큰 장애가 나타났습니다. 더욱이 학문적으로도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고매하니 어떡해서도 꺾어야만 하는 적입니다.
남인이라고 다를까요. 남인 중에서도 서인과 타협하면서 계속 권력 주변에 있던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등 이른바 탁남(濁南) 계열은 서인과 마찬가지로 윤휴 선생의 정책을 가로막습니다.
感遇(감우)
一治復一亂(일치부일란)
久矣天下生(구의천하생)
物化自推盪(물화자추탕)
寒暑惟天行(한서유천행)
達之兼天下(달지겸천하)
窮則殉吾身(궁즉순오신)
聖人無固必(성인무고필)
吾道匪加損(오도비가손)
所以原憲氏(소이원헌씨)
終身閭巷人(종신여항인)
洚水昔懷襄(홍수석회양)
帝堯中朝咨(제요중조자)
分憂有伯禹(분우유백우)
八年乘四載(팔년승사재)
兒啼不到門(아체불도명)
四海皆赤子(사해개적자)
九川旣會同(구천기회동)
蒼生萬邦乂(창생만방예)
皇皇聖哲心(황황성철심)
翼翼承天意(익익승천의)
功成不矜伐(공성불긍벌)
惟日思孜孜(유일사자자)
문득 든 감회
한 번 치세였으면 한 번은 난세가 되고
그 얼마나 되풀이 되어왔던 일이던가
천지조화도 저들끼리 밀고 당겨
추위 더위 자연 번갈아서 오지
뜻 얻으면 천하와 함께 하고
못 얻으면 내 자신 목숨 바칠 뿐
성인은 고집도 기필도 없었으니
나의 길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
그렇기 때문에 고매한 원헌씨도
초야에 묻혀 일생 마쳤었지
홍수가 산과 언덕 집어삼켜
요임금이 조정에서 탄식할 때
그 걱정 백우가 떠맡고서
팔년 동안이나 사재를 타고
자식 낳아 울어도 집에도 안 가고
사해를 모두 자식으로 여겼었지
물이 제각기 강을 따라 흐르고
만방의 창생들이 다 살게 되었지만
항상 부족을 느끼는 성철의 마음은
하늘의 뜻 받들기에 더욱 조심하여
공업 이루고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날이 날마다 부지런히 노력한다네
어리지만 총명하여 기대했던 숙종도 일국의 국왕으로 만족해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숙종도 서인(西人)과 송시열 학맥(學脈)을 넘을 수 없는 큰 장애로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임금 숙종이 서인과 공존과 타협을 선택한 순간 윤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신분제를 타파하고 백성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윤휴 선생은 기득권 서인당(西人黨)에게는 공존할 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윤휴 선생은 반대당인 남인(南人)의 최고 이론가가 아니겠습니까. 최고 이론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면 상대의 정당성도, 후학을 통한 재생 가능성도 함께 없애는 것이니까요.
죽고 사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신념을 세상에 묵묵히 실천할 뿐입니다. 그러다 세상과 부합되지 못하면 죽음이 눈앞에 이르겠지요. 결국 64세의 늙은 대학자이자 경세가 앞에 사약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위의 시는 윤휴 선생의 유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슴 속 불꽃을 지키며 살라고 하는 후학에 대한 다그침이기도 하고요.
1675년(숙종 1) 종2품 대사헌에 제수된 윤휴 선생 교지. 대사헌과 함께 성균관 좨주(祭酒) 벼슬을 함께 받는다. ‘좨주(祭酒)’는 정3품의 명예직이지만 재야학자를 지칭하는 산림(山林)의 대표에게 부여되는 벼슬이다. 그러므로 가장 고매한 학자라는 걸 뜻하기도 한다. (사진 /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덕일)에서 재인용)
지금도 백성을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온갖 감언이설을 하며 세상의 진보를 막고 있습니다. 죽어야 지는 붉은 불이 되고, 나아가 죽어도 불씨를 남기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하는 이 땅의 많은 지사(志士)들을 응원하면서 이성우 시인의 「서시」를 응원가로 바칩니다.
서시
- 이성우
시인이 되기를
꿈꾸지 마라.
너의 삶이
곧
시가 되게 하라.
(이성우 시집 『삶이 시가 되게 하라』 - 도서출판 레디앙, 2015년)
2020년 8월 11일(화)
최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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