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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말 어느 날 통이사(통일을이루는사람들) 단톡방에 상해 임시정부 답사 안내가 떴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6월 말 45일 일정으로 상하이 인근 답사 여행을 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경비 중 50%를 후원한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그래도 습관처럼 신청을 미뤘다. 어느 날 문득 더 미루면 정원이 차 내 차례가 안 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지를 올린 이바다 처장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신청해도 갈 수 있어요?”

물론이죠.”

그럼 신청해줘요.”

 

그 사이 역사기행을 주관하는 서창호 이사는 계속해서 자료를 올렸다. 공교롭게도 바쁜 일들이 겹쳐 자료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 물론 중국에 가서 다 볼 텐데 뭐하는 마음도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입구에서 해설하는 이명필 선생

 

 

 

상해 임시정부 청사 골목

 

 

오후 1시 쯤 푸동공항에 내린 우리는 곧바로 상하이 시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버스는 청사 근처에서 멈췄고, 거리를 조금 걸었다. 청사가 있는 블록은 화려하게 현대화된 다른 곳과 달리 예전 모습을 하고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자주 이용하던 사거리 모퉁이 2층 다방 자리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드디어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소박한 옛날 벽돌건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12위 경제대국의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하니 결코 소박하지 않아 보였다.

 

191931일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된 나라라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토는 이미 일본에 강점되었으므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우리는 가이드를 맡은 이명필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면서 100년 전 선열들의 뜻을 가슴에 새기고자 귀를 쫑긋 세웠다.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 장소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 장소 측벽.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이 탄생했고,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 사람들이 출정했고,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 역사가 개시했다.

 

 

우리는 인근에 있는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 장소를 거쳐 상하이에 새롭고 떠오르는 신천지(新天地) 지구를 둘러본 다음 버스를 타고 유명한 남경로로 갔다. 남경로는 아편전쟁 이후 서구 식민지 세력이 밀려오면서 만들어진 거리다. 지금도 당시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넓은 거리는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에 온 이유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매년 새해에 함께 모여 사업구상도 하고 연회도 열었다는 영안백화점(당시에는 영안호텔)을 보기 위해서였다. 192111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영안백화점 옥상에 올라갈 수 있길 기원하면서 백화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남경로. 멀리 가운데 첨탑이 있는 건물이 영안백화점이다. 차없는 거리에는 평일인데도 인파가 붐볐다.

 

 

남경로 고풍스러운 거리를 지나 황포강가에 있는 와이탄(外灘)거리로 향했다. 와이탄 지역은 옛 영국의 조계(租界)지역이다. 당시에 지은 은행과 호텔 등 석조건물 등이 즐비하다. 서양의 번성했던 옛 거리를 연상시킨다. 이곳은 의열단의 상해황포탄의거가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황포탄의거가 있었던 해관(세관) 건물 앞에서 바라본 와이탄 거리

 

 

의열단은 일본의 육군대신을 지낸 다나카 기이치가 1922328일 상해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는 3.1운동을 유혈진압하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한다면서 조선인 3~4,000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일명 간도참변)의 책임이 있는 자였다. 민족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다. 의열단원들은 서로 나서려고 했다.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거사 실행자로 선발되었다.

거사는 아쉽게 실패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 거사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다른 이에게 알리는 이가 있다면, 그들의 숭고한 뜻을 자신의 가슴 속에 다짐으로 간직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의 거사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의열단을 따라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동방명주타워와 푸동지구

 

 

 

 유람선에서 바라본 와이탄 풍경

 

 

걸어서 황포강을 거슬러 올라가 유람선을 탔다. 와이탄의 고색창연함에 대비되게 건너편 푸동지구는 마천루 신천지 세상이다. 마치 중국의 변화상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자싱에 있는 김구 피난지

 

 

둘째 날은 항저우(杭州)로 갔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더 이상 상하이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저우로 이동한다. 우리는 항저우로 가는 길 중간에 자싱(嘉興)에 들렀다. 상하이를 떠난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약 3년간 피난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에게 일본은 지금 화폐로 약 300억 원에 해당하는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다행히 주푸청(褚輔成) 선생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피난살이를 할 수 있었다. 주푸청 선생은 당대의 석학이며 민족주의자로 부호이기도 했다.

 

 

 

쫒기는 김구 선생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주푸청 선생

 

 

이곳을 중국에서는 김구 피난처라고 하여 복원해놓았다.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나치의 체포를 피해 숨어 있던 안네의 은신처처럼 은밀한 은신처다. 그래도 불안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쪽배를 타고 호수와 강을 맴돌았다. 지금은 호수가 보이는 은신처 창밖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체포의 위협에 쫓기던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범 선생이 밤낮으로 쪽배를 타고 몸을 은신했다. 새로 복원해놓았다.

 

 

 

김구 피난처 창문을 통해 본 호수 풍경.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쫒기는 백범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밖을 바라봤을까.

 

 

김구 피난처를 나와 근처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 숙소를 둘러보고 항저우로 이동했다. 우선 항저우 민속거리로 갔다. 서울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이다. 이곳에 있는 청나라 말기 전설적인 부호이며 풍운아였던 후쉬에옌(胡雪巖, 1823~1885)이 경영하던 약국 경여당(慶餘堂)도 들렀다. 돈을 숭상하는 중국인들은 후쉬에옌을 상인의 신 상신(商神)’으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경여당 안 후쉬에옌 초상

 

 

지금 항저우는 인구 약 1,000만 명의 대도시이다. 세계적인 IT 기업 알리바바의 본사가 있을 정도로 날로 번영하는 곳이다. 그래도 항저우의 최고 전성기는 남송(南宋) 시절이 아닐까 한다. 당시 항저우가 남송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그 시절을 그리워해서일까. 이곳에는 송나라 시절의 성곽과 거리를 재현해놓은 송성(宋城)이라는 테마파크가 있다. 이곳에서는 세계 3대 쇼로 불리는 송성가무쇼가 매일 밤 공연된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가무쇼를 보러 송성으로 갔다.

 

 

 

테마파크 송성

 

 

 

재현한 송성 안 옛거리

 

 

 

 

 

송성가무쇼와 배우. 스케일이 무척 크지만 스토리가 없어서 우리 정서에는 별로 맞지 않는 듯하다.

 

 

 

송성 안에 있는 보호수. 조명을 받은 모습이 멋있어서 찍었다.

 

 

셋째 날 아침을 먹고 항저우 시내 호변촌(湖邊村) 23호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청사(임시정부 청사이므로 항저우가 아니라 항주로 표기함)로 갔다. 항주청사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도움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해청사보다 번듯해 보였다. 물론 전시물과 당시의 상황 설명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아팠지만 말이다. 나라 없이 떠돌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부를 이끌면서 동시에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들이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감히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항주 임시정부 앞에서 기념사진. 중국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마련한 것이라 그런지 상해 임시정부 청사보다 번듯해 보였다.

 

 

 

지난행이(知難行易). 아는 것은 어려워도 행동하기는 쉽다는 뜻이다. 일반인들은 반대로 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뜻이 분명하게 섰다면 판단만이 어려울 뿐이다. 판단이 서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하니 쉬운 것이다. 비록 그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아도 말이다. 중국 혁명가 손문(孫文) 선생이 한 말인데 백범 선생도 참으로 공감했나 보다.

 

 

이어서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사무소가 있던 사흠방(思鑫坊)과 요인들 숙소가 있던 오복리(五福里)를 거쳐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처음 와 임시로 자리 잡았던 군영반점(群英飯店)을 둘러보았다.

 

 

 

한국독립당 사무소가 있던 사흠방

 

 

 

근처 옛 도서를 파는 가게에 전시된 연꽃 그림. 취향에 맞아서 찍었다.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피난왔을 때 처음 자리잡았던 군영반점. 지금도 호텔로 이용되고 있는데 수리중이다.

 

 

점심을 먹고 항저우의 명소 서호(西湖)로 갔다. 중국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삶을 소주에서 태어나 항주에서 살고 광주 음식을 먹다가 유주에서 죽는 것을 친다고 한다. 그만큼 항주가 살기 좋다는 뜻이다. 따뜻한 날씨와 사통팔달하는 수운(水運) 덕에 물자가 풍부해 예부터 부유했던 고장이다. 더욱이 도시 한 편에는 아름다운 서호가 있으니 이보다 살기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서호 풍경. 서호는 큰 호수지만 이런 작은 호수를 여러개 품고 있다.

 

 

수많은 전설이 아로새겨진 서호에는 당연히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찾아들었다. 임시정부 발자취를 찾는 엄숙한 역사기행이지만, 항주에 왔으니 뜨거운 피를 지닌 자 서호를 들르지 않을 수 없다. 들뜬 마음으로 찾은 서호의 첫 인상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공원 같았다. 6.8넓이에 둘레가 15km에 달할 정도로 큰 호수지만, 동시에 조그마한 호수들을 여러 개 끼고 있기도 하다. 잘 가꾸어진 공원과 호수 그리고 정자가 이어진다. 회랑이 있는 어느 정자 옆에서 가이드 이명필 선생이 송()나라의 대 문장가 소동파(蘇東坡)의 시 한수를 돌렸다. 목청 좋은 송병일 선생님이 읽었다.

 

 

 

우리가 소동파의 시를 낭독했던 회랑이 있는 정자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육월이십칠일망호루취서)

 

黑雲飜墨未遮山(흑운번묵미차산)

白雨跳珠亂入船(백우도주난입선)

卷地風來忽吹散(권지풍래홀취산)

望湖樓下水如天(망호루하수여천)

 

서호에서 소동파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옛 사람과 풍류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날의 느낌을 담아 귀국한 다음에 우리말로 옮겨봤다.

 

627일 망호루에서 취해 쓰다

 

검은 구름 피어올라 산을 채 덮기도 전에

소나기 구슬처럼 튀어 뱃전으로 들이치네

땅을 쓸어버릴 듯한 바람에 홀연 훝어지고

망호루 누각 밑 물빛은 다시 파란 하늘빛

 

 

 

서호에서 바라본 뇌봉탑. 그 뒤가 남병산이다.

 

 

서호는 동쪽 시내 쪽만 벌판일 뿐, 서쪽과 남쪽, 북쪽이 모두 산이다. 항주(杭州) 자사(刺史)로 있던 소동파 여름날 짬을 내 망호루에 왔다. 건너편 남병산(南屛山)에서 구름이 일더니 순식간에 소나가가 들이쳐 온 천지를 덮었다. 그러다 바람 한번 휘 불더니 언제 그랬냐 싶게 푸른 하늘이 돌아온다. 시를 번역하면서 나도 소동파가 된 듯 생동감을 느낀다.

 

 

 

서호 풍경. 평일임에도 물놀이 하는 인파가 제법 많다.

 

 

유람선을 타고 서호 한 바퀴를 휘돌아 나왔다. 한 장면 한 장면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감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생략한다. 혹시 항주를 제대로 느껴 보고 싶다면 11월이 최고라니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중국정원 죽소원(竹素園). 서호를 나서는 길목에 있다. 

 

 

서호 유람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 독립지사들이 많이 묻혀 있던 만국공묘로 갔다. 만국공묘는 말 그대로 상해에 있던 모든 나라 사람들의 공동묘지다. 입구에 있는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일으킨 손문(孫文)의 부인이면서 혁명가인 송경령(宋慶齡)의 커다란 기념비와 소박한 무덤을 지났다. 기념비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송경령 석상. 중국 혁명가 손문의 부인이며 혁명가이다.

 

 

 

송경령 기념비. 등소평이 쓴 것으로 보인다.

 

 

애국주의, 민주주의, 국제주의, 공산주의의 위대한 전사 송경령 동지 천추에 길이 빛나라!(愛國主義, 民主主義, 國際主義, 共産主義的 偉大 戰士 宋慶齡 同志 永垂不朽!)”

 

 

 

 

만국공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윤봉길 의사 의거 직전에 백범 선생과 찍은 사진을 프린트한 단체복을 입었다.

 

 

 

독립지사 묘소에 국화 한 송이씩 헌화했다.

 

 

우리 독립지사들이 묻혔던 만국공묘다. 비석돌로 덮인 평장한 조그마한 무덤들이 넓지 않은 공간에 빼곡히 있다. 이미 국내로 이장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전히 이곳에 묻혀 있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한 구절씩 돌아가며 낭독했다. 무덤에는 국화 한 송이씩 헌화했다. 부디 이분들의 꿈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헌(梅軒)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만국공묘를 나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홍구공원으로 갔다. 홍구공원은 중국의 대 문호 루신(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있어서 지금은 루신공원으로 불린다. 10만 평이 넘는 넓은 곳이다. 시간 여유가 없는 우리 일행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주변만 둘러보았다. 도시락 폭탄을 패러디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의사의 삶과 의거,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기념관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흉상. 大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떠나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사의 마지막 다짐이 무겁게 다가온다.

 

 

다음으로는 동방명주타워로 갔다. 엘리베이터 타기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타워에 올라가니 상하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황포강 건너편의 옛 조계(租界) 지역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옛 상하이의 굴욕과 번영을 보여준다면 동방명주타워가 있는 푸동지역의 마천루들은 현 중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동방명주 전망대 유리 바탕 위에서 공중부양 연습

 

 

마지막 만찬. 주최측과 상하이 정형기 사장이 성대한 만찬을 준비했다.

 

 

저녁에는 주최측과 상하이 정형기 사장이 마련한 만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번 역사기행의 소감을 말했다. 참으로 뜻깊은 여행이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고 새기는 시간이었다. 분에 넘치는 환대와 해박한 해설 그리고 따뜻한 가이드 그리고 함께 한 좋은 사람들.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여행이었다.

 

마지막 날 다시 남경로로 갔다. 주최측에서 어렵사리 협상을 해서 영안백화점 옥상을 방문할 수 있었다. 1921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신년하례식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곳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날 그분들을 생각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영안 백화점 옥상에 있는 기운각(綺雲閣). 옛날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은 것을 기념해 우리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영안백화점 그림. 기운각 꼭대기 붉은 홍기는 중국 내전에서 인민해방군이 상해를 점령하기 전에 지하당원이 목숨을 걸고 깃발을 올린 것을 보여준다.

 

 

이번 여행 내내 중국이 부러웠던 것이 하나 있다. 혁명을 성공시켰고, 혁명 과정에서 헌신했던 존경스러운 어른들을 기념하는 모습 말이다. 우리에게도 존경스러운 어른들이 중국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세력화에, 혁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를 뿐이다. 후세에 사표로 삼을 만한 어른들을 많게 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인들의 과제다. 우리시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내내 가졌던 생각은 중국에 대한 기대와 우려다. 14억 인구가 부자가 되기 위해 각자의 지혜를 발휘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에너지는 중국을 번영시킬 힘이다. 반면 엄청난 빈부격차와 폭압체제는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한중일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EU처럼 공동체를 이뤄 함께 공영하는 세상을 꿈꾼다. 부디 중국도 자체 모순을 잘 해결하고,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상하이, 자싱, 항저우 항일유적지 지도를 올린다. 지도는 H&E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 또한 H&E에 있다.

 

2019년 7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