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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열이
개나 고양이, 돼지 등은 한 배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여러 마리 새끼 중 간혹 유난히 작고, 젖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비실거리는 놈이 있다. 이놈을 문열이라 부른다. 제일 작고 비실거리니 뭔가 시원찮은 막내이려니 하지만 실은 제일 먼저 태어난 놈이다. 다른 놈들보다 앞장서서 길(?)을 열며 나오다 보니 힘이 빠져 동생들과의 생존경쟁에서 밀리고, 비실거린다고 한다.
‘…. 정 위원장님은 꿈이 있습니까.’ ‘이제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외롭습니다.’
긴 재담 끝에 정석규 선배가 민주노동당의 정윤광 위원장에게 한 말이다. 말이 끝나고 어수선하던 좌중이 처음으로 잠시 침묵에 빠졌고, 몇 마디 더 오가고는 자리를 파했다. 나도 명치 끝이 묵지근해져 잠시 침묵했고, 한 마디 덧붙였다. ‘석규형 언제 소주나 한 잔 합시다….’ 결혼식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김에 뒷풀이 겸 7-8명이 맥주집에 모인 자리에서였다.
<사진 : 정윤광 위원장, 2014. 2. 24 부산일보>
모두 7-8-90년대 이른바 운동권의 한 복판에 있었고, 혹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려운 한 시절을 공간을 달리해도 모두 함께 겪으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얘기가 나오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이 이어졌다. 몸뚱이 일부가 잘리우면 그것이 곧바로 또 하나의 몸뚱이가 되는 아메바처럼 우리가 함께 했던 시절과 사건은 뻔히 알면서도 끄집어 내면 낼수록 새롭게 살아났다. 요즈음 흔히 그렇듯 깊은 얘기는 슬쩍 슬쩍 스치기만 하고, 예의 정석규 선배의 재담에 섞여 웃음을 이어갔다. 서로 아팠던 기억들도, 예전 같으면 가슴을 후벼팠을 만한 얘기들도 서울의 북부지역에서 주로 모인다고 하여 ‘북부동맹’, 무슨 조직이든 흔들어 놓는다고 하여 ‘알 카에다’ 투의 농담에 섞여 커다란 웃음덩어리에 묻혀갔다. 때로 거친 말투나 화난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여도 실은 모처럼 군대얘기를 곁들인 대포자리를 만난 아저씨들처럼 모두 신이 난듯했다. 특히 정석규 선배가 특유의 달변과 재담으로 전체 자리를 이끌었다.
그러던 선배의 표정과 목소리가 문득 바뀌었다. 깡시골에서 땅 한 마지기 없어 어머니가 먼 장터에 나와 장사를 하면서 학교에 보냈고, 이른바 명문대학에 다니게 되었다고 좋아하였는데, 요즈음 어쩌다 자신의 집에 오시면 마누라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참으로 서럽다고 했다. 외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 위원장에게 묻듯이 이제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녕 서러움일까? 외로움일까? ‘서러움’이나 ‘외로움’이란 한 낱말로 모두를 설명할 수 있을까? 모처럼 신나 들떠있던 사람들 모두를 빨아들여 침묵으로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분노와 절망, 모멸감…? 그렇다면 누구에게?
70년대, 80년대, 90년대 우리가 운동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기꺼이 ‘문열이’이고자 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올리비에 롤랭의 표현처럼 단도직입적이었고, 철학에 따라 행동했으며, 기꺼이 소수가 되었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힘과 자부심을 얻었었다. 그리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었다.
그런데 이제 힘도, 활력도 없고 자부심도 빛이 바랬다. 자랑스러워 하거나 존경할 조직을 하나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당과 신생 소비에트의 존속을 위해 스탈린이 요구하는 대로 제국주의의 스파이임을 인정하고 사형장으로 들어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사고의 메비우스의 띠에 갇혀 끊임없이 회의하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이것이 인민을 위한 길인가? …….’ 자본가들이 민중의 피로 축배를 들면서 돈 놓고 돈 먹기식 파티를 벌이고, 그 파티에 끼지 못해 안달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것을 보면서, 패배했으면서도 인정할 용기조차 없는 패배자의 모습으로,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끊임없이 웅얼거리기만 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다.
2002년 1월 희망을 얘기해야 할 시점에 나는 절망을 얘기한다. 온갖 상처로 그대로 두면 소생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이 마지막 실낱희망이라도 잡고자 정신과 의사와 마주 앉아 치부를 들추어 낼 차례를 고통스럽게 기다리며 고개를 드는 만큼의 용기라도 갖고자 난 오늘 절망을 얘기한다.
<추신>
정석규 형은 58년 개띠에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한 1세대이며, 기꺼이 현장에 투신하였고, 현장 활동 중에 몸에 병까지 얻은 사람이며, 내 알기로는 그 활동을 무기 삼아 제도권을 기웃거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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