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신경림 시집 낙타, 2008 창비)

 

 

가지를 뒤흔들던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악착같이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상처로 남고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뚱이로 남았어도 그것 자체로 향기로운 꽃이고 열매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서러워 말자. 내가 꾸었던 꿈이 적어도 나에게 흔적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내가 꾸었던 꿈을 남들이 잊고 심지어 나도 잊는다 해도 훨훨 바람이 되어 날아보자. 하늘 끝까지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세상을 다 덮을 하얀 은가루 같은 눈이 되어보자.

 

 

 

고목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비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렸을까요. 상처가 뒤틀리고 갈라진 몸뚱이로 남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꽃이고 향기로운 열매 아닐까요.

 

 

세상에 꿈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름다움도 없고, 향기도 없고 아주 무미건조하겠지요.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꿈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할 줄 아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어떻게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것인가 하는 꿈은 영원히 이어질 테니까요.

 

아름다움이 추함의 상대 개념인 만큼 아름다운 세상도 현재의 상대적인 개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세상은 언제가 이루어지는 시점이나 지점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꿈들이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기득권자들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변화를 획책하는 모든 꿈을, 꿈꾸는 이들을 불온시합니다. 때로는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맞서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온갖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에 또 다시 많은 이들이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 합니다.

 

오늘의 한시산책의 주인공은 시대가 용인하지 않는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다 죽임을 당한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 10))입니다. 허균은 우리가 잘 아는 반체제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입니다. 5번의 파직과 3번의 귀양살이를 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입니다.

 

 

봄날의 허균 생가. 허균은 봄날 햇살처럼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마음을 갖고, 변혁을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균은 천재의 두뇌를 타고난 이었습니다. 거기다 노력파였습니다. ()와 문장이 뛰어나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에 자주 차출되었습니다. 1606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종사관이 되어 해박한 지식과 시적(詩的) 재능으로 중국 사신을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공으로 다음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임명되었습니다.

 

삼척은 고향인 강릉과 지척입니다. 더욱이 삼척부사는 아버지 허엽(許曄)과 장인 김효원(金孝元)이 거처 갔으므로 허균에게는 매우 명예로운 벼슬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부임한 지 불과 13일 만에 파직되었습니다. 허균이 불교를 신봉한다는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직 소식을 듣고 오언율시(五言律詩) 2(二首)를 짓습니다. 그중 두 번째 율시를 보겠습니다.

 

 

聞罷官作(문파관작) (2)

 

禮敎寧拘放(예교녕구방)

浮沈只任情(부침지임정)

君須用君法(군수용군법)

吾自達吾生(오자달오생)

親友來相慰((친우래상위)

妻孥意不平(처노의불평)

歡然若有得(환연약유득)

李杜幸齊名(이두행제명)

 

파직 소식을 듣고(2)

 

예의와 교화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나

인생의 부침을 다만 정에 맡길 뿐

그대는 모름지기 그대 법도를 지키게나

나는 다만 스스로 내 인생을 이루겠네

친구들은 찾아와 나를 위로하지만

처자식들은 불평불만만 가득하구나

다행이 소득이 있어 기뻐하는 것은

이백 두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

 

 

허균은 파직당하였지만 주눅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떳떳했기 때문입니다. 주눅들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합니다. 공자님이 가르치신 예()와 교화(敎化)가 어찌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억누르라는 것이겠습니까. 본성과 자유를 조화롭게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은 교조적으로 해석해서 자신들의 틀을 벗어나는 것을 모두 이단이라 배척합니다. 그러니 교조주의자인 그대들은 그대들 법도대로 사시오. 나는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완성해보리다.’라고 허균은 선언합니다.

 

 

반계서당에서 내려다 본 부안 우반동 풍경입니다. 바닷가 가까운 분지 지형인 이곳 우반동에서 허균은 그 유명한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허균은 자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기록을 보면 허균이 지었음이 분명해보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만 보더라도 허균의 사상은 당시 시대에서는 혁명적입니다. 그는 호민론(豪民論)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민중일 뿐이다.(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민중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라고 묻습니다.

 

허균은 신분제도에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시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상층 지배계급은 7%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허균은 그의 유재론(有財論)에서 신분을 초월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합니다.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그런 때문에 옛날의 선철(先哲)들은 더러는 초야(草野)에서도 인재를 구했으며, 더러는 병사(兵士)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더러는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도둑 무리에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했었다. 그렇게 하여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기에 적당하였고, 임용당한 사람들도 각자가 지닌 재능을 펼쳤었다.

 

인간 허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심성을 엿보기 위해 반대 당파지만 동갑내기 절친한 벗 석주(石洲) 권필(權韠)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 빛은 한창 푸르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이 반쯤 피었고 녹음은 푸른 일산에 은은히 비치는데 이 가운데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곧 와서 맛보시기 바라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네.

 

어떤가요? 정이 넘치고 풍류가 넘치지요. 저는 누누이 말하지만 따뜻한 심성을 가지지 않으면 혁명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뜻한 심성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혁명을 외치고,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을 해치고 혁명을 해치기 때문에 혁명의 적()일 뿐 혁명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균의 민중지향적인 성향은 일상에서도 드러납니다. 실제 과거를 볼 수 없는 서자(庶子)들과도 허물없이 지냈습니다. 그에게 시()를 가르쳐 준 스승 손곡(蓀谷) 이달(李達)도 서자였습니다. 스님들과도 자주 어울렸고,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파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부친 허엽(許曄)이나 형 허봉(許篈)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산대사나 사명대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두 스님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사명집(四溟集)의 서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허균은 음식비평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食色性也)’라고 선언합니다. 지금은 지극히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당시로는 파격을 넘어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첫 번째 파직을 당한 것도 황해도(黃海道) 도사(都事) 벼슬을 할 때 한양에서 기생을 데리고 가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생과의 만남을, 심지어 잠자리까지 기록할 만큼 평생 자유분방하게 기생들과 사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외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부안의 기생 매창(1573(선조 6)~1610(광해 2))과의 만남입니다.

 

 

부안 매창공원에 있는 매창의 묘. 매창은 유희경을 평생 연인으로 여겼지만, 매창을 진심으로 사랑한 이는 허균인 것 같습니다.(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매창은 계랑(桂娘), 계생(桂生)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매창이 죽었을 때 허균은 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며(哀桂娘)란 애도시(哀悼詩)를 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계생(桂生)은 시에 능하고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절개가 있어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그 중 첫 번째 시를 보겠습니다.

 

 

哀桂娘(애계랑)

 

妙句堪擒錦(묘구감금금)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偸桃來下界(투도래하계)

竊藥去人群(절약거인군)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明年小桃發(명년소도발)

誰過薜濤墳(수과설도분)

 

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글귀는 고은 비단 펼치는 듯하고

청아한 노래는 머문 구름 흘러가게 하였지

복숭아 훔쳐 인간 세상 귀양 왔다가

선약을 몰래 먹고 세속을 떠나누나

부용꽃 휘장에는 등빛 여전히 비치고

청푸른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았는데

내년 봄 복사꽃 가득가득 피어날 때

누가 있어 설도의 무덤 찾아오려나

 

 

허균의 절친한 벗 권필(權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贈天香女伴(증천향여반, 여자 도반 천향에게)란 애도시를 씁니다. 천향(天香)은 매창의 자()입니다. 매창을 허균의 벗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별호나 이름이 아니라 자를 썼습니다. 양반들은 서자들의 자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인인 기생의 자를 쓰는 것은 매우 드믄 일입니다.

 

남녀관계를 하지 않은 것은 매창이 유희경(劉希慶)의 연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허균은 매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벗으로 대한 것 같습니다. 물론 미련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요. 매창이 죽기 1년 전 가을 허균은 매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거요.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소.

 

 

봉래구곡의 옥녀담. 1606년 허균과 매창은 부안현감 심광세와 함께 이곳에 유람온 적이 있었습니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 중 봉래산(蓬萊山)은 금강산이 아니라 이곳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허균은 46세가 되던 1614(광해 6) 가을부터 48세가 된 16161월까지 두 차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 외교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합니다. 그 공로로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49세가 되던 161712월에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오릅니다. 이제는 벼슬살이도 순탄해진 것 같습니다. 이대로 몇 년 지나면 정승 반열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허균의 운명을 가르는 비밀상소가 조정에 들어옵니다. 바로 허균의 제자이기도 한 예조 좌랑 기준격(奇俊格)이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한 것입니다.

 

기준격은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아들입니다. 기자헌이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서 귀양가는 처지라 아버지를 구원하려 했는지 몰라도 기준격은 스승 허균이 이미 8~9년 전에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합니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진사 곽영의 상소처럼 기준격은 허균의 역모가 사실이라도 역모를 알고도 고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모죄에 걸립니다. 반대로 허균의 역모가 사실이 아니면 반좌율(反坐律, 거짓으로 고변하면 고변한 죄목으로 벌을 받는 법)로 역모죄에 걸립니다. 이러나저러나 역모죄에 걸릴 일을 왜 했을까요. 역사의 미스터리입니다.

 

허균은 5200자가 넘는 장문의 해명 상소를 올립니다. 기준격의 상소와 허균의 반대상소를 보면 허균이 죽을죄를 지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욱이 조선은 대신에게는 사형을 잘 내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특히 목을 쳐서 죽이는 사형은 더더욱 잘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묘하게 흘러갑니다. 사형 판결문인 결안(結案)이 작성되지도 않았는데 급하게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이첨의 모사가 있었다고 다른 이들이 기록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정황이 있습니다. 허균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급변한 상황을 뒤늦게 깨닫고 할 말이 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이첨의 손을 들어준 광해군은 허균의 외침을 외면합니다. 시대의 풍운아 허균은 만고의 역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50세 되던 1618(광해 10) 824일 목과 팔 다리가 잘리는 능지처참형을 받고 죽습니다.

 

 

용인에 있는 허균의 무덤. 제대로 가꾸어져 있지 않아 안타까웠지만, 보랏빛 엉겅퀴꽃이 혁명가 허균의 넋인 양 지천으로 피어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허균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요. 마치 스스로 찬술한 자신의 묘비명과 같은 성옹송(惺翁頌, 성옹을 기리며)을 지었습니다. 성옹(惺翁)은 허균의 호이기도 합니다.

 

 

惺翁頌(성옹송)

 

惺翁何人(성옹하인)

敢頌其德(감송기덕)

其德伊何(기덕이하)

至愚無識(지우무식)

無識近陋(무식근루)

至愚近庸(지우근용)

庸而且陋(용이차루)

奚詑爲功(해이위공)

陋則不躁(누즉부조)

庸則不忿(용즉불분)

忿懲躁息(분징조식)

容若蠢蠢(용약잠잠)

擧世之趨(거세지추)

翁則不奔(옹즉불분)

人以爲苦(인이위고)

翁獨欣欣(옹독흔흔)

心安神精(심안신정)

庸陋之取(용루지취)

精聚氣完(정취기완)

愚無識故(우무식고)

遭刑不怖(조형불포)

遭貶不悲(조폄불비)

任毁任詈(임훼임리)

愉愉怡怡(유유이이)

非自爲頌(비자위송)

孰能頌汝(숙능송여)

惺翁爲誰(성옹위수)

許筠端甫(허균단보)

 

성옹이 누구기에

그 덕을 기리는가

그 덕이 어떠냐면

어리석고 무식하지

무식하면 고루하고

어리석으면 옹졸하지

옹졸하고 고루한데

어찌 공을 자랑할까

고루하면 성급하지 않고

옹졸하면 성을 안 낸다네

성내지 않고 성급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어리석게 보이나

세상사람 다가는 길

옹만은 가지 않고

사람들이 고역으로 여기는 걸

옹만 홀로 달게 여겨

맘 편하고 정신 맑아

옹졸하고 고루하기만 하지만

정기 모이고 기운 온전해

어리석고 무식해서

형벌 받아도 두려워 않고

좌천 되어도 슬퍼 않네

헐뜯던 욕하던 버려두고

즐겁고 마음 편해

스스로 기리지 않으면

누가 있어 그대 기릴까

성옹이 누구냐 하면

허균 단보 바로 그 사람

 

 

나는 역사의 패배자에게 애정이 많습니다. 대부분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항하고 운동하다 좌절된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좌절과 패배가 본인에게는 매우 쓰라릴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뒤에 오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길잡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패배자라고 하여 영원한 패배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허균이 그러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인 1910(융희 4) 대한제국 정부는 이완용의 주도 아래 역대 패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대거 복권하는 시혜(?)를 내립니다. 그러나 허균은 거기에서도 제외됩니다. 철저한 역사의 패배자로 남겨둔 것이죠.

 

 

꿈을 쉬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태우는 장작불이 되지 못한다면 불쏘시개라도 되면 어떻습니까.

 

 

현재로 돌아와 지금 세상은 어떠한가요. 아직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나요. 아니면 지쳐 쓰러져 있나요. 마지막으로 백무산 시인의 장작불을 보면서 쉽게 꿈을 접지 말자고 나부터 다짐해봅니다.

 

 

장작불
- 백무산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은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몇 개 장작만으로는 불꽃을 만들지 못해

장작은 장작끼리 여러 몸을 맞대지 않으면
절대 불꽃을 피우지 못해
여러 놈이 엉겨붙지 않으면
쓸모없는 그을음만 날 뿐이야
죽어서는 잿더미만 클 뿐이야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백무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1988 청사)

 

 

2020년 6월 10일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