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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그리고 노동자대회
지난 5월 14일 광주에서 민주노총 주최 전국노동자대회가 있었다.
5월 항쟁의 중심 도청앞 광장에서 오후 6시부터 대회를 열었다.
80년 마지막 항쟁지 도청/ 건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번 광주대회를 앞두고 일각에서는 항의가 많았다.
자본과 정부권력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짓밟히는 울산 건설플랜트노조, 청주 하이닉스 비정규직 투쟁 등 당면 투쟁의 현장에서 노동자대회를 갖는 것이 합당하다는 논리였다.
난 그런 의견에 당연히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큰배는 움직이기도, 출발하기도 어렵고, 멈추거나 회전하는 것도 어려운 것처럼 민주노총이라는 큰배가 5월 광주를 기념해 광주에서 노동자대회를 열기로 한 것도, 이것을 수정하는 것도 어렵겠구나 생각하면서 현 민주노총 지도부를 마음속으로 두둔했다.
물론 현 민주노총 지도부가 광주에서 노동자대회를 열겠다는 발상의 근저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은 조금 있지만 말이다.
금남로 극장에 붙어있는 이벤트 간판/ 극장에서도 5.18을 기념한다.
이윽고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투쟁을 결의하는 노동자대회가 아니고 잔치 같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터라 프로그램을 쉽게 바꾸기는 어려웠을 게다. 그래도 좀 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노래패, 춤패 등 출연한 문화패들의 공연도 그렇고 연사들도 하나같이 당면 투쟁과제에 대한 결의는 보기 힘들고, 꼬장꼬장한 역사선생님처럼 25년 전 5월 광주와 미국에 대하여 교육으로 일관한다.
그날 시민군들에게 제공되었던 주먹밥 재현/ 무료로 제공되었다.
곁반찬처럼 끼워진 연사인 양경규 공공연맹 위원장만이 홀로 '자본과 한판 싸움을 준비하고, 지금 이 자리를 5월 영령들을 기리며 투쟁을 결의하고, 투쟁을 시작하는 자리로 만들자'고 노동자대회에 걸맞게 외쳤지만 앞뒤로 배치된 역사선생님들 훈시와 환호하는 모범생들의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25년 전 그날에도 산야에는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으리라.
미국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자본과의 싸움은 로마제국에 비견되는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어 절망적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할 만큼 미국이라는 존재는 무겁게 다가온다. 물론 분명 극복해나가야 할 존재고, 몰아내야 할 존재다. 그러나 방법은 쉽지 않다. 대외경제, 특히 미국경제에 예속되어 있는 우리 경제체제에서 '단호한 반미'는 '경제 파탄'으로 비쳐지지 않겠는가. 미국을 싫어하는 일반 대중에게도 말이다.
5월 영령과 열사들의 영정/ 넓은 영정각 안 양 옆으로는 빈 자리가 절반은 된다. 그 자리가 다 차야만 자주평등의 세상이 온다는 걸까?
통일. 통일의 절박함도 안다. 민족의 자주적인 발전과 항구적인 평화 정착은 통일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기도 하다. 그런데 역사선생님들이 외치는 반미와 통일은 공허하다. 왜일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내가 종파분자이기 때문일까?
전체 시민들의 47% 이상이 미국과 북한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을 지지하겠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이 숫치를 대입해보면 적어도 전화를 이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2,000만명은 미국보다 북한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토록 현 정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반미와 통일운동을 확산시킬 절호의 기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열변을 토하는 역사선생님들은 2,000만 대중이라는 거대한 물 속에서 힘차게 뛰어노는 물고기인가? 아니면 그 물에 동동 떠다니는 기름인가?
구묘역/ 사람이 눕기도 불편할 정도의 반평짜리 무덤이다. 25년 전 계엄군들이 5월 영령들을 비닐에 두루말이를 해 쓰레기차에 싣고 와 아무렇게나 묻어버렸다고 한다.
도청앞 광장 옆에는 오래된 적산가옥이 있다. 2층으로 온갖 멋을 내어 지어진 집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참으로 위풍당당하였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그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일 뿐이며,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낡고 불편해 보인다.
낡고 불편한 것으로 보면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가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자본가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주는 신보수주의, 이 양면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는 그만큼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옥죄고 있다. 정말 신물이 나고, 절망스럽기도 하다.
도청앞 광장 옆 적산가옥/ 친일파 또는 왜놈 고관의 집이었을 것이다. 당시로는 최고급이었겠지만 이제는 낡고 불편한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통일운동, 반미운동도 미안하지만 낡고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역사선생님들은 10년 전과 똑같은 것을 외치고 모범생들은 환호한다. 대중의 삶을 바꾸는 운동가들이 아니라 간혹 있는 이런 부흥회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같다. 내가 종파주의자라 그렇게 느끼는 걸까? 제발 거리로 나가봐라. 닫힌 눈을 떠라. 역사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공부들 좀 하시라. 오래된 레코드는 음질조차 좋지 않다.
5월 광주.
금남로에는 극장에서도 5.18 유공자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그만큼 5월 광주는 특정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광주 시민 전체의 것이라는 증거일 게다.
25년 전 광주는 고립된 분노의 도시였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산야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가득하였을 테고, 이름 모를 골짜기에는 희디흰 찔레꽃이 피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거리는 취루탄과 곤봉, 나아가 장갑차와 기관총탄이 난무하고, 희생된 시민군들의 붉은피로 넘쳐났었으리라. 병원마다 부상자가 넘쳐났음에도 자원 헌혈자들에 의해 피가 모자라지 않았고, 시민들이 제공하는 모든 먹거리들은 시민군들 뿐만 아니라 거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먹고도 남았다고 하는 얘기는 유명하다.
신묘역을 바라보며 쉬고있는 할머니/ 탈색된 빨래처럼 무표정하게 묘역을 바라보고 있다. 뭔 생각을 하실까?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계엄반란군의 총탄에 돌아가신 윤상원 열사는 여자와 고등학생들을 돌려보내며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맞다. 역사는 시민 항쟁군을 승리자로 만들었다.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거대한 기념탑처럼 관련자들은 정계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5.18 기념탑/ 과연 5월 시민항쟁이 승리의 역사였음을 증명하는 기념물인가?
광주를 발판으로 대통령을 비롯해 정계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은 시대를 이끌어간다고 과연 시민 항쟁군이 승리자가 된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그들도 알 것이다. 80년 5월 그날 비닐에 둘둘 말려 청소차에 실려와 반평 땅 속에 쓰레기 짐짝처럼 버려졌던 이들이 있고, 그들이 원하던 세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핍박받으며 자주와 평등을 외치고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를 발판으로 출세한 이들은 억압의 강 저 편으로 이미 건너간 자들이 아닌가. 그들은 이제 광주영령들이 외쳤던 그 자리에 지금도 여전히 있는 사람들을 이제는 적으로 간주하고, 핍박하고 착취하기 위해 법안을 만들고 폭력을 사용한다.
"내가 보름만 잡혀 있었어도 벌써 서울에 가 있을 텐데." 80년 5월 고등학생으로 시민군들을 따라다니다 잡혀서 이틀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 나왔다는 민주택시 광주본부장의 얘기다. 동료들은 "맞어." 하고 허탈한 웃음으로 맞장구친다.
망월동에 피어있는 찔레곷/ 5월 그날에도 산골짜기 어딘가에는 찔레꽃이 말없이, 보는이 없이 피고지고 있었을 것이다.
출세한 자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시민 항쟁군을 정말 승리자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핍박받는 우리 진영에 있지만 끊임없이 억압의 강 저 넘어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들을 부러워하고, 늘 그리로 도강할 준비를 갖춘 이들이 있다. 이들은 목적관철을 위해서는 온갖 잡탕 망나니들과의 연합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노동대의를 팔아먹고 한나라당으로 투항해 국회의원이 된 배일도는 그래도 정직한 악당이다. 민주노총 방침에 늘 반기를 들던 그러나 민주노총 대의원 50명을 보유한 KT노조에 아부하며 야합한 이가 누구인가?
이들이 결국 우리진영의 제1의 세력을 만들었고,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장악했다. 제길! 여전히 깨지고 짓밟히는데 돌아다보니 우리 성(城)에는 붉은 깃발도 아니고 흰 깃발도 아닌 희끄므리한 깃발이 나부낀다.
<2005. 5. 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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