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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는 여러 자리에서 고양시 지역의 답사를 조직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이 많다.
고양시 지역에서 답사를 한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서민들의 삶을 먼저 보자면 당연히 초가집이지.
아니야 역사성을 살린다면 금정굴이나 장준하 선생 유적이지.
사람들 눈길을 잡으려면 장희빈 관련 유적은 어떤가.
속절없이 고민만 하면서 답사를 조직하겠다는 나의 발언은 빈말이 되어가고 있다.
에이 생각난 김에 혼자라도 하는 마음에서 찾은 곳이 복재선생 기준(奇遵)의 묘소이다. 복재선생은 조광조, 김식, 김정 선생 등과 함께 기묘명현의 대표 인물이다.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나간 기묘사화는 유교에 바탕한 이상주의적 개혁이 실패한 결과물이었지만, 그 정신은 유교적 대의를 지키려다 숨져간 사육신과 함께 조선 600년 동안 유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조선왕조는 이들의 정신을 우려먹으면서 600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준의 묘소는 원당역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원당역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한옥의 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행주 기씨 재실이다. 재실을 이정표 삼아 길을 잡으면, 입구에 행주 기씨 도선산이라는 비석이 있고, 재실 앞으로는 각종 신도비가 줄비하다.
신도비를 지나면 연지(蓮池)가 나오는데, 연지 옆에는 북송의 대 유학자 주돈이 렴계선생이 쓴 애련설(愛蓮說)을 새긴 새김돌이 있다.
새겨져 있는 애련설은 이러하다.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하니 晉陶淵明은 獨愛菊하고 自李唐來로 世人이 甚愛牧丹호되 予獨愛漣之出於 泥而不染하고 濯淸漣而不妖하고 中通外直不蔓不枝하고 香遠益淸하야 亭亭淨植하니 可遠觀而不可褻翫焉이라.
予謂菊은 花之隱逸者也오 牧丹은 花之富貴者也오 蓮은 花之君子也니 噫라 菊之愛는 陶後에 鮮有聞이요 蓮之愛는 同予者 何人고 牧丹之愛는 宜乎衆矣로다
국화는 은자의 꽃이고, 연꽃은 군자의 꽃이요, 모란은 부귀의 꽃인데 사람들은 모란만 좋아하는 구나 하는 내용으로, 이를 인용하는 것은 군자의 삶을 살겠다는 일종의 결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 나란히 있는 내용을 보면 명당에는 샘이 솟는데 이곳에도 역시 물이 솟으니 명당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투의 문구가 보인다. 명당에 집착하는 것을 볼 때 그 속내는 주렴계 선생의 연꽃보다 모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상은 현실 속에서 썩어가는 것인가. 실제로 연지에는 연꽃은 없고, 헝클어진 창포만이 버려진 듯 자라고 있을 뿐이다.
재실 뒤로는 복재선생의 증조부인 기건(奇虔)의 묘소이다. 이분은 대사헌에 공조판서, 판중추원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던 분으로 실질적인 행주 기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실 왼편으로 삼송방향으로 난 3호선 전철이 있고, 전철 밑으로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가다 전철을 끼고 왼편으로 오르면 복재선생의 손자이며, 영의정 기자헌의 부친인 기응세의 무덤이 나온다.
기응세의 무덤에는 남다르게 비석이 2개 있는데, 나중에 아들이 영달하여 벼슬이 추증되어 하나 더 세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석들의 비문이 범상치 않다. 처음 건립한 비석의 비문은 한석봉이 쓴 것이고, 나중 건립된 것은 중국의 명필 주지번이 썼으니 당대 최고 명필들의 글씨가 한 무덤에 나란히 있는 것이다.
기응세 무덤 바로 위로는 복재선생의 아들 한성부 판윤을 지낸 기대항의 무덤이다. 이곳에서 곧장 올라가면 배드민턴 연습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능선길을 20여m 가면 왼편에 복재선생의 무덤이 나온다.
복재선생의 무덤은 원래 지도읍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언제 이곳으로 이장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경한 모습의 석물들로 볼 때 무덤은 최근에 손을 본듯한데 왕릉을 버금할 정도의 큰 봉분을 하고 있다.
애초에 세워진 비석(기자헌이 좌의정일 때 세워졌음)은 대좌만 있고, 1962년에 다시 세워진 비석과 이 비문을 한글로 번역한 1990년에 세워진 비석이 또 하나 있다.
빽빽이 세워진 석물들은 우리가 흔히 돌공장에서 보는 조악한 수준의 것들로 동자석, 양, 사자석 각 2기, 촛대석, 문무인석이 무덤의 위엄을 살리기는커녕 조잡한 민화풍의 그림들로 가득찬 시골 산신당처럼 기괴한 분위기만 풍기고 있다. (반면 처음 세워진 비신을 잃은 대좌는 대리석으로 꽃잎이 단아하게 새겨진 것이 기품이 느껴진다.)
기준 선생의 묘 후경 - 조잡한 석물이 가득하다.. 이마저 서울-문산간 고속도로 신설 때문에 이장해야 할 위기다.
조선시대 무덤은 시신을 묻은 곳을 표시하는 단순한 의미만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후손들의 대외적인 신분과시이며, 동시에 그 신분과 기득권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이다. 그러니 무덤에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신을 살리기보다 치장에만 급급한 복재선생의 무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욕심이 어떻게 정의를 욕보이는지를 보는 것만 같아 민망하다. 자기의 직계 조상인데도 말이다. 목숨을 내 논 헌신이 기득권이 되었을 때, 절제 못하는 기득권은 결국 추한 모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준은 21세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28세에 기묘사화로 유배되고, 29세에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맥을 이은 사람이다. 조광조의 개혁 당시 개혁 주체들이 토지의 소유 한계를 정하는 한전법을 주장한 반면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보다 혁신적인 균전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기묘사화 당시 국문을 당하며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조광조나 김정, 김식과 함께 한 것은 그들의 논의가 과격한 줄 모르고 상종했을 뿐이라며 고문관의 논리를 부정하며 비껴가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을 근거로 복재선생의 인격을 깎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진 고문을 의연하게 버틸 자가 몇이며, 고문에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고 변절했다 할 것이며, 의연하게 견뎠다고 모든 정당성을 한 몸에 받을 것인가. 목숨을 걸고 버틴 박종철 열사가 있지만, 온갖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아 희대의 고문기술자 이근안 마저 존경하였다는 이태복씨의 이후 행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복재선생의 명분 있는 개혁과 죽음은 행주 기씨 집안에도 대단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음이 틀림 없는 것 같다. 그의 조카 기대승은 퇴계선생과의 4단 7정 논쟁으로 유명한 대 유학자가 되었고, 증손자 기자헌은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광해군과 당시 집권 대북파가 전현직 고위관료와 종친, 왕의 사위들 등 1,100여 명을 모아 놓고 폐모를 위한 연석회의를 하였다. 기자헌은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하였지만 그 많은 신료들 중 홀로 반대하였고, 그 일로 관직에서 쫓겨난다. 명분이란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어 되살아나는 것 아닐까.
<200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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