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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움'이란 '외로움' 또는 '공허함'이랑 짝하기 쉬운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아마도 피할 수 없는 타고난 운명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한 길은 공양왕릉뿐이니 아무 길로 가도 그리 가기만 할 터였습니다.
우리는 수역이마을을 거쳐 연안이씨 선산을 넘었습니다.
일행 중 한명이 이미 점심을 먹을 청대골에 도착했다고 해서
원당골 뒷산은 생략하고 마을길을 걸어 청대골로 향합니다.
겨울이라 냇물은 맑고
풀섶 뒤로는 오리들이 한가로이 노닙니다.
중간에 일행을 만나
청대골 철원양평해장국에서 다섯끼 만에 첫 밥을 먹었습니다.
해숭위 윤신지 묘
밥을 먹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문득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소수가 답사할 때만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중 하나지요.
해장국집에서 길을 건너 산길을 오르면
머지 않아 새로 도로를 만드는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협곡이 나타납니다.
등산로를 걷다 보니 길 아래 커다란 묘가 나타납니다.
직감적으로 선조의 부마 해숭위 윤신지의 묘라고 생각했습니다.
맞았습니다.
윤신지는 서인의 거두 윤두수의 손자이자 영의정 윤방의 아들입니다.
선조의 따님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인격이 고매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부마라는 것 때문에 저는 그동안 찾지 않았었습니다.
신분 덕에 잘 사신 분들에겐 왠지 관심이 덜 갑니다.
윤신지 묘갈
새로 나는 도로를 건너
우리는 능선길을 버리고 마을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마을에는 시집올 때 남편이 새로 지은
예쁜 기와집과 느티나무를 지키면서
100년도 넘은 씨간장 보여주시던 할머니가 살고 계시던 곳입니다.
집에 이르니 수리중이었습니다.
예쁜 꽃담은 시멘트로 덕지적지 바르고,
벽돌 격자무늬는 생경한 새 벽돌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작년 11월 돌아가시고,
주인은 바뀌어 집도 바뀌고 있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성득식(成得識) 묘
할머니 집 뒤에는 오래된 묘가 있습니다.
전에도 왔었지만 고증을 못했는데,
이번에 살펴보니 문묘에 배향된 우계 성혼의 고조할아버지인
한성부윤 성득식의 묘입니다.
이분은 성녕대군의 처남으로
안평대군의 양외삼촌 되는 분입니다.
성녕대군이 불과 14세에 일찍 죽자
이를 슬퍼한 태종이 성녕대군의 처족을 종친의 예로 대우하라고 하여
중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세조)은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를 양아들인 안평대군하고 간통하였다는 죄목을 달아
관비로 보내고, 그 친정을 압박합니다..
공양왕릉
성득식의 묘 옆으로 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바로 공양왕릉입니다.
한 무더기 흙을 쌓은 쓸쓸한 저 공양왕릉, 蕭瑟園陵一坏土(소슬원릉일배토)
나무하고 꼴 베는 걸 금지하는 이 없구나. 無人相呼禁樵蘇(무인상호금초소)
이 시는,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자 대문장가였던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이 지은 「공양왕릉을 지나가면서(過恭讓王陵)」란 시 중 일부입니다.
성득식은 성현의 작은 할아버지이니
성득식의 묘에 왔다가 바로 뒤에 있는 공양왕릉을 들렀나봅니다.
아마도 때는 세조 말년에서 성종 초였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세종 때 왕릉 지킴이를 정해준 것도
이미 이때는 소용이 없었나 봅니다.
옛 사람 심은 늙은매화 꽃향기 여전한데
후미진 이곳에 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만월대 전각 퇴락해도 내게는 멀기만 해
먼 길을 잡아 돌았으나 피할 길 없었네
내 가슴 속 사랑 조그만 불꽃에 불과하나
빛잃은 햇살이라도 걸음걸음 떨구려했건만
커다란 물이 일고, 커다란 불이 일고
커다란 바람이 이니, 작은 불꽃 어이하리
바람 그친 이 들판에 따뜻한 봄볕이 들면
시냇가 한줌 모래알
무덤가 향불 남은재
내가 떨군 작은 햇살이었음 아는 이 있겠지.
나도 오랜만에 공양왕릉에 이르러 여러 생각에 젖어
왕릉 사진을 담고, 조사를 읊어보았습니다.
공양왕릉을 떠난 우리는 배다리누리길을 거쳐
대장동 벌판길을 지나 화정까지
약 13km의 길을 휘적휘적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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