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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소리의 한시산책 – 장유(張維)의 「지정추사(池亭秋思)」
<prologue>
이 글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던 9월 초에 원고를 넘길 계획으로 쓰던 글입니다. 일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원고를 넘깁니다. 지금이 초고를 썼던 계절인 9월 초라고 여기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십이지장 죄 녹이는 그 무슨 환장할 일로
목 놓아 울음 우는 곡비 같은 천형을 안고
쓰르람, 적멸 천리에 내가 나를 탄주한다.
- 윤금초의 시조 「쓰르라미의 시2」 중
여름을 상징하는 것은 무수히 많겠죠. 그 중 우렁찬 매미 소리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한때, 밤에도 그치지 않고 동네가 떠나갈 듯 울어대는 말매미 소리에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잠을 못 자기도 했었지요. 그런 매미들 속에서 쓰르라미는 좀 독특합니다. 쓰르라미 우는 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어떤 이에겐 ‘쓰으름 쓰으름’으로 들리고, 어떤 이에겐 ‘쓰르람 쓰르람’으로 들린답니다. 한여름에는 제법 힘차기는 하지만, 그래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울음소리는 유난히 애절합니다. 쓰르라미는 7월에서 8월 더위가 한창일 때 주로 활동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입추가 지나고 한여름 더위가 한풀 꺾여,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살만해졌다고 행복해하죠. 한여름 더위가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전에 저는 이 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마냥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은 한 뼘씩 높아지고, 그늘은 짙어지면서 가을의 느낌이 언뜻언뜻 스쳐 다가옵니다. 겨울을 싫어하던 저는, 계절이 바뀌어서 겨울이 가까워져 오는 느낌이 참 싫었습니다. 쓰르라미도 계절이 바뀌는 게 싫은지 울음소리는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져 더욱 애절하게 들립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애절한 울음소리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시인들은 쓰르라미 울음소리를 소재로 시(詩)를 썼습니다.
오늘 보려고 하는 장유(張維)의 「지정추사(池亭秋思)」도 그런 시 중 하나입니다. 이제 시(詩)를 볼까요?
연못가 정자에서 심란한 가을 심사[池亭秋思]
- 장유(張維)
가을비는 설핏 연못에 내리고
높바람은 이른 서리 재촉하네
울던 쓰르라미 버들잎 뒤에 숨고
연밥 위 청호반새 연실을 쪼는데
시 한 수 지어놓고 난간에 기대니
시름 밀려오고 고향만 그립구나
시드는 연꽃은 색조차 바랬는데
향기는 오히려 옛날 그대로이네
秋雨入池塘(추우입지당)
北風催早霜(북풍최조상)
寒蟬藏柳葉(한선장유엽)
水鳥啄蓮房(수조탁연방)
詩罷憑危檻(시파빙위함)
愁來望故鄕(수래망고향)
敗荷顦顇色(패하초췌색)
猶帶舊時香(유대구시향)
(2017년 9월 초 시들어가는 연꽃/ 광화문 법륜사)
광해군, 인조 시대에 주로 활동한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호가 계곡(谿谷)입니다.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을 지낸 박숭원(朴崇元)의 딸입니다. 장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폭 자살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고, 사위는 효종임금님입니다. 스승은 서인의 대유학자 김장생(金長生)입니다. 그야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입니다.
예전 금수저들은 대개 완고하기 십상인데, 이분은 매우 실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장에 뛰어나 이정귀·신흠·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이른바 잡학(雜學)이라고 불리는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제 시(詩)를 볼까요?
秋雨入池塘(추우입지당) 가을비는 설핏 연못에 내리고
北風催早霜(북풍최조상) 높바람은 이른 서리 재촉하네
寒蟬藏柳葉(한선장유엽) 울던 쓰르라미 버들잎 뒤에 숨고
옛날 중국에서는 입추로부터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② 이슬이 진하게 내리며, ③ 쓰르라미가 운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시의 도입부는 정확히 ‘입추 3후(候)’로부터 시작합니다. 입추는 보통 8월 7일쯤 되니, 이 시를 썼을 때는 8월 20일쯤 될 겁니다.
水鳥啄蓮房(수조탁연방) 연밥 위 청호반새 연실을 쪼는데
詩罷憑危檻(시파빙위함) 시 한 수 지어놓고 난간에 기대니
愁來望故鄕(수래망고향) 시름 밀려오고 고향만 그립구나
敗荷顦顇色(패하초췌색) 시드는 연꽃은 색조차 바랬는데
猶帶舊時香(유대구시향) 향기는 오히려 옛날 그대로이네
‘水鳥(수조)’는 말 그대로 물새입니다. 연못에 사는 물새는 물총새와 호반새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새들은 육식성이어서 연꽃 열매인 연실을 쪼지 않습니다. 작은 새인 개개비가 오히려 연실을 쫍니다. 그럼에도 물새가 연실을 쫀다고 표현한 건 아마도 관념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물총새나 호반새는 종종 연밥 위에서 앉았다가 물고기를 사냥하기도 하거든요. 더욱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물총새나 호반새는 종종 그림 소재가 되기도 하니, 개개비가 아니라 물새(저는 청호반새로 봤습니다)로 표현하는 건 어쩜 당연하겠죠.
평생 꽃길만 걸은 장유는 왜 시름이 밀려오고 고향이 그리웠을까요? 장유는 벼슬을 시작(출사(出仕))한 이후 평생 벼슬을 했는데, 49세 때 병으로 임금에게 여러 차례 간곡한 사직상소를 올린 뒤에 겨우 병가를 얻습니다. 휴가를 받은 장유는 지금의 시흥시 조남동 고향집으로 내려가 쉽니다. 그것도 겨우 1년 뒤에 다시 불려나왔다 52세에 사망합니다. 시름이 밀려오고, 고향이 그리운 건 아마도 몸이 아팠기 때문일 겁니다. 나이로는 47세, 48세 또는 50세 이후겠죠. 시들며 떨어지는 연꽃을 보면서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을 겁니다. 나이로나 소멸해 가는 모습이나 모두 비슷했겠죠. 더욱이 향기는 여전하니 대 천재로 이름나, 육신은 시들지만 여전히 건재한 정신을 소유한 자신의 모습이 이입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약허에게 줌(贈元若虛) - 홍대용
촉촉이 내린 이슬 희게 빛나고
쓰르라미 울음 더욱 애절하네
가을도 슬픈데 벗마저 떠나니
시름만 태산처럼 쌓여 가누나
湛湛繁露色(담담번로색)
惻惻寒螿吟(측측한장음)
悲秋又送歸(비추우송귀)
憂端齊嶔岑(우단제금잠)
저는 홍대용의 시(詩) 「원약허에게 줌(贈元若虛)」과 장유의 시 중에 어느 것을 소개할까 고민했었습니다. 홍대용의 시 또한 이 계절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장유의 시를 올린 것은 제 개인적으로 장유에 대한 재발견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금수저에 반감을 가지고 있고, 특히 서인 집권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유의 글을 보면서 제 선입견과 다른 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소멸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초가을 어느 날 담장에 뒤늦게 피어난 장미를 보니 ‘장미’라는 이름을 무색할 만큼 추레해져 있어서 가슴이 아리기도 했습니다. 곤경에 빠져 있거나,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을이 쓸쓸한 ‘소멸’의 계절로 느껴진다면, 가을은 견디기 힘든 계절이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초 지리산 자락의 어느 저녁들녘)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앞날이 밝지 않던 1948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형기 시인도 가을이 견디기 어려웠나 봅니다. 세상이 조금 바뀌어 세상을 걱정하는 이들이 견디기 조금 쉬워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가을이 여전히 견디기 어려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이형기 시인이 1949년에 발표한 시(詩) 「비오는 날」을 감상하는 것으로 한시산책을 마치려고 합니다.
비오는 날 –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寓話)는 끝났다더라.
한 색(色)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千里)를
더듬어 가면 ……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서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1949년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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