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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소리의 한시산책 – 맹호연(孟浩然)의 「초추(初秋)」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김현승의 「가을」 중
시인은 자연의 숨결에 자신의 숨결을 기대고 사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시인 김현승은 어쩜 봄과 가을을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요. 봄을 찾는 이들은 땅을 살피죠. 솟아나는 새순과 눈 크게 뜨고 찾아봐야 겨우 보이는 작은 꽃들이 추운 땅을 뚫고 한줌 햇살에도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그런 기적을 눈으로 보려고요. 그러니 봄은 가까운 땅으로부터 오지요.
가을은 어떤가요? 햇살은 여전히 따갑고 덥지만, 문득 달라진 느낌에 하늘을 바라보면 여름과 달리 파랗게 투명한 하늘이 펼쳐지고, 맑은 공기를 뚫고 내려온 빛은 산란 없이 반사돼 그늘은 한없이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가을은 먼 하늘로부터 오지요.
여름은 곡식을 풍성히 자라게 하는 고마운 계절이지만, 옛 선인들이 염제(炎帝)라고 부를 만큼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계절이기도 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한결 견디기 쉬워지면 그 자체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더욱이 들판에 곡식이 풍요롭게 여물어가면 행복감은 배가되었을 겁니다.
가지 않을 것 같던 무덥던 나날이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추위를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서늘합니다. 오늘은 초가을 풍경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초추(初秋, 초가을)」라는 시(詩)를 감상하겠습니다.
初秋(초가을) - 孟浩然(맹호연)
가을은 길어지는 밤을 따라 다가왔나
살랑살랑 불어오는 맑은 바람 시원해
찌는 볕 물러가니 초가 그늘 깊어지고
뜰아래 풀 섶엔 이슬 총총 맺혀있네
不覺初秋夜漸長(불각초추야점장)
淸風習習重凄凉(청풍습습중처량)
炎炎暑退茅齋靜(염염서퇴모재정)
階下叢莎有露光(계하총사유로광)
(사진 : 2017. 8. 16 북한산입니다. 종일 비가 오고 잔뜩 흐린 날씨였다가 북한산만 활짝 개더니 가을하늘이 나타났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불현듯 오나 봅니다.)
맹호연(孟浩然, 689년 ~ 740년)은 이백이나 두보, 왕유와 동시대에 활동한 중국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입니다. 이름은 호(浩)이며, 자는 호연(浩然), 호(號)는 녹문거사(鹿門處士)입니다. 중국 양양(襄陽,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사람으로 젊어서 과거에 실패하고, 한때 녹문산(鹿門山)에 숨어 살았답니다. 40세 때 장안(長安)에 나가 시(詩)로써 이름을 날리고, 10년 연상의 장구령(張九齡), 10년 연하의 왕유(王維) 등과 비슷한 시풍을 지녀서인지 나이를 넘어 친하게 사귀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는 격조 높은 시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왕유와 함께 ‘산수전원시인(山水田園詩人)’의 대표자로 불립니다.
절친하였던 장구령은 당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고관(高官)이기도 했습니다. 맹호연은 장구령을 통하여 벼슬을 구하고자 「임동정호상장승상(臨洞庭湖上張丞相)」이라는 시(詩)까지 보내기도 하지만, 죽기 3년 전에 장구령의 막객(幕客, 일종의 고문)을 지낸 것이 공직(?)의 전부라고 합니다. 그것도 1년을 채 채우지 못했다고 하네요.
시(詩)를 볼까요. 첫 구인 ‘不覺初秋夜漸長(불각초추야점장)’을 직역한다면 ‘초가을밤이 차차 길어짐을 깨닫지 못했다’입니다. 하지(夏至)가 지나면 밤이 조금씩 길어지고, 길어지는 만큼 가을이 오고 있는데, 찌는 더위 때문에 가을이 옴을 잊게 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몸의 끈적임이 없어지고,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갑자기 가을이 옴을 느낍니다. 그런 느낌을 담아서 저는 ‘가을은 길어지는 밤을 따라 다가왔나/ 살랑살랑 불어오는 맑은 바람 시원해’로 번역해보았습니다.
‘茅齋靜(모재정)’에서 ‘茅齋(모재)’는 ‘초가집’입니다. 진짜 초가집일 수도 있고, 아니면 소박한 일상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사실 ‘靜(정)’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확 갔습니다. ‘고요하다’는 글자인데, 어떨 때 초가집이 고요할까요. 사람이 없어서? 저는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가을이 시작되면 그늘이 유난히 깊어집니다. 깊어진 그늘을 보면 저는 고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요하다’ 대신에 ‘그늘이 깊어진다’로 번역해보았습니다.
(사진 : 맥문동꽃. 맥문동꽃은 제게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징표입니다.)
저는 사실 가을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스무 살 언저리 어느 겨울에 집에 견디기 힘든 안 좋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 상처가 너무도 강해서 그 뒤로는 여름이 끝날 즈음 그늘이 깊어지거나 가을을 알리는 맥문동꽃이 피면 이미 우울해지기 시작했었습니다.
며칠 전 숲가에 맥문동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보랏빛 꽃잎 속에 살짝살짝 보이는 하얀 꽃술들이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느껴졌습니다. 맥문동꽃을 보고 아름답게 느끼다니, 세월이 흘러 제 가슴 속에 있던 겨울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나 봅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겐 예전의 저처럼 지금도 이 가을이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여지만은 않겠죠. 아마 김용택 시인도 그런 감정에 공감한 것 같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초가을」이란 시를 보면서 오늘 한시산책을 마치고자 합니다.
초가을
김용택
가을인 갑다.
외롭고, 그리고
마음이 산과 세상의 깊이에 가 닿길 바란다.
바람이 지나는 갑다.
운동장가 포플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어제와 다르다.
우리들이 사는 동안
세월이 흘렀던 게지.
삶이
초가을 풀잎처럼 투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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