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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시장에서 길을 잃다

풀소리 2017. 7. 14. 12:55

시장에서 길을 잃다

나는 1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도 10분 거리를 걸어 출근한다.
영등포시장역 앞에서 내리면 네거리 못 미쳐 건널목이 있고, 건널목을 건너 네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영등포로타리까지 큰길로 걸어다닌다.

버스에서 내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면 건널목에 곧장 이어진 시장 골목이 보인다.
저리로 가면 어떨까?
늘 호기심이 발동하면서도 나이 탓인가 매일 가던 길로만 다녔다.

오늘은 한 번 하고 시장길로 접어들었다.
곧장 곧은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들어가자 길폭도 줄어들고, 방향도 바뀐다.
문구류 도매상가를 지나 좁은 골목이 끝나고 양쪽 상가에 가운데 두 줄로 좌판이 이어진 시장 중심골목이 나온다. 더 이상 오던 방향에서 똑바로 갈 길은 없다.
어디로 갈까.

채소와 생선, 생닭과 그 부속(?), 건어물과 마른 고추, 온갖 밑반찬 그야말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좌판들이 큰 시장골목을 꽉 메우고 있다.
어디로 갈까?
나는 왼편으로 길을 잡았다.
길을 잃고도 내 마음은 한없이 한가롭다.

한 평쯤 되는 좌판에 아줌마들이 채소를 다듬고, 생닭을 정리하고, 사는 사람이 없어도 손길은 분주하다.
좁을 통로에 끌차에 짐을 잔뜩 담아 옮기는 아줌마들은 이미 얼굴 표정이 된 조금은 쓸쓸한 웃음으로 미안함을 대신한다.

 

비오는 인왕시장(2017. 7. 6)

 


시장.
촌놈인 나에겐 시장은 이국의 풍경과도 같았다.
대학시절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의기소침해질 때면 돈이 있으면 태종대에 가 파란 바다를 보고, 돈이 없으면 남대문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넘치는 사람과 상인들의 외침. 그 생생한 삶의 현장을 정신 없이 떠밀려 다니다보면 나도 모르게 의욕이 생기곤 하였다.

영등포시장은 서울의 큰 시장 중 하나인데, 아침이라 그런지 분비지 않는다.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시장이 살아야 할텐데.... 대형마트의 편리함도 좋지만 저 많은 사람은 어찌하라고.....

큰 시장골목을 지나니 아는 길이 나온다.
이어진 가게들이 한결같이 스텐으로 된 각종 개수대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물로 씻는다. 매일 씻나?
스텐가게를 지나면 공구상가다.
용접불꽃이 튀고, 집어던지듯 쌓는 산소통 부딪치는 소리에 기겁을 하기도 한다.
공구상가와 우리 사무실 빌딩 사이에는 조그마하고 아늑한 공원이 있다. 유유자적 공원으로 접어든다.

공원이 끝나는 곳에 천막 두 개가 있고, 부엌 집기들이 널려 있는 틈으로 LPG 화덕 위에는 100그릇 도 더 나올 커다란 솥에서 국이 끓고 있다. 화물연대 사수대 동지들이 임시로 이용하는 노천식당이다.
식당 옆엔 방패와 곤봉을 든 전경들이 늘어서 있고....

유유자적 잃은 길은 그렇게 엄혹한 현실에서 끝났다.

 

<2003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