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기차는 올까
- 김기연
가을,
간이역
구석진 곳부터 싸늘히 식고 있다
고개 돌린 해바라기가 건너다보는 들녘
하롱하롱 고추잠자리 떼
액자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직한 담장에 기대어선
개망초 시든 이마 쓰다듬고 있다
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고
시선 자주 역사 밖 철로를 서성이는 여자
비스듬히 길어진 그림자
흔들어 깨우는 스피커의 비음
‘새마을호 열차를 먼저 보내는 관계로 무궁화호 열차가 연착하겠음’을
알리는 사이 저무는 들녘
뻔한 길 속으로 휘어진 햇살
꽁무니 말아 쥐며 달아나고 있다
언제쯤 기차는 여자를 만나러 올까
(『기차는 올까』 작가세계, 2014)
이번 한시산책은 시인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입니다. 마침 청명한 하늘이 계속되는 맑은 가을입니다. 들판에는 아직 추수하지 않는 논들이 노랑 꽃밭인양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찾아가는 이는 경기도 고양시와 인근 파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여류시인 홍랑(洪娘), 신사임당(申師任堂), 이옥봉(李玉峯), 일타홍(一朶紅)입니다. 신사임당을 빼고는 이미 한시산책에서 소개했던 인물입니다.
그나저나 기차는 올까요? ‘여자’가 기다리는 게 여행을 떠나기 위한 ‘기차’일까요. 아니면 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일까요. 아마도 기차를 타고 오는 기다리는 ‘사람’일 겁니다. 햇살이 꽁무니를 말아 쥐며 달아나고 있으니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면의 묘사는 여느 사람들의 시간관념과 달리 한없이 느리고 느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런 것 아닐까요?
외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외로움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느낌’입니다. ‘혼자’라는 의미는 참으로 복잡합니다. 물리적으로 혼자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어도 마음이 혼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영혼을 감싸 안을 수 없으면 또는 감싸 안김을 받지 못하면 외로움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지극히 섬세한 사람들은 삶이 곧 외로움이겠지요.
시인은 감성이 아주 섬세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시를 보며 다른 이들은 위로받을 수 있겠지만 정작 섬세한 시인 자신은 매우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요. 저는 오늘 경기도 북부 고양시와 파주시 지역의 조선시대 여류시인들을 찾아 떠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외로움’이었습니다.
사전에 오늘 답사할 곳의 동선을 짰습니다. 출발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전철 3호선 대화역에서 하는 걸 고려해서요. 파주 교하에 있는 홍랑의 묘, 파주 법원읍에 있는 신사임당 묘, 파주 광탄면에 있는 이옥봉의 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고양시 원흥동에 있는 일타홍 묘 순으로 여정을 잡았습니다.
홍랑의 묘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다율동 519-7입니다. 예전에 묘 앞에 있던 집 주소인 교하로 1053번길 25-12를 찍고 가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묘역 바로 앞까지 도시개발을 하느라 차량진입을 할 수 없어서 처음 가는 이들은 찾아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처음 간다면 한국난방공사 파주 지사 앞 유가원설농탕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유가원설농탕에서 길 건너 도시개발을 하느라 쳐놓은 펜스 너머 산에 홍랑의 묘가 있습니다.
파주 교하에 있는 홍랑의 묘. 누군가 꽃다발을 가져다 놓았다. 뒤로는 사랑했던 낭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그의 정실부인 선산 임씨(林氏) 무덤이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홍랑 하면 이 시조를 떠오릅니다. 함경도 경성(慶城)의 관기였던 홍랑은 서울로 부임해가는 최경창을 따라 한양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관기는 도(道)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경계까지 따라온 홍랑은 이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버들 류(柳)와 머무를 류(留)가 발음이 같아서 더 머물러 달라는 뜻이 있어서 예부터 이별할 때 정인에게 버드나무 한 가지를 꺾어 정표로 줬다고 합니다. 머무를 수 없다면 봄버들이 필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하면서요.
물론 둘은 다시 만납니다. 한양에 돌아온 최경창이 병이 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은 홍랑은 바로 찾아옵니다. 당시는 당쟁이 불처럼 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최경창은 함경도 관기와 같이 산다고 반대 당파의 탄핵을 받습니다. 최경창은 벼슬 대신에 홍랑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최경찬은 죽을 때까지 홍랑과 함께 삽니다. 물론 도합 10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홍랑은 최경창의 유고(遺稿, 남긴 원고)를 짊어지고 피란을 다닙니다. 그렇게 유고를 지켰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최경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벼슬을 버린 사내와 사랑하는 이의 원고를 목숨처럼 아낀 여인. 이 둘의 사랑은 ‘사랑이란 건, 아주 적은 수의 행운아들에게나 영원한 거’라는 작가 허윤선의 표현처럼 어쩌면 해피앤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갔을 때 홍랑의 묘 앞 상석(床石)에는 예쁜 꽃다발이 놓여 있었습니다. 홍랑을 기리는 마음만큼 그 꽃다발도 예뻤습니다. 벌초를 끝낸 홍랑의 묘에는 흰 구철초가 피어나고, 자줏빛 제비꽃들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신사임당의 묘소로 출발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율곡기념관이나 자운서원을 치면 됩니다. 교하에서 법원읍까지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새로 놓여서 거리에 비해 빠르게 갈 수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우리가 잘 알 듯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선생의 어머니입니다. 율곡 선생은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서인(西人) 당파(黨派)의 정신적 출발입니다. 조선을 끝끝내 지배했던 세력이 서인이고 그 분파인 노론(老論)이었기에 율곡 선생의 묘소와 그를 모신 이곳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서인들의 성지였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물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철퇴를 맞았지만 말입니다.)
제가 한시산책에서 신사임당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만 5만 원짜리 지폐에 나올 정도로 사회적으로 밝은 조명을 받는 이를 굳이 저까지 나서서 소개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는 했습니다.
율곡기념관과 자운서원 일대는 여전히 잘 가꾸놓았습니다. 입장료도 받고 있구요. 저는 곧장 묘소로 향했습니다. 배운 게 병인가요? 묘역 입구 안내판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만 탄식이 났습니다. 안내판에는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나라입니다. 자식은 아무리 현달해도 자식이고, 부모는 아무리 못났어도 부모입니다. 그것이 성리학의 질서입니다. 그런 사상체계에서 어떻게 자식이 잘났다고 부모보다 위에 놓습니까. 율곡 선생은 그렇다 치고 성균관 생원(生員)인 그의 형 이선(李璿)은 현달해서 부모보다 위에 묘소를 썼을까요.
신사임당 묘. 뒤로는 맏아들 이선(李璿) 부부와 맨 위에 율곡 선생 부부의 묘가 있다.
잘 알다시피 율곡 선생 묘는 아버지 어머니 묘소보다 위에 있습니다. 보통 부모의 묘를 위에 쓰는 데 이렇게 거꾸로 쓴 경우를 역장(逆葬)이라고 합니다. 역장을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이전에는 역장이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규제하는 예학(禮學)이 일반화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난 다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역장을 금지하였지만 말입니다.
신사임당의 친정은 강릉입니다. 사임당은 결혼 이후에도 주로 친정에서 살았습니다. 율곡 선생도 그곳 경포 호수 근처 오죽헌에서 태어났지요. 사임당은 어머니와 관계가 각별했나봅니다. 떠나기 싫은 강릉을 나서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친정이 까마득히 보이는 대관령에서 지은 시 한 수를 보겠습니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다
백발 성성한 어머니는 강릉에 계시는데
홀로 서울로 떠나는 이 내 마음 아파라
고개 돌려 북촌 마을 한번 바라보는데
흰 구름 나는 저녁 산은 푸르기만 하네
율곡 선생을 모신 자운서원(紫雲書院). 지금도 잘 가꾸어져 있다.
다음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이옥봉(李玉峯)의 묘소로 향했습니다. 이옥봉 묘 근처에 고려시대 원(院, 국립여관인) 중 하나인 혜음원(惠蔭院)을 먼저 들렀습니다. 네 분의 묘소만 답사하려고 했었지만 혜음원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좁은 길을 피해 승용차도 돌릴 겸 겸사겸사 올랐습니다.
이제는 터만 남은 혜음원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여관인 혜음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절도 있었고,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도 있었다고 합니다. 주위를 두른 담장의 폭이 매우 넓은 것으로 봤을 때 굉장히 중요하게 관리된 듯합니다. 지금 보이는 터만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 전국에서 제일 컸다는 양주 회암사지와 매우 닮았기 때문입니다. 구릉지대에 석축을 쌓아서 건물들을 배치한 것이 고려 때 전형적인 양식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곳을 떠나면서 한가한 날 돗자리 하나와 도시락을 들고 혜음원 큰 나무 아래에서 한나절 보내는 것을 꿈꿔봤습니다.
혜음원 터. 구릉지대에 넓게 자리잡았습니다.
이옥봉 묘의 주소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75-15입니다. 네비게이션으로 안내를 받으려면 혜음원지를 입력하고 혜음원 거의 다 온 곳 왼쪽 능선에 있는 무덤군 근처에 주차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옥봉의 묘소로 오르는 길섶에 피어난 코스모스. 옥봉의 혼일까?
이옥봉의 묘가 있는 임천(林川) 조씨(趙氏) 선영 입구는 철대문으로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열쇠를 채우지 않아 누구나 쉽게 답사할 수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철대문을 지나 옥봉의 묘소에 오르는 길섶에 붉고 예쁜 세 송이 코스모스가 보였습니다. 이옥봉의 환생이었을까요. 벌초 한 뒤 부러진 가지에서 줄기를 올리고 붉은 꽃을 피우다니요.
夢魂(몽혼)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꿈결에서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사창에 달빛 드니 슬픔이 많답니다
꿈결에 오고간 것도 흔적이 있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었겠죠
이옥봉의 묘단(시신이 없이 제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 위로 두 번째가 사랑했던 남편 조원(趙瑗)의 묘소이다.
당대에 시와 문장으로 이름났던 조원(趙瑗, 1544년(중종 39)~1595년(선조 28)을 사랑했었던 이옥봉. 신분적인 한계 때문에 첩(妾)이 되었지만 스스로 택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원은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이옥봉을 떠나보냅니다. 그런 낭군을 끝내 잊지 못하고 「夢魂(몽혼)」과 같은 가슴 끊어질 것 같은 그리움이 흠뻑 묻어나는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40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라도 낭군 근처, 나무 빼곡한 장령산이 잘 보이는 볕 좋은 곳에 자리 잡았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 저는 슬프기만 합니다.
이옥봉의 묘에서 지금은 터널이 뚫린 혜음령을 넘으면 고양시입니다. 이제 고양시 원흥동 406-1번지에 있는 일타홍의 묘소로 향합니다.
일타홍(一朶紅)이라는 이름이 특이하죠. ‘한 떨기 붉은 꽃’이라는 뜻입니다. 금산의 기생으로 원래 이름은 취연(翠蓮)입니다. 일타홍은 일종의 별명, 요즘식으로 말하면 예명이랄 수 있습니다. 한시산책에서 한 번 다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남편 심희수(沈喜壽, 1548년(명종 3)∼1622년(광해 14)) 부부 묘 옆에 소박한 제단이 일타홍의 제단입니다. 18세 쯤 심희수를 만나 20년을 같이 살다 심희수의 부임지이자 자신의 고향인 충남 금산에서 숨을 거둡니다.
일타홍은 심희수 앞에서 숨을 거두면서 ‘당신의 선영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하면서 시(詩) 한 수를 남깁니다.
검은 비석이 일타홍의 제단 비석입니다. 오른 쪽 쌍분이 심희수 부부의 묘입니다. 일타홍 제단 비석 뒷면에는 이 두 사람의 마지막 사랑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遺詩(유시)
靜靜新月最分明(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間今夜望(무한세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백년우락기인정)
유언
맑은 밤하늘 초승달 또렷하기도 하구나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맑았겠지
무한한 세상에서 오늘 밤 함께 바라보니
인생 즐거움과 슬픔 정 나눈 이 몇일까
일타홍과 심희수의 시가 적혀 있는 일타홍의 제단 비석 뒷면
일타홍은 심희수의 무릅에 기대 숨을 거두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심으로 사랑한 이는 당신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세인의 비난을 무릅쓰고 일타홍을 상여수레에 싣고 이곳 선영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다가 금강 가에서 가을비를 만났습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심정과 일타홍에 대한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輓章詩(만장시)
一朶芙蓉載輀車(일타부용재이거)
香魂何處去躊躇(향혼하처거주저)
錦江秋雨丹旌濕(금강추우단정습)
疑是佳人別淚餘(의시가인별루여)
고운 님 이별 눈물
한 떨기 연꽃 상여수레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 가을비 붉은 명정 적시우니
아마도 고운 내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일타홍 묘를 끝으로 답사 여행은 끝났습니다. 빛나는 재능과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누구보다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닐까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시인들을 둘러보면서 저는 그들의 사랑 보다는 외로움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빛나는 재능의 천재들의 외로움을 공감면서 저는 거꾸로 위로를 받았다고 하면 지나친 이기심일까요. 그렇지만 비닐봉투처럼 한없이 가벼운 내 삶의 외로움은 못 견딜 게 뭐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도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고경수의 시를 보냅니다.
모든 아픔이 잠든 곳에
- 고경수
그렇다
피다 지는 꽃들도 웃으며 간다
벌초꾼의 낫에 잘리어 온몸이 조각나도
바람 속으로 저미어 가는 것을 안다
마지막 작별의 인사일랑
지켜보는 자의 설픈 몸부림일 뿐이다
이름 없이 피어나
이름 없이 가는
모든 삶들이 그러하듯
마지막 남는 건 이렇게 계속되어진
순간, 순간뿐이었을 것이다
어딘 듯 해진 사연 있어
먹구름빛 즐비어 돋아날지라도
초롱 가슴 웃으며 간다
(『흐린날의 기다림』 도서출판 띠앗, 2005)
2020년 10월 12일
최경순
- Total
- Today
- Yesterday
- 강매석교
- 사가(佐賀)
- 대온실 매화
- 서운노협
- 보광사임도
- 물의 도시 춘천
- 출렁다리
- 삼악산 케이블카
- 마장저수지 출렁다리
- 창경궁 대온실
- 호수공원_복수초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 연희숲속쉼터
- 전태일_따라_걷기
- 이한열기념관
- 이고운횟집
- 행주산성역사누리길
- 전노협
- 서대문구_노동네트워크
- 냉이꽃
- 서대문구_노동자종합지원센터
- 벚꽃마당
- 별꽃
- 사가 1박2일 여행
-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
- 2021년_노동절
- 안산방죽
- 큐슈 사가
- 소양강 안개
- 행주누리길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