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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매미가 운다
1.
요즘 연일 야근으로 몸이 많이 피곤하다.
아침 일찍 마누라하고 함께 출근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잘 안 된다.
오늘 평소보다 30분쯤 늦게 나오니
버스 정류장은 한가하기만 하다.
벌써 뜨거운 습기 후끈한 게 한 여름이다.
웬만한 빌딩만 한 원릉역 앞 플라타너스는 언제 봐도 경이롭다.
저렇게 큰 나무가 바람에 어떻게 견딜까?
주변에 바람막이도 없는데...
텅빈 정류장에서 한가롭게 커다란 플라타너스 바라본다.
어디서 익숙한 소리
찌----- 찌-----
보리매미 소리다.
반갑다.
아니다. 다음 계절이 떠올라 서늘한 이별이 느껴진다.
보리매미가 울고,
말매미, 참매미가 울고,
쓰르라미가 울고,
쓰르라미 울음소리가 힘겨워지고,
다시 보리매미가 울 때쯤이면
들판에는 곡식이 여물어가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뭉게구름 핀 파란 하늘을 채울 것이다.
사실 요즘 나는 매일같이
왜 매미가 울지 않지 하고 생각했다.
집에서 정류장까지 나무들이 많은데...
오늘 보리매미가 운다.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있다.
2.
내가 근무하는 노조 사무실은 냉방이 너무 세다.
아니 나만 세게 느끼는 것 같다.
작년에는 몰랐는데, 올해는 냉방이 싫다.
몸이 얼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 떼의 현장 동지들이 몰려왔다 몰려간다.
한 보따리씩 일감을 주고
어미 주둥이를 처다 보는 새끼 제비들처럼
잦은 눈길로 차례를 독촉한다.
모두들 가고 나니 온 몸이 얼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머리에선 열이 난다.
쌓인 일감은 오늘도 밤 12시 전 퇴근을 막고 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로 일이 안 된다.
(사진 : 2011. 8. 11 고양시 원당 어느 술집에 날아온 참매미)
3.
나는 건물을 나왔다.
사무실 뒤편은 조그마한 공원이다.
이름도 예쁜 중마루공원.
나는 피곤하면 가끔 이 공원을
몇 바퀴씩 돌곤 한다.
조그만 공원이지만 나무들도 제법 있고,
연못과 또랑이 있고,
벤치와 잔디가 있다.
중마루공원에 들어서자 말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어, 하고 있는데, 참매미 소리도 들린다.
보리매미 작은 소리도 들린다.
어, 어제까지는 매미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4.
중마루 공원은 실업자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매일 데모하는 아줌마에게
미안함과 불편함으로 눈길을 주지 못하듯
나는 실업자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쓴다.
한낮인데도 나무 밑에 모여서 소주를 마시고,
벤치에 누워 잠을 잔다.
그들과 나 사이에 가르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이승과 저승처럼 다르기만 하고,
생각이 깊어지면 뿌연 장막이 머리를 감싸고,
풀과 나무를 거쳐서야 세상으로 나온다.
꽃이 만발했던 해당화는
뒤늦게 솟은 줄기에 매달린 두어 꽃송이 피어 있고,
일찍 맺은 열매들은
붉게붉게 읽어간다.
깊은 산속에나 자란다는 마가목은
여물어 열매가 벌써 노랗다.
6월 초부터 잎이 지기 시작하던 벚나무는
매미도 못 보고 잎이 모두 질 줄 알았는데,
오늘 처다 보니
성글어 졌어도 여전히 잎이 많다.
.....
계절의 흐름은 슬픔을 준다.
이별은 늘 그렇게 오는 것이니까.
그래도 남는 것은
그래도 지나가는 것은
그래도 있는 것은
그래도 없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을 꿈꾸던 나는 점점
여린 장자로 변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인슈타인이 그립다.
맑스가 그립다.
뿌연 안개 걷힌 명징한 세계가 그립다.
<2005. 1. 22 입력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2004년 초여름에 쓴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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