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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역사문화산책

풀소리 2023. 7. 17. 18:05

1. 서오릉의 시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서오릉 약도

 

1457년(세조 3) 음력 9월 2일 세조 임금의 세자 의경세자(1438년(세종 20)~1457년(세조 3))가 20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잔병치례는 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죽은 셈입니다. 세조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태조가 묻힌 구리시 동구릉도, 할아버지 태종, 아버지 세종이 묻힌 헌릉도 모두 피하고, 지금 서오릉 경릉 자리에 세자 묘를 택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오릉이 왕실의 무덤이 됩니다.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오른쪽)와 인수대비(왼쪽)가 묻힌 경릉
의경세자의 릉. 세자로 죽었기 때문에 세자 묘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은 4살이고, 나중에 성종 임금이 되는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한 살이었습니다. 경국대전의 왕의계승 서열을 정하는 종법대로라면 월산대군이 세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조 임금은 월산대군의 삼촌이며 8살 된 해명대군을 세자로 지명합니다. 이분이 나중에 예종(1450년(세종 32)~1469년(예종 1년)) 임금으로 즉위합니다.

 

 

세조 임금의 둘째 아들 예종 임금과 인순왕후 한씨의 능 창릉. 이 릉이 들어서고 당시까지 덕수천으로 불리던 하천 이름이 창릉천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종 임금은 등극한 지 1년 2개월 된 1460년 11월 갑자기 승하합니다. 다음 해 서오릉에 묻히는데, 능호가 창릉입니다.

 

 

2. 숙종 14살에 임금으로 등극하다

 

 

장희빈이 등장하는 드라마 탓이 있겠지만, 숙종(1661년(현종 2)~1720년(숙종 46)) 임금을 여인들 치맛자락에 쌓여 우유부단하였던 유약한 임금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은 거의 정반대입니다.

 

 

인조에서 숙종으로 이어지는 가계도입니다. 인조의 계비 장열왕후 조씨는 효종보다도 1살 어립니다. 그렇지만 법률상으로는 어머니입니다. 효종이나 인선왕후 장씨보다 훨씬 오래 사는데, 이들이 죽었을 때 장열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가 그 유명한 '예송논쟁'의 쟁점이었습니다.

 

숙종 임금은 14살에 임금으로 등극합니다. 보통 20살이 될 때까지는 엄마나 할머니가 섭정을 하는데, 숙종 임금은 섭정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를 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물론 숙종이 너무나 영특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가 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가 할머니 뻘인 장열왕후 조씨가 살아있어서 자신이 섭정을 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숙종이 친정을 하게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송시열 초상 - 사진 : 국가문화유산 포털

 

14살 숙종이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 중에 단연 최고는 당시 조선의 실권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송시열은 효종, 현종 대에 실질적인 신하들의 수장이었습니다. 숙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 남인인 허적(許積, 1610(광해군 2)1680(숙종 6))이 영의정이라고는 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송시열의 제자들이 중심인 서인세력에게 있었습니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두 번에 걸친 예송논쟁을 겪으면서 송시열과 서인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송시열의 제자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수흥(金壽興, 1626(인조 4)1690(숙종 16))을 유배보냈을 뿐, 송시열은 죄주지 못했습니다. 14살의 어린 임금. 68살의 노련하고 강력한 세력을 지닌 송시열. 누가 조선의 주인이 될까요.

 

 

3. 소년 임금 숙종 송시열을 넘어서다

 

 

1674(숙종 즉위년) 818일 현종 승하하였습니다. 다음날인 819일 왕세자(숙종)는 허적을 원상(院相)으로 삼습니다.821일에는 원상 허적이 요청하는 형식으로 송시열을 원상으로 삼습니다. 원상은 명목상으로는 새로운 임금이 전 임금의 상중에 정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벼슬입니다. 대단히 명예로운 벼슬임에 틀림없습니다.

 

왕세자(숙종)이 원상으로 모시기 위해 사관(史官)까지 보냈으나 송시열은 단번에 거절합니다. 송시열은 자신이 대죄하고 있다면서 선침(仙寢:선왕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로 자처(自處)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죄인을 자처한 것이지만 실제는 항의의 표시였습니다.

 

 

동구릉에 있는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과 정자각. 인조 때부터 효종, 현종 시대를 거쳐 숙종 전반기까지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반구에 소빙기가 왔습니다. 여름에도 우박이 내리고, 심지어 눈도 왔습니다. 당연히 식량생산이 감소하고 기근이 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현종은 자랑할 만한 치적이 없었습니다. 숙종이 볼 때 현종이 그나마 예제(禮制)를 바로잡은 게 자랑스러운 치적이었습니다. 예제를 바로잡으려면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 구성된 서인과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823, 왕세자(숙종)가 즉위합니다. 같은 날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이 송시열을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영의정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시켰습니다.

 

다음 날인 8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습니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습니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벼슬이 아니라 벌을 달라는 주청이었습니다. 나와 내 제자들과 함께 정치를 하려면 내 말을 절대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압력이었습니다. 바로 어린 국왕 길들이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분위기는 곧 변하기 시작합니다. 917일 정치화(鄭致和, 1609(광해군 1)1677(숙종 3))를 정1품 영중추(領中樞)로 승진시키면서 영중추 송시열을 종1품 판중추(判中樞)로 강등합니다. 그리고 송시열의 제자인 이조 참의 이단하에게 대행 대왕의 시장(諡狀) 및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도록 명령합니다

 

다다음날인 19일에는 인선왕후 국상 때 장열왕후 조씨의 상복 기년복(1년복)을 대공복(9개월복)으로 고쳐 올린 예조판서 조형(趙珩)을 비롯한 예조의 주요 관료들을 모두 귀양 보냅니다. 송시열과 서인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마침 925일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에게 지문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계속 거부하자 숙종은 10 6일 김석주(金錫胄, 1634(인조 12)1684(숙종 10))에게 대신 짓게 합니다. 김석주는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빠입니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수재지만 공작정치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1674(숙종 즉위년) 111일 숙종은 이단하가 지어 올린 대행왕의 행장을 다시 고쳐 쓰게 합니다. 130일 지문·행장 등의 개수에 대하여 이단하와 결단합니다. 

 

이단하는 현종의 행장“(예송논쟁 때) 실대(失對:국왕에게 대답을 잘못함)했다는 이유로 수상(首相:영의정)을 죄주었다고 썼으나 숙종은 다른 의논에 붙었기 때문에 수상을 죄주었다라고 고치라고 명령하엿습니다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예론입니다.

 

이단하는 스승의 이름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번 독촉을 받고 공경(公卿)들이 의례(儀禮)의 네 가지 설(四種之說: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로써 대답했는데 이는 본래 송시열이 인용한(所引) 말이다라고 스승의 이름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숙종은 인용한(所引)의 소()자를 잘못한 오()자로 바꾸라고 명했다. "송시열이 잘못 인용했다"는 문구가 공식화 되는 순간입니다.

 

한 달 쯤 지난 1228일 이단하가 행장의 일로 상소를 올립니다. 임금이 강요해서 고친 것이라며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숙종은 단하는 다만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송자대전(宋子大全), 수차(隨箚) 5)”라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해가 바뀌고, 1675(숙종 1) 113일 드디어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유배 보냅니다. 송시열은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유배지로 떠납니다. 철령 정상에 서서는 굽히지 않게다는 호기로운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1689(숙종 15) 63일 송시열은 마침내 전라도 태인에서 사사(賜死, 사약을 받고 죽음)되었습니다. 향년 83세였습니다.

 

 

4. 강력한 개혁 조치로 영정조 부흥기의 기틀을 닦다

 

 

우선 경제적인 면을 보면,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17)에까지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선조 말년 이래 계속된 사업을 일단 완성하였습니다. 전정(田政)에 있어서 광해군 때의 시작된 양전사업(量田事業)을 계속 추진, 강원도(1709)와 삼남 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양전사업은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소유자와 조세부담자를 조사하던 제도입니다.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주전(鑄錢, 화폐제조)을 본격화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제 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졌습니다.

 

 

숙종 때 본격적으로 제작 유통하였던 상평통보.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먼저 대흥산성(大興山城) · 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였습니다.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또한 효종 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습니다.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습니다.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하여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 1인의 군포 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습니다.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인 무창(茂昌) · 자성(慈城) 2()을 설치, 옛 땅의 회복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졌는데 마침내 인삼 채취 사건을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 정계비(定界碑)를 세웠습니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 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습니다.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아 울릉도의 귀속 문제를 확실히 하였습니다.

 

숙종의 각종 개혁정책은 이후 영조, 정조 시기 경제문화 부흥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5. 숙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서오릉에는 공교롭게도 숙종의 왕비를 지낸 4분이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숙종은 어느 분을 제일 사랑했을까요. 드라마 때문일까요? 숙종의 여인 하면 인현왕후, 장희빈, 동이 숙빈 최씨 이렇게 세 분이 떠오릅니다. 이 세 여인 중 숙종이 가장 사랑한 이는 누구일까요?

 

드라마에서의 장희빈(좌). 동이(중), 인현왕후(우) 세 여인 중 숙종은 누구를 제일 사랑했을까요?

 

예전에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전에 나온 드라마의 영향으로 "인현왕후=현모양처" "장희빈=희대의 악녀" 등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요.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도 장희빈 엄마가 노비였다는 등 말도 안 되는 기록들이 떠돌고 있고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장희빈 가문은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부를 쌓았던 역관, 상인의 중인 집안 출신입니다. 물론 역대 높은 벼슬을 차지한 권문세족의 입장에서는 천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간략한 숙종 가계도. 번호는 왕비의 순서입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 5월 2일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왕비 민씨의 간특한 정상을 참지 못하는 비망기"를 내립니다. 내용을 볼까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볼까요.

 

“-전략 -

예로부터 후비(后妃)가 투기로 인하여 원망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진실로 혹 있었으나, 지금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은 전생(前生)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內殿)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 중략 -

아침저녁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 투기(妬忌)와 원노(怨怒)가 아님이 없는데, 이것도 부족하여 구고(舅姑)의 말씀을 지어내어 과인의 몸을 업신여겼으며,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난(亂)을 얽고 겸하여 화(禍)를 조정에 전가(轉嫁)시켰으니, 그 이른바, ‘서로 핍박하고 서로 알력(軋轢)한다.’고 하는 것과 과연 방불하다. - 후략 - ”

 

처음 내린 비망기는 이보다 내용이 훨씬 많았는데,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면서 신하들과 타협으로 이것만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숙종실록 완성을 책임졌던 이가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閔鎭遠, 1664(현종 5)1736(영조 12))임을 감안했을 때, 이 내용은 인현왕후를 모함하기 위해 없는 내용을 지어낸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용을 보면

1. 투기가 심하다.

2. 희빈을  무고하다.

3. 희빈은 후사가 없고, 인현왕후 자신은 자손이 많을 것이다.

4. 죽은 선왕과 모후가 꿈에서 얘기했다고 지어냈다.

 

<장희빈 약사>

월 일 약 사
현종 즉위년(1659)   탄생. 부 장경, 모 윤씨
숙종6(1680) 4 경신환국으로 서인집권
10 인경왕후 사망. 숙종, 궁녀 장옥정과 만남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장씨를 내쫓음.
숙종 7(1681) 5. 2 인현왕후 민씨 왕비 책봉
숙종 9(1683) 12. 5 명성왕후 사망
숙종 12(1686) 12. 10 장씨 재입궁. ‘숙원으로 책봉
숙종 14(1688)   소의로 봉함
12. 27 왕자 윤(, 경종)을 낳음
숙종 15(1689) 1. 11 윤을 원자로 정함
1. 15 원자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
2. 2 장씨의 3대 추증/ 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
5. 2 인현왕후 민씨 폐위
5. 13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함
숙종 16(1690) 6. 16 원자 윤, 세자 책봉(3)
10. 22 왕비 장씨 정식 책봉례 거행
숙종 20(1694) 4. 1 갑술환국으로 서인 집권
4. 12 민씨 복위와 장씨 폐위
숙종 27(1701) 8. 14 인현왕후 민씨 사망(35)
9. 25 무고의 옥 발생
10. 7 숙종은 후궁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명함
10. 10 장씨 자진(43)
숙종 28(1702) 1. 30 양주 인장리에 장사 지냄
숙종 45(1719) 3. 12 광주 진해촌으로 천장
1969   장씨의 무덤을 경기도 광주에서 서오릉 안으로 이장

 

위는 장희빈의 약사입니다. 장희빈은 세 여인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희빈의 약사를 중심으로 세 여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을 보면 숙종은 인현왕후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서오릉 현재 자리를 잡고, 오른쪽(서쪽)을 비워놓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묻히겠다고요. 정치적인 결정인지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인현왕후는 숙종으로부터 사랑점수 1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숙종의 제5계비 인원왕후 릉에서 바라본 명릉. 멀리 보이는 두 무덤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릉입니다.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숙종은 자신도 죽으면 묻히겠다고 인현왕후 옆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정합니다.

 

그러면 장희빈은 어떨까요. 

장희빈이 죽었을 때 장례를 하루 모자란 5월장을 치릅니다. 왕비는 5월장, 후궁은 3월장입니다. 참고로 죽은 달과 묻힌 달은 날짜와 상관없이 한 달로 칩니다. 장희빈은 왕비에 준하는 장례를 치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자에게 왕비에 준하는 상례를 치르도록 합니다. 

 

숙종은 죽기 1년 전에 장희빈의 묘를 이장합니다. 장지가 좋지 않다고 해서입니다. 이장한 묘를 1969년 다시 서오릉 현재 자리로 이장합니다. 당시 이장을 목격한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관을 감싸고 있는 곽이 옻칠이나 장식이 지금 새로 만든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장한 것입니다.

 

장희빈의 친정의 터전은 지금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일대였습니다. 장희빈이 죽은 뒤에 숙종이 능행차를 다녀오다 이 마을에 갑니다. 그리고 장희빈 친정에서 먹던 물 한 바가지를 떠오라고 해서 한 모금 마시고 갑니다. 이 일로 이 우물이 어수정이 되었고, 마을 이름도 어수정이 되었습니다. 장희빈의 숙종으로부터의 사랑점수는 몇 점일까요?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 대빈묘. 광주 오포면에 50만평에 이르는 능역에 묻혀 있었는데, 1969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마지막은 동이 숙빈 최씨입니다. 인현왕후가 죽은 뒤 장희빈이 무고를 해서 죽었다고 고발한 이가 바로 동이입니다. 과연 이것은 사실일까요? 고발이 들어오자마자 숙종은 장희빈 처소의 궁녀들을 잡아들입니다. 물론 무당이 쓰는 도구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궁녀들은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었던 것이지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은 아니라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고문은 혹독했습니다. 사금파리를 깨어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려 무릎이 우깨질 때까지 지지밟습니다. 그러니 자백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인현왕후가 죽고 고변까지 약 40일이 지났는데,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정말 무고했다면 이 기간에 다 치우지 않았을까요? 시간은 충분했으니까요.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5년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빈으로 강등되어 7년을 더 삽니다. 이 기간 동안 서인들은 장희빈 친정을 악착같이 핍박합니다. 장희빈은 자신의 안위는 물론 세자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자의 안녕을 빌 수밖에요. 장희빈과 처소 궁녀들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그건 그렇고 인현왕후는 죽고, 장희빈도 혐의를 받으니 이제 동이의 세상이 되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하기 전에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조치합니다. 그리고 궁 밖으로 나가 살게 합니다. 

 

동이 숙빈 최씨의 장례는 어땠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숙빈 최씨 장례일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는데, 후궁으로는 평범하게 3월장으로 치릅니다. 그럼 숙종은 진정 동이를 사랑했을까요?

 

 

2023년 7월 18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