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고양시 대자동 용복원(龍腹園)에 묻힌 공주님들을 찾아서

풀소리 2023. 6. 19. 14:18

용복원이라는 지명이 특이하죠. 고양시 일대에 용을 상징하는 지명이 나란히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서오릉 근처를 용두동(龍頭洞)이라 합니다. 그리고 용의 배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고양시 대자동 일대를 용복원(龍腹園)이라고 하고요. 고개 너머에는 용의 꼬리라고 하여 파주시 광탄면에 용미리(龍尾理)가 있습니다.

 

풍수지리가 맞는가요. 용의 머리 부분인 용두동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이 묻혔고, 늘 풍요로운 용의 배 부분에는 왕자와 공주, 고관들이 묻혔습니다. 용의 꼬리인 용미리는 서민들의 무덤인 서울시립묘지가 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끌어다 붙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듯합니다.

 

고양시 대자동 용복원에 묻힌 공주님, 옹주님들의 무덤 지도입니다.

 

용복원에는 6분의 공주, 옹주가 묻혀 있고, 5분의 왕자님이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정소공주는 일제시대까지 이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공주들, 옹주님들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시대순으로요.

 

 

1. 경정공주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우왕 13)~1455(단종 3))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 딸입니다. 17살이 되던 1403년(태종 3년)  개국공신인 영의정 조준의 아들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혼인하였고 이후 1 4녀를 낳았습니다. 혼인 당시 조대림은 모친상을 당한 지 넉 달밖에 지나지 않은 상중이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에서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하려 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태종은 서둘러 공주를 조대림과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경정공주 묘. 내유동 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 가는 길 옆에 있습니다.

 

경정공주는 조선 초기 분이라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8(태종 18), 세자(양녕대군)가 곽선의 첩인 기생 어리(於里)를 사랑하여 몰래 궁중에 들였다가 태종에 의해 쫓겨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어리가 임신하여 세자의 아이를 낳자, 경정공주는 유모를 구해 어리에게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동생 양녕대군이 기행을 벌였어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나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정공주를 모르지만, 서울시 중구에 있는 소공동(小公洞)을 아는 분은 많을 겁니다. 소공동은 태종이 경정공주와 조대림에게 하사한 남별궁(南別宮)이 있었던 곳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은 '작은 공주골', 소공주제(小公主第), 소공주댁(小公主宅)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소공동이라 불리었고,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2. 정소공주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태종 12)~1424(세종 6))는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딸입니다. 위대한 왕이지만 개인적으로 수없는 불행을 겪어야 했던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아버지 태종은 차례로 외삼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후궁을 들여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나아가 장인 심온(沈溫, 1375(우왕 1)~1418(세종 즉위년))를 죽이고 장모인 안씨를 노비로 전락시킵니다.

 

 

정소공주의 무덤에서 나온 태항아리.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죽어가는 정소공주 신

 

서삼릉에 옮겨진 왕자 공주 묘역. 후손이 없는 왕자와 공주들 무덤을 한 군데 모아놓았는데, 일반 공동묘지보다도 작은 봉분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정소공주 묘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이래저래 개인사가 힘들었던 세종대왕은 첫째로 낳은 정소공주를 몹시 사랑했다고 합니다. 정소공주 또한 영리하고 바르게 자랐고요. 그런데 13살 되던 해야 그만 천연두에 걸려 죽숩니다. 세종대왕은 몹시 절망했나 봅니다. 야사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한 달 동안 정소공주의 시신을 끌어앉고 울어 염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죽은 정소공주를 위해 세종대왕은 몸소 제문을 짓습니다.

 

"슬프다, 연약한 여식이여! 내 기도가 모자라서 인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네 목소리, 얼굴은 눈에 어른거리건만 넋은 어디로 갔는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가슴을 치며 슬퍼하노라"

 

일제시대 대자동에 있던 정소공주의 묘를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서삼릉으로 옮겼습니다. 관리보다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한 것인데, 박정희 정권에서도 똑같은 일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3. 경혜공주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세종 18)~1473(성종 4)) 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입니다7세 때인 1441(세종 23) 어머니가 남동생 홍위(弘暐, 단종)를 낳다가 산욕을 이기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없지만 할아버지 세종대왕, 아버지 문종, 삼촌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컸습니다. 15살 되던 1449년(세종 31)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고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녀의 혼사를 서둘렀습니다. 세종대왕이 상을 당하면 만 2년 이상 결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혜공주는 16세가 막 되던 1450년(세종 32) 1 영양위 정종(鄭悰, ?~1461(세조 7))과 급히 혼사를 치렀습니다. 그로부터 52일 만 세종이 승하했습니다. 아슬아슬했습니다.

 

 

경혜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하여 남동생 홍위가 1452(단종 즉위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경혜공주의 나이 18세 때였습니다.

 

본래 미성년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성년에 이를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맡습니다. 한데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앞서 세상을 등졌기에 섭정을 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종과 문종은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료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던 것이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정혜공주 연보
나이 연도 사건
1 1436(세종 18) 탄생
7 1441(세종 23) 어머니 현덕왕후 남동생 단종을 낳고 산욕으로 24세에 사망
16 1450(세종 32) 영양위 정종과 결혼
세종 사망 문종 즉위
18 1452(문종 2) 문종 사망, 단종 즉위
19 1453(단종 1) 수양대군 계유정난 쿠데타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
21 1455(단종 3)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 유배 보냄.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영월에 유배
단종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남
정종 수원으로 이배. 정혜공주 남편을 따라감
22 1456(세조 2) 남편 정종 경기도 광주로 이배
정혜공주 광주에서 아들 정미수 출산
성삼문과 박팽년, 성승, 유응부 등 단종복위 모의 발각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의 가산을 몰수하고 전라도 광주로 이배
23 1457(세조 3)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 단종 복위를 계획 발각
    세조 노산군(단종)을 죽임
27 1461(세조 7) 영양위 정종은 광주에서 승려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
38 1473(성종 4) 1230일 사망
  1476(성종 7) 아들 정미수 문과에 합격. 돈령부 직장, 형조 정랑 등의 벼슬을 역임
  1506(연산 12) 정미수 우찬성 재임 중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 해평부원군에 봉함

 

결국 1453(단종 1) 1010일 밤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권력을 잡습니다. 이를 역사에서는 계유정난이라고 합니다.

 

1455(단종 3) 6월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귀양보냈습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영월에 유배되었습니다. 단종은 구데타 세력에 밀려 결국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어줍니다.

 

세조는 영양위 정종의 유배지를 수원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 경혜공주는 유배지로 남편 정종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1456(세조 2) 경혜공주는 남편의 유배지 경기도 광주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습니다.

 

그해 윤6월 성삼문과 박팽년을 위시한 집현전 유신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시도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었습니다.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갔습니다. 

 

 

경혜공주 묘와 사형당한 남편 정종의 제단

 

1457(세조 3) 9월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등의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었습니다. 결국 세조는 18세 어린 조카 단종을 죽입니다. 

 

1461(세조 7)에는 영양위 정종승려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다고 하여 능지처참 당하고 경혜공주를 순천부의 관노로 삼았습니다. 물론 바로 원위치 되었지만요.

 

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이 죽은 다음 경혜공주는 더 이상 세조와 대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과 딸을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1473년(성종 4) 마지막 날인 12월 30일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공주의 나이 38세였습니다.

 

 

4. 정혜옹주

 

정혜옹주(靜惠翁主, 1490(성종 21)~1507(중종 2))성종의 11녀이자 서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 정씨입니다. 정혜옹주는 오빠 연산군이 광기를 뿜기 시작하면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은 정혜옹주의 생모인 귀인 정씨와 성종의 또다른 후궁인 귀인 엄씨가 연산군의 모후 폐비 윤씨를 폐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여  잔혹하게 살해당합니다. 1주일 뒤 정혜옹주의 오빠 안양군은 충청도 제천에, 봉안군은 경기도 이천으로 유배 보내고, 정혜옹주 또한 황해도 배천으로, 남편 청평위(淸平尉) 한기(韓紀, 1490년(성종 21)~1558년(명종 13))는 안산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정혜옹주는 옹주의 작위조차 박탈당했습니다. 오빠 둘은 모두 사형당했습니다.

 

 

정혜옹주와 청평위 한기의 묘

 

2년 뒤 1506(중종 원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정혜옹주는 유배에서 풀리고 작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와 오빠들의 죽음 등의 충격이 컸을까요. 정혜옹주는 반정  이듬해인 1507(중종 2) 18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합니다.

 

 

5. 숙정옹주

 

숙정옹주(淑靜翁主, 1525(중종 20)~1564(명종 19))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과 후궁 숙의 김씨 사이에서 난 딸입니다. 10세 때인 1534(중종 29) 한 살 위의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과 혼인하였습니다.

 

숙정옹주는 사치했지만 남편 능창위 구한은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아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문인화에도 뛰어났고요. 그러나 1558(명종 13)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숙정옹주와 능창위 구한의 묘소

 

저는 숙정옹주가 왠지 안스러워 올 봄에도 지나는 길에 꽃 한 송이, 술 한 잔 올렸습니다.

 

숙정옹주는 남편 구한이 죽고 난 후 사위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1564(명종 19) 문정왕후에 의해 40세의 나이로 사형되었습니다. 동생 명종 임금은 숙정옹주의 장남 구사근에게 벼슬을 줍니다. 핏줄이 진한 건가요. 아님 누나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6. 숙휘공주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인조 20)~1696(숙종 22))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넷째 딸입니다. 숙휘공주는 아버지 봉림대군이 볼모 생활을 하던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 되던 1653(효종 4) 10, 우참찬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인 동갑내기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 1642(인조 20)~1662(현종 3))에게 하가하였습니다. 정제현과의 사이에서 21녀를 두었으나 차남인 정태일(鄭台一)만이 성장하였습니다

 

 

드라마 마의에서는 쾌활한 공주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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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현종 2) 아들 정태일을 낳았지만, 다음 해에 남편 정제현이 사망하였습니다. 외아들 정태일 또한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당조카인 정건일을 양자로 두었습니다

 

숙휘공주만큼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공주님도 드물 겁니다. 보물 1946호 숙휘신한첩(淑徽宸翰帖)은 숙휘공주가 부모 형제에게 받은 한글 편지가 수록된 서간집입니다. 신한첩에는 숙휘공주의 아버지 효종, 어머니 인선왕후 장씨, 할머니 장렬왕후 조씨, 오빠 현종, 올케 명성왕후 김씨, 조카 숙종 및 조카며느리 인현왕후 민씨에게 받은 한글 편지가 수록되어있습니다. 왕실에서 이렇게 여러 명에게 받은 서간집은 신한첩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숙휘공주가 왕실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숙휘공주가 왕실에서 받은 편지를 모아 만든 서간집 『신한첩(宸翰帖)』

 

대자동 고골마을에 있는 숙휘공주와 인평위 정제현의 합장 묘. 이곳 일대는 고양군청이 있던 곳으로 국유지였는데, 아버지 효종이 숙휘공주에게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신한첩은 숙휘공주의 5대손인 정진석(鄭晋錫) 1802년(순조 2년)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공주의 한글 편지를 서간집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곤(坤)'으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乾)' '곤' 두 책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 6월 19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