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아무도 쓸지 않는 지는 꽃 봄바람이 풀 언덕으로 불어 보내네

풀소리 2022. 12. 16. 11:16

- 허정(虛靜) 대사의 시 「임종게(臨終偈)」에 붙여

 

 

사랑은 2

​- 이정하

​ 

사랑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오직 바다에게로만 달려가는

강물이 되는 일이다.

강물이 되어 너의 바다에

온전히 제 한 몸 내주는 일이다.

 

사랑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고

온몸으로 강물을 맞이하는

바다가 되는 일이다.

바다가 되어 먼 길을 달려온 너를

포근히 감싸주는 일이다.

 

사랑은,

그리하여 하나가 되는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털끝 하나라도 남기지 않고

너에게 주어, 나를 버려

너를 얻는 일이다.

(이정하 시집 『편지』, 책만드는집, 2013년)

 

 

삶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이라면,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오로지 달려가는 강물이 되는 것?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고 온몸으로 강물을 맞이하는 바다가 되는 것?

 

사랑이 쉽지 않은 건 누구나 사랑 받기만 원하기 때문 아닐까요. 상대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길 바라기도 하고요. 하지만 상대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 해도 내게 그 사랑을 받아 빛낼 감광작용이 없다면 사랑은 상대에게만 있지, 내게는 없는 게 아닐까요. 그걸 알면서도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요. 바보 같죠.

 

 

낙동강 하구의 일몰 풍경이다. 강물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오직 바다에게로만 달려간다. 바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고 온몸으로 강물을 맞이한다. 그렇게 하나가 된다.

 

불교에서 사랑은 어떨까요. ()의 세계는 어떨까요. 선의 세계는 분명 꽃들이 활짝 핀 화사한 봄날 계곡일 것 같은데, 안개가 자욱하게 껴 어렴풋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인 것 같습니다. 안타까움을 무릅쓰고, 떠내려 온 복숭아꽃을 따라가는 심정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선승(禪僧)이며 시승(詩僧)인 허정대사(虛靜大師, 1670(현종 11)~1733(영조 9))의 시를 보겠습니다.

 

 

自警(자경)

 

守志堅石(수지견석)

凝神潔氷(응신결빙)

善保虛靜(선보허정)

亦如水澄(역여수증)

 

스스로 경계하다

 

견고한 바위처럼 뜻을 지키고

깨끗한 얼음처럼 정신을 모아

텅 빈 고요함 잘 보존하고

또한 물처럼 맑게 하라

 

 

자기 밖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해진 마음 속 소리를 따르면 스스로 물처럼 맑게 되겠죠.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저도 따라해 보고 싶네요.

 

 

『허정집(虛靜集)』 조선후기 허정 대사의 시와 산문을 엮어 1732년(영조 8)에 간행한 시문집이다.(사진 :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정 대사의 법명(法名)은 법종(法宗)이고 호는 허정(虛靜)입니다. ‘虛靜(허정)’은 도가(道家)가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대사는 이 시의 부제로 도덕경의 구절인 지인(至人)의 마음은 텅 빈 고요함을 잘 보존하여 물처럼 깊고 맑다.(至人之心 善保虛靜 如水淵澄)”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참고로 지인(至人)은 지극히 덕이 높은 사람을 뜻합니다.

 

 

戱示虛影(희시허영)

 

石屋淵源流太古(석옥연원류태고)

幻庵龜谷碧溪聲(환암구곡벽계성)

芙蓉峯下淸虛月(부용봉하청허월)

虛靜堂前虛影明(허정당전허영명)

 

장난삼아 허영에게 보이다

 

돌집에서 솟은 깊은 샘물 태고의 세월을 흘러

허깨비 암자 거북 골짜기에 푸른 시냇물 소리

연꽃 봉우리 아래엔 맑고 허허로운 달님

텅 비고 고요한 집 앞에 빈 그림자 밝구나.

 

 

시는 무릉도원처럼 황홀한 곳을 묘사한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깊이 있는 고승들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요. 이 시를 다르게 번역한 것을 볼까요.

 

 

장남삼아 허영에게 보이다

 

석옥(石屋)의 원원은 태고(太古)에게 전해져

환암(幻庵)과 구곡(龜谷)엔 벽계(碧溪) 소리 들리네

부용(芙蓉) 봉우리 아래 청허(淸虛) 달 떴으니

허정(虛靜) 당 앞엔 허영(虛影)이 밝구나

 

 

석옥(石屋)은 중국의 고승이고, 태고(太古), 환암(幻庵), 구곡(龜谷), 벽계(碧溪), 부용(芙蓉), 청허(淸虛)는 모두 우리나라 선맥(禪脈)을 이어온 고승들의 이름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대부분 뒤의 고승이 앞의 고승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사승(師承) 관계입니다.

 

 

대흥사 전경. 대흥사는 고려 이전에 지어진 사찰이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선·교 양종의 대도량역할을 한 사찰이다.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다. 2018년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탈)

 

고승들은 자신의 법()을 정통으로 이어줄 이를 지정하는데, 상징적으로 의발을 전달하지요. 그렇게 유구하게 이어온 진리의 은 이제 나 허정(虛靜)’에게 이어졌고, 이제 제자인 너 허영(虛影)’이 이어 밝혀야 한다 라며 맺음 합니다. 제목은 장난삼아라고 하지만 결코 장난삼아가 아니겠죠.

 

[참고 : 시어(詩語)와 시에 나오는 인물들]


• 돌집(石屋) : 석옥 청공(石屋 淸珙, 1272년~1352년) 선사를 지칭한다. 남송(南宋) 말 원대(元代) 임제종(臨濟宗)의 종법(宗法)을 이은 고승이다. 고려 말 태고 보우가 그를 찾아가 인가받고 법을 이었다.
• 태고(太古)의 세월 :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년(충령왕 복위 3)~1382년(우왕 8)) 선사를 지칭한다. 46세에 중국으로 가서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석옥 청공에게 인가받았다. 해동 임제종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 허깨비 암자(幻庵) : 환암 혼수(幻庵 混修, 1320년(충숙왕 7)~1392년(태조 1)) 선사를 지칭한다. 나옹 혜근(懶翁 惠勤)으로부터 의발을 물려받았다.
• 거북 골짜기(龜谷) : 구곡 각운(龜谷 覺雲) 선사를 지칭한다. 공민왕이 그 도행을 숭상하여 ‘구곡 각운’이라는 친필을 하사하고, 법호를 하사하였다.
• 푸른 시냇물(碧溪) : 벽계 정심(碧溪 正心) 선사를 지칭한다. 구곡 각운의 법을 이었다. 벽송 지엄(碧松 智儼, 1464년(세조 10)~1534년(중종 29)에게 선을 전하였다.
• 연꽃 봉우리(芙蓉峯) : 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년(성종 16)~1571년(선조 4)) 선사를 지칭한다. 부용은 당호이고, 호는 은암(隱庵)ㆍ연선 도인(蓮船道人)이다. 벽송 지엄을 만나 대오하였다.
• 맑고 허허로운 달님(淸虛月) :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년(중종 15)~1604년(선조 37)) 선사를 지칭한다. 30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병을 모집하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텅 비고 고요한 집(虛靜堂) : 작자 자신을 지칭한다.
• 빈 그림자(虛影) : 상대한 승려를 지칭한다.

 

 

戱贈行脚僧樂玄(희증행각승낙현)

 

山山水水悠悠客(산산수수유유객)

寺寺庵庵處處家(사사암암처처가)

迢迢曲曲嶇嶇路(초초곡곡구구로)

役役匆匆步步過(역역총총보보과)

 

장난삼아 행각승 낙현에게 주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느긋느긋한 나그네요

절은 절이요 암자는 암자니 곳곳마다 집이로다

먼 건 멀고 굽은 건 굽었으니 험하디험한 길이요

일은 일이요 바쁜 건 바쁘니 걸음걸음 지나간다

 

 

뭔가 익숙하지요. 맞아요.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性澈, 1912~1993) 스님이 19801월 종정에 취임하면서 내린 법어(法語) 중에 같은 말이 있습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이 외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示會大衆)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구절은 당나라 임제 의현(臨濟 義玄, 850~867)의 선시 구절인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 산은 산물은 물그대로 두라)로부터 기원하였습니다. 워낙 유명한 문구라 허정 대사 말고도 여러 시인들이 사용했습니다. 일종의 오마주죠. 선시(禪詩)라 해석이 다양할 수 있지만 저는 성철 스님이 해석한 대로 따랐습니다.

 

 

憶中岳下三南久不來(억중악하삼남구불래)

 

惆悵復惆悵(추창부추창)

欲忘還未忘(욕망환미망)

遲遲送夕影(지지송석영)

達夜迎朝光(달야영조광)

 

삼남(三南)으로 내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중악을 생각하며

 

슬프고 또 슬프구려

잊고 싶어도 잊히질 않아

석양의 그림자 더디더디 보내다

밤을 새우고 맞이하는 아침 햇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를까요? 시간은 등속으로 흐를까요? 물리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움 짙으니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빠르기로는 석양의 햇살만한 것도 없으련만, 석양의 그림자가 더디 길어집니다. 밤새 잠조차 들지 못합니다.

 

 

만추의 대흥사승탑전. 허정 대사의 승탑도 이곳에 있다.(사진 : 대흥사)

 

섬세한 감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치 세속 여인네의 시처럼요. 그런데 고승의 시입니다.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건 세속의 거추장스러운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일까요? 암튼 허정 대사의 시들은 감성적인 시들이 많습니다.

 

 

臨終偈(임종게)

 

生前渠於我之影(생전거어아지영)

死後我於渠之影(사후아어거지영)

渠我元來幻化形(거아원래환화형)

不知誰是其眞影(부지수시기진영)

脫殼超然出範圍(탈각초연출범위)

虛空撲落無蹤跡(허공박락무종적)

木人唱拍哩囉囉(목인창박리라라)

石馬倒騎歸自適(석마도기귀자적)

是自適處沒朕跡(시자적처몰짐적)

沒朕跡處眞湼槃(몰짐역처진열반)

眞湼槃者是甚麽(진열반자시심마)

是甚麽者又甚麽(시심마자우심마)

 

임종계

 

생전엔 그대가 내 그림자더니

사후엔 내가 그대의 그림자

그대도 나도 원래 허깨비의 형상

누가 그 참된 모습인지 모르겠구나.

껍질 벗고 초연히 범위를 벗어나

허공마저 때려 부수어 자취 없으니

목인(木人)이 장단 맞춰 부르는 노래 리라라

석마(石馬) 거꾸로 타고서 유유자적 돌아가노라.

유유자적하는 이곳 조짐 없으니

조짐이 사라진 곳이 참된 열반

참된 열반이라니 그것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일까 하는 그것은 또 무엇인가.

 

 

‘신통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내 초상을 그려 나에게 보여 주며 “이것이 스님의 초상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림 뒤에다 몇 자 적는다.’

 

허정 대사가 적었다는 이 시의 내력입니다. 아마도 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직전에 제자들이 초상화를 그려왔나 봅니다.

 

임종계는 고승이 죽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삶을 마감하는 시기에 자신의 삶을 하나의 노래로 규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엔 규정하기 참 어려운 존재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가 아닐까 합니다. ‘는 인식의 주체이므로 모든 인식은 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는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존재한다면 도대체 는 무엇일까요? ‘가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요? ‘열반일까요? ‘열반은 무엇일까요? ‘무엇은 또 무엇일까요?

 

허정 대사는 이 시를 다 짓고는 쯧쯧쯧, 허허허. 한참 있다가 또 허허허 하고는 곧 붓을 던지고 누우셨다.(咄咄咄 噓噓噓 良久 又噓噓噓 即投筆而臥)’고 합니다.

 

 

충청북도 영동 영국사에 있는 높이 3m의 삼층석탑이다.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되는 곳에 속칭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있다. 보물 제535호로 지정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토대 위에 탑을 쌓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토대 위에 무수한 탑을 쌓는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탈)

 

삶은 어떻게 보면 알 수 없는 것아는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토대로 쌓는 탑과 같습니다. 토대부터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어쩜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상이면 어떻습니까. 그게 현재의 인 걸요.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질 덧없는 존재일지라도 지금사랑하고 또 사랑 받고 싶습니다. 그것도 용감하게요. ‘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신경림 시인처럼요.

 

 

황홀한 유폐(幽閉)

- 신경림

네 눈을 통해 나는 네 내부 깊숙한 곳으로 잠입한다.

거기 푸른 숲도 있고 하얀 길도 있고 붉은 꽃밭도 있어 우리는 함께 걷기도 하고 누워 별을 보기도 하고 진종일 뒹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을 안다.

나는 놀라 문을 두드리고 발버둥치지만 너는 눈을 굳게 감은 채 완강히 나를 일상 속으로 되돌려보내기를 거부한다.

 

나는 황홀하다.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년)

 

 

<참고 문헌>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https://kabc.dongguk.edu)

• 『허정 문집, 법종(法宗) 지음 배규범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22년 12월 16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