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화려했으나 뿌리가 깊지 못했던 장희빈의 친정 묘역

풀소리 2022. 11. 18. 17:29

고양시 일산 고봉산의 숨은 보물

 

고봉산은 일산 신도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해발고도 206m로 높지 않지만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제법 우뚝한 형상을 하고 있다. 정상에는 백제시대 산성이 있고,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는데, 지금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 가 볼 수가 없다.

 

그밖에도 고봉산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오래된 절 만경사가 있고, 영천사가 있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어세공(魚世恭), 성운(成運) 등 권문세가 집안의 묘와,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은 대학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선생의 묘가 있다. 홍이상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조상이고, 어세공은 장희빈의 사돈 어유구(魚有龜)의 조상이다.

 

그 중 이야깃거리로 치자면 장희빈 친정 묘역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고봉산의 숨은 보물 장희빈 친정 묘역으로 가보자.

 

 

화려하게 떠올랐던 장희빈 가문

 

장희빈 친정 묘역은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 그곳이 도시화 되어 1974년도에 고봉산으로 이장하였다. 주소는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 96-1이다.

 

 

장희빈 친정 묘역. 중산동 안국고등학교 쪽에서 성석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다.

 

장희빈(1659(효종 10)~1701(숙종 27)의 이름은 옥정(玉貞)이다. 어릴 때 궁녀가 된 옥정은 22살에 승은(承恩, 왕과의 동침)을 입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명문거족 청풍 김씨 출신이다. 명성왕후는 역관 집안 출신 옥정이 승은을 입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궁 밖으로 쫓아냈다. 옥정이 궁으로 다시 들어온 것은 6년 뒤인 1686(숙종 12)이다. 명성왕후가 죽고 3년이나 지나서다.

 

 

묘역 입구에 있는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형의 신도비다. 받침돌인 거북의 크기만 4.2m에 이르는 대작이다. 신도비 뒤로 장희빈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 묘가 보인다.

 

장희빈은 1688(숙종 14) 1227일 드디어 왕자 윤()을 낳았다. 숙종은 나이 30살에 첫 아들을 본 것이다. 숙종은 곧바로 윤을 원자(元子)로 정한다. 후계자로 선포한 것이다. 장희빈의 아버지는 영의정, 할아버지는 좌의정,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 이렇게 3대를 정승으로 높였다. 이른바 3대 추증(追贈)이다. 1689513일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이제 정식 왕비가 된 것이다.

 

장희빈 친정 묘역에는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던 화려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묘역 입구에는 당당한 신도비가 있다.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장형(張炯)의 신도비다. 거대하고 생동감 있는 귀부(龜趺, 거북받침)는 길이 4.2m, 높이 약 1.5m의 대작이다. 이 거대한 신도비와 각종 석물을 설치하기 위해 500명의 역군(役軍)4개월 동안 일했다. 신도비는 좌의정을 지낸 민암(閔黯)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를 지낸 오시복(吳始復) 글씨를 썼다. 머리글 전서는 권규(權珪)가 썼다. 모두 남인(南人)의 핵심인물이다.

 

신도비와 장희빈 아버지, 할아버지 묘소에 있는 비석과 문석인 등 석물은 1690(숙종 16)에 설치되었다. 300년이 지났지만 지금 만든 것처럼 조각이 생생하다. 왕이 직접 내린 돌이라 질이 좋기 때문이다. 조각 수준 또한 일품이다.

 

 

장희재는 장희빈이 죽은 뒤 약 20일 뒤 처형당했다.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는지 혼백(魂魄)을 모신 헛무덤을 만들어놓았다.

 

묘역에는 화려함만 있는 건 아니다. 장희빈이 왕비에서 다시 빈으로 강등되고, 끝내 죽어야 했다. 오빠 장희재는 사형당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지 장희재의 혼백(魂魄)을 모신 헛무덤이 쓸쓸히 구석에 있다.

 

 

장희빈의 어머니는 정말 노비였을까

 

어떤 기록에는 장희빈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다. 조선시대 노비제도엔 종모법(從母法)이 있다. 어머니가 노비면 아버지 신분과 관계없이 자식이 노비가 되는 것이다. 장희빈의 어머니가 노비였다면 종모법에 따라 장희빈이나 오라비 장희재는 노비여야 했다. 그러나 장희재는 당당히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內禁衛) 종사관(從事官)을 지냈다. 장희빈이 승은(承恩)을 입기 전에 말이다. 노비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금위는 궁궐을 수비하는 군대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양반 출신이나 신분이 보장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종사관은 종6품 당당한 무관 벼슬이다.

 

 

새롭게 떠오른 부유한 중인 계급의 상징 장희빈 가문

 

장희빈이 누구인지, 이곳에 묻힌 이들이 누구인지 장희빈의 가계도를 통해 살펴보자. 참고로 붉은 색 이름이 이곳 장희빈 친정 묘역에 묻힌 이들이다.

 

<장희빈 가계도>

먼저 장희빈의 외가를 살펴보자. 장희빈의 외할아버지 윤성립은 일본어 역관으로 사역원 첨정을 지낸 분이다. 일본어 역관 중 최고 직책이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왕조실록에 나라와 맞먹는 부()를 가졌다고 기록된 변승업의 당고모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허생이 사업 밑천 1만 냥을 빌린 변부자가 변승업의 아버지 변응성을 모델로 한 것이다.

 

외삼촌 윤정석은 육의전(六矣廛) 면포전을 운영했던 당대의 재벌이다. 면포전은 당시 화폐 대용으로도 쓰였던 무명과 은을 취급했다. 육의전은 조선시대 서울에 설치된 시전(市廛)으로 전매특권을 지닌 거대한 상단이다. 육의전 중에서 면포전은 비단을 취급했던 춘전(春廛)과 함께 가장 영향력이 컸던 상단이다. 윤정석은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도 지냈다. 의영고는 궁중에서 쓰이는 기름··과일 등의 물품을 관리하던 관서다. 주부는 종6품 벼슬에 불과하지만 의영고의 실질적 책임자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의 묘이다. 양 옆으로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 고씨(高氏)와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윤씨(尹氏)의 묘가 붙어 있다. 고씨가 일찍 죽어 장형은 장희빈의 생모 윤씨와 재혼했다.

 

장희빈 친정 즉, 친가는 어떠한가. 장희빈의 증조할아버지 장수가 처음으로 역관이 되었다. 할아버지 장응인과 큰할아버지 장경인은 뛰어난 역관이었다. 아버지 장형은 역관이었지만 일찍 그만두었고 일찍 죽었다. 당숙인 장현은 역관의 우두머리인 수역(首譯)으로 오래 있으면서 중국을 40여회 다녀왔다. 실록에는 장현을 국중거부(國中巨富)로 칭하고 있다.

 

역관은 중국, 일본과 무역을 독점했다. 조선에서 은과 인삼을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 고급 비단과 사치품, 책 등을 수입했다. 이것의 일부를 일본에 은을 받고 팔았다. 이런 과정에서 막대한 차액이 발생했다. 장희빈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재벌급 부를 지닌 가문이었다. 일부 기록에 천인(賤人)으로 나오는 것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권문세가의 입장에서 말한 것뿐이다.

 

 

인현왕후는 요조숙녀, 장희빈은 희대의 악녀일까

 

드라마에서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라이벌로 묘사한다. 인현왕후를 요조숙녀로,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로 그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그 반대다. 실록에는 인현왕후가 투기의 화신으로 나온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할 때 내린 비망기(備忘記) 일부를 보자.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內殿)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조(宣祖)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도비의 받침돌 거북의 머리 부분이다. 만든 지 300년이 지났지만 지금 만든 것처럼 조각이 생생하다. 숙종이 하사한 좋은 돌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현왕후가 숙종의 아버지, 어머니인 현종과 명성왕후가 꿈속에서 한 말이라며 이렇게 끌어댔다는 것이다. 실록 내용 중 숙원은 장희빈을, ‘내전은 인현왕후 자신을 가리킨다. 나중에 인현왕후를 복위시킬 때 처음 내린 비망기를 대폭 삭제했다. 왕비의 체면을 살리겠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남은 비망기는 인현왕후의 잘못 중 극히 일부만 남은 것이다.

 

다른 기록에 있는 삭제된 비망기 내용 일부를 보자. “원자가 탄생한 뒤에 더욱 불평하고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있으면서 말하기를, '처음에는 여자가 쓰는 모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남자의 모자를 쓴다니 실로 뜻밖이다.' 라고 하였다.” 이게 무슨 뜻인가? 장희빈이 여자 아이를 낳은 뒤 남자 아이하고 바꿨다는 뜻이다. 결국 아이는 숙종의 핏줄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록에는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무고(巫蠱)의 옥()’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장희빈은 숙종의 명에 따라 자결하고, 장희재는 목이 잘린다. 정말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했을까.

 

인현왕후는 1701(숙종 27) 814일 죽는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난 925일 숙빈 최씨가 장희빈의 저주로 인현왕후가 죽었다고 고변한다. 숙빈 최씨는 영조(英祖)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이다. 이 고변으로 일대 피바람이 분다. 장희빈 처소를 수색해 무당이 사용하는 신물(神物)을 찾아낸다. 궁녀들을 끌고 가 혹독하게 고문한다. 궁녀들은 한결같이 세자(장희빈의 아들)의 안녕을 비는 신물이라고 주장한다. 고문이 보통 고문인가. 깨진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올리고 으깨는 압슬(壓膝)형이 가해졌다. 궁녀들은 견디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시나리오 대로다.

 

 

장희빈 할아버지 장응인 묘. 바로 위가 큰할아버지 장경인의 묘다.

 

1694(숙종 20) 4월 남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차지하는 갑술환국이 일어난다. 곧바로 폐위됐던 인현왕후가 복위한다. 중전이 되었던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장희재를 죽이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당숙 장현이 귀양 갔고, 오빠 장희재도 목숨이 위태로웠다. 아들 세자는 어떤가. 나중에 경종(景宗)이 된 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연약했다. 불안한 상황을 지켜본 착한 세자는 울화병까지 생겼다. 장희빈이 기댈 곳은 세자뿐이다. 무당이면 어떻고, 미신이면 어떠랴. 세자만 건강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숙종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누구일까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일찍 죽고, 장희빈이 경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또 다른 권력다툼이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다. 동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현왕후, 장희빈 모두 죽었으니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을까. 드라마와 달리 숙종은 동이를 곧바로 궁 밖으로 내친다.

 

그렇다면 숙종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투기가 심한 인현왕후? 저주로 인현왕후를 죽게 한 장희빈? 장희빈을 무고한 동이? 역사적 사실과 전설로 숙종의 속내를 짐작해보자.

 

왕비가 죽으면 5월장()을 치르고, 후궁이 죽으면 3월장을 치른다. 여기서 5월이나 3월은 죽은 달, 묻힌 달을 포함하는 것이다. 장희빈은 1701(숙종 27) 1010일 죽는다. 그리고 1702130일 묻힌다. 하루만 늦춰졌으면 5월장이다. 세자에게 3년 상()을 치르게 하였다. 모든 게 왕비에 준하는 예우를 했다. 동이는 어떤가. 단출하게 장례를 치렀다.

 

 

장희재의 후손 장정곤의 묘에서 올려다 본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 묘. 장정곤 선생은 불광동에서 이곳으로 묘역을 옮기고 가꾸는데 앞장 섰었다. 그는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7년 뒤 장희빈의 묘소를 광주로 이장한다. 이때 숙종은 모든 정성을 다한다. 장희빈 묘는 1969년 서오릉으로 다시 옮겨온다. 이때 목격한 노인들에 의하면 검은 옷칠한 장희빈의 커다란 관이 마치 새로 만든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고 한다.

 

장희빈 친정 묘역이 있던 불광동에는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지명이 있다. 장희빈이 죽은 뒤 숙종은 능()에 다녀오는 길에 장희빈 친정마을에 들렀다. 그리고 장희빈 친정에서 마시던 우물을 한 그릇 떠오게 하여 마시고 돌아갔다. 그 우물을 사람들은 어수정이라고 불렀고, 후에 마을 이름이 되었다. 숙종은 마지막까지 장희빈을 잊지 못했던 건 아닐까?

 

 

후일담

 

1974년 이장할 때 일이다. 거대한 신도비는 귀부(龜趺, 거북받침)만 약 35톤에 달한다. 당시 육상에는 이 무게를 감당할 크레인이 없어 항구에서 크레인을 떼어와 신도비를 옮길 수 있었다. 장희재의 후손이며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정곤(張貞坤, 1934년~2015년) 선생이 필자에게 직접 건네준 말이다.

 

 

묘역에는 늦가을 들국화 구절초가 예쁘게 피어 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꽃을 피우는 게 바로 정성이겠지.

 

미남 배우 장동건은 장희재의 후손이다. 장희재 막내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겨우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 장희빈을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頗有容色)’고 기록하고 있다. 오빠 장희재, 할아버지 장응인도 외모가 잘 생겼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장희빈의 작은 당숙 장찬(張燦)이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의 부속섬 정금도로 귀양 갔다. 그곳에서 청어를 팔아 거부가 되었다. 돈 버는 것도 내력일까?

 

 

2022. 11. 18.

풀소리 최경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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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통문관지(通文館志)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참고> 본 원고는 고양문화원에서 발간하는 잡지 행주얼』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진은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