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나는 내 눈으로 본 진실을 노래할 뿐이다

풀소리 2022. 11. 9. 11:19

- 이옥(李鈺)의 이언(俚諺, 민요풍 노래)에 붙여

 

 

몸의 중심

- 정세훈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생각하는 뇌? 숨 쉬는 폐? 피 끓는 심장? 정세훈 시인은 뇌도 폐도 심장도 아니라고 한다. 몸의 중심은 마음이 가는 곳이다. 아픈 곳.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이다. 그렇다면 시가 갈 곳, 사람이 갈 곳도 아픈 곳, 상처 난 곳 아닐까?

 

아픔에 다가가듯 인간의 감성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게 시()라고 주장한 조선시대 시인이 있다.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5(순조 15))이다. 그는 남녀의 사랑보다 진실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남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했던 조선시대에 말이다. 그는 여자가 기쁨, 슬픔, 원망 등의 정()에 진실하기 때문에 가장 진실된 시의 재료라고 하였다. 시를 보자.

 

 

염조(艶調) 2

 

歡言自家酒(환언자가주)

儂言自娼家(농언자창가)

如何汗衫上(여하한삼상)

臙脂染作花(연지염작화)

 

당신 말로는 술집에서 왔다지만

내 생각엔 기생집에서 온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서 속적삼 위에

연지가 꽃모양으로 찍혀 있지요?

 

 

현재 전하는 이옥의 시는 한문필사본 예림잡패 藝林雜佩에 수록된 이언(俚諺)66수가 전부다. 이언은 말 그대로 하면 시골말로 지은 시또는 속된 노래민요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목에서 나는 이언민요풍 노래로 옮겼다. 민간에서 지어서 퍼진 민요 자체가 아니라 이옥이 도시 부녀자들의 정서를 민요풍으로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림잡패 藝林雜佩』. 한문필사본으로 「이언인 俚諺引」과 「백가시화초」 등 이옥(李鈺)의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이옥을 연안 이씨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필사한 책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옥은 전주 이씨다.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옥의 시를 쓰는 태도는 그의 시작(詩作) 이론인 이언인(俚諺引)에 잘 나타나 있다. ‘30년이면 세대가 변하고 백리나 떨어져 있으면 풍속이 같지 않다.’며 당대 조선을 표현한 노래가 진실하다고 주장한다. ‘천지만물을 살피는 중에도 남녀 사이의 정보다 진실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자님이 모아 편찬하여 유학자들이 주옥처럼 여기는 시경(詩經)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시경 중 국풍(國風)25편 중 20편이, 위풍(魏風)39편 중 37편이, 정풍(鄭風)21편 중 16편이 남녀 사이의 정을 노래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悱調(비조) 8

 

間我梳頭時(간아소두시)

偸得玉簪兒(투득옥잠아)

留固無用我(유고무용아)

不識贈者誰(불식증자수)

 

내가 빗질을 하는 사이에

옥비녀를 훔쳐 갔네.

내게 두어야 쓸 데는 없지만

누구에게 주려는지 알 수가 없네.

 

 

이옥은 이언(俚諺)을 네 개의 조(調, 노래)로 구분했다. 남녀애정의 내용에 따라 우아한 노래, 요염한 노래, 방탕한 노래, 슬픈 노래가 그것이다. 순서대로 아조(雅調), 염조(艶調), 탕조(宕調), 비조(悱調). 위의 노래는 애환적인 노래 비조 중 여덟 번째 노래다.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을 재배이념으로 삼은 나라다.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게 유학(儒學)인데, 성리학은 그중 가장 극단적이고 원리적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개혁 개방으로 나가지 않고, 내부 단속이 엄격한 나라로 변해갔다.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조차 성리학의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는 극단적인 사회가 되었다.

 

 

종로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충석탑.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백탑(白塔)이라고도 불렀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지식인들이 조선 영조, 정조 때 백탑 아래 모여 시문과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도입하는 선진 사상에 대해 논하였다. 이들을 백탑파(白塔派)라고 한다. 백탑파는 정조의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英祖, 재위 : 1724~1776) 임금 시대부터 이러한 질식할 것 같은 사회분위기에 반항하는 그룹이 나타났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재위 : 1776~1800) 임금 시절에는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이나 그가 속한 백탑파(白塔派), 그리고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李鈺),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등이 그 중심이었다. 이들은 엄숙한 고문(古文)을 거부하고 소설 투의 발랄한 문체를 즐겨 썼다. 젊은 유생들은 환호하며 따라했다. 이옥의 기행문 중흥유기(重興遊記)의 일부분을 보자.

 

 

총론(總論) 1(一則)

 

바람은 잦아들고 이슬은 깨끗하니 8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물은 움직이고 산은 고요하니 북한산은 아름다운 곳이다. 멋지고 훌륭한 몇몇 친구는 모두 아름다운 선비다. 아름다운 선비들이 아름다운 곳을 유람하니 노니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자동(紫峒)을 지나니 아름답고, 세검정에 오르니 아름답고, 승가사의 문루(門樓)에 오르니 아름답고, 문수사의 문에 오르니 아름답고, 대성문에 가니 아름답다. 중흥사(重興寺) 동구에 들어가니 아름답고, 용암봉에 오르니 아름답고, 백운대 아래 기슭에 가니 아름답고, 상운사 동구가 아름답고, 쏟아지는 폭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대서문 또한 아름답고, 서수구(西水口)가 아름답고, 칠유암(七游岩)이 매우 아름답고, 백운동문(白雲峒門)과 청하동문(靑霞峒門)이 아름답고, 산영루(山暎樓)가 빼어나게 아름답다.

- 중략 -

요약하면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훤하게 밝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디높아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빽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함께 하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아름다운 곳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말하노라. “아름답기 때문에 왔도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總論 一則
風枯露潔 八月佳節也 水動山靜 北漢佳境也 豈弟洵美二三子 皆佳士也 以玆游於玆 如之何游之不佳也 過紫峒佳 登洗劍亭佳 登僧伽門樓佳 上文殊門佳 臨大成門佳 入重興峒口佳 登龍岩峰佳 臨白雲下麓佳 祥雲山峒口佳 簾瀑絕佳 大西門亦佳 西水口佳 七游岩極佳 白雲靑霞二峒門佳 山暎樓絕佳 - 中略 -

要之 有幽而佳者 有爽而佳者 有豁而佳者 有危而佳者 有淡而佳者 有縟而佳者 有耐而佳者 有寂而佳者 無往不佳 無與不佳 佳若是其多乎哉 李子曰 佳故來 無是佳 無是來

 

 

어떠한가. 요즘 글 잘하는 사람이 썼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발랄하지 않은가? 이런 이옥의 문체에 젊은 선비들은 열광했다. 과거 급제의 문턱에 있는 성균관 유생들도 따라해 유행이 되었다. 과연 이대로 괜찮았을까?

 

 

단청을 하기 전 가을 산영루(山影樓). 북한산 중흥사 아래 경치 좋은 계곡에 있다. 조선시대 경기도 방어를 책임졌던 총융청(摠戎廳)이 관리하던 누각이다. 이옥은 이곳을 방문해 특별히 아름답다고 했다. 2013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정조 임금은 개혁군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강력한 독재정책을 폈다. 특히 사상과 문예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다. 새로운 것보다는 고문(古文)로 돌아가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雅調(아조) 1

 

郞執木雕鴈(낭집목조안)

妾奉合乾雉(첩봉합건치)

雉嗚雁飛高(치명안고비)

兩情猶末已(양정유미이)

 

서방님은 나무 기러기를 잡고

나는 말린 꿩고기를 바쳤었지요.

그 꿩이 울고 기러기 높이 날도록

두 사람 사랑이 끝없어지이다.

 

 

위 노래는 우아한 노래 아조의 첫 번째 노래다. 이런 우아한 노래도 지을 줄 안다고 정조는 칭찬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런 시풍(詩風) 자체를 싫어했으니까 말이다.

 

정조는 시대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했다. 서양 사상이나 자유로운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천주교 교리를 따르는 윤지충(尹持忠, 1759(영조 35)~1791(정조 15))을 죽이면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박지원이나 이옥처럼 자유로운 소설체 문체를 쓰는 이들을 탄압했다. 그중 성균관 유생인 이옥을 극도로 탄압했다. 요즘 말로 시범케이스였다.

 

 

탕조(宕調) 4

 

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

何人煩製曲

敎儂口長開

 

“서쪽 정자에는 강 위에 달이 떴고

동쪽 누각에는 눈 속에 매화 피었네.”

어떤 이가 번거롭게 이 노래 지어서

나로 하여금 길게 소리 뽑게 하나요.

 

 

위 노래는 방탕한 노래인 탕조 중 네 번째 노래다. 탕조는 기녀들의 입장에서 지은 노래다. 이런 노래는 고전(古典)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정조 마음에 절대로 들 리 없다.

 

 

정조(正祖) 임금의 능 건릉 전경.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는 개혁군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 박해와 문체반정에서 드러나듯 학문과 사상에 철저한 독재정책을 폈다. 학문과 사상의 통제는 결과적으로 사회발전을 가로막았고, 가문독재인 세도정권 수립과 조선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본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이옥은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면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다른 시대 같으면 출세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늘 임금의 꾸지람을 들었다. 문체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군졸로 강등되기도 했다. 당시 선비가 군졸이 된다는 건 치욕이었다. 이옥은 그래도 과거시험을 보아 1796(정조 20) 별시 초시(初試)에 수석인 방수(榜首)를 차지했다. 이때에도 정조 임금은 그의 문체를 문제 삼아 꼴찌인 방말(榜末)에 내려놨다.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대성전은 공자님을 비롯한 증자, 맹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18현인까지 모시는 제사공간이다. 그 앞으로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양 옆으로는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교육기관이다.(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일성록(日省錄)기록에 의하면 초시가 있고 약 50일 뒤 이옥의 이름은 유배 죄인 명단에 보인다. 그리고 정조가 죽던 1800(정조 24)에야 풀려난다. 참고로 일성록은 조선후기 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일지다. 이후에는 이옥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출세는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낙향했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요염한 노래 염조 여덟 번째 노래를 보자.

 

 

염조(艶調) 8

 

未耐鳳仙花(미내봉선화)

先試鳳仙葉(선시봉선엽)

每恐爪甲靑(매공조갑청)

猶作紅爪甲(유작홍조갑)

 

봉선화 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봉선화 잎 그대로 물들여 보았지요.

손톱이 파래질까 걱정했는데

더 예쁘게 붉은 손톱이 되었답니다.  

 

 

참으로 감성적이다. 정조 이런 감성을 탄압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기본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말살되면 독재가 시작되고,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면 사회는 활력이 사라지게 된다. 정조가 죽고 순조(純祖, 재위 : 1800~1834)가 등극하면서 안동 김씨의 가문독재 즉,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된 것이 우연일까? 세도정치를 연 사람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 1765(영조 41)~1832(순조 32))이다. 김조순도 젊었을 때 대궐에서 중국소설에 탐닉하다 정조 임금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랬던 그가 정조 임금을 따라 문체반정에 동참하면서 소설체 문장을 쓰는 이들을 탄압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바라본 일출. 새로 떠오르는 해와 함께 내년에는 축복의 시간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이 가까워지는 즈음 우리는 또 한 번 큰 슬픔을 맞았다. 156명의 젊은이들이 축제를 즐기러 갔다가 압사 당했다. 압사를 막아야 할 국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세월호로 입은 트라우마가 낫지도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슬픔을 잊을 수 있을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분노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까. 국가를 믿을 수 있을까. 부디 환난의 시대가 끝나고 축복의 시간이 하루 속히 오길 바란다.

 

남정림 시인의 축복의 시간을 살리라와 함께.

 

 

축복의 시간을 살리라

- 남정림

 

새해에는 기억하리라

가장 축복 된 시간의 향기만을

연기처럼 옅어지는 

순간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리라  

 

새해에는 사랑하리라

잔바람에 간지럼 타는 꽃잎처럼

자주 깔깔 웃으리라

꾸밈없는 내 모습을 사랑하고

뾰족한 네 모습에 침묵하며

오래 기다려 주리라

 

새해에는 싱싱하게 살리라

희망의 잎맥으로 

어디든 뻗어나가 

푸른 미소로 눅눅한 응달까지

뽀송하게 덮어 주리라

 (남정림 시집 『사랑, 지구 너머의 계절』, 모악, 2021년)

 

 

<참고> 이번 한시산책은 허경진 선생이 옮기고 평민사에서 발행한 문무자 이옥 시집(文無子 李鈺 詩集)을 바탕으로 썼다. 그리고 신영산 선생의 번역도 많은 참고가 되었음을 밝힌다.

 

 

2022년 11월 9일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