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이 기댈 곳은 ‘나’와의 첫 약속이다

풀소리 2022. 2. 10. 20:02

- 조경(趙絅) 선생의 시 「금우(今雨)」에 붙여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에서 온 생존자들」을 들으며

- 황동규

 

죽음 앞에서 파괴되지 않는 것은 아름답다.

전쟁 영화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죽는 인간들은 아름답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범람하지 않고 흐르는

견고한 그대 12음 기법,

그 속을 걸어서 발광체(發光體)가 되는

저 긴 인간 꾸러미.

 

 

무너지지 않고 죽는 인간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잠깐 시의 첫 구절 파괴되지포기하지로 바꿔보았습니다. ‘포기하지라는 말을 놓았을 때에는 조금일지언정 포기의 가능성이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파괴되지라는 말을 놓았을 땐 포기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는, 그래서 어떠한 외압이 닥쳐도 꺾을 수 없는, 다른 생각이 일체 없는 돌처럼 강고함이 보입니다. 외부의 폭력에 의해 죽음이 닥쳤을 때에도 파괴되지 않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죽어가는 이가 바로 무너지지 않고 죽는 인간이겠지요.

 

쇤베르크(1874~1951)의 칸타타(성악곡) 원 제목은 바르샤바의 생존자(A Survivor from Warsaw입니다. 나찌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워낙 유명하여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는 상당히 많은 유태인이 살았습니다. 나찌는 이들을 한 구역으로 몰아넣고 통제했습니다. 이른바 게토입니다. 바르샤바 게토는 50만 명이 수용된 가장 큰 게토였습니다. 유태인을 학살하려는 나찌의 계획과 실행은 치밀했습니다. 수용소로 보낼 명단 작성을 강요받은 유대인 지도자 아담 체르니아쿠프(Adam Czerniaków, 1880-1942)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 게토에 남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침내 19434월 봉기가 있었고, 약 한 달에 걸친 저항 끝에 봉기는 진압됩니다. 봉기군 지도부와 전사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생존자들은 그들의 저항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신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진 이들을요.

 

 

아놀드 쇤베르크가 그린 자화상. 1908년. (사진 : 아놀드 쇤베르크 센터)

 

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고 활동했던 음악가입니다. 그는 유태인으로 나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예술은 내가 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하는것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뻔히 기다리고 있음에도 내가 해야만 하는무엇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 빛나는 인간 정신의 행렬입니다.

 

시작이 조금 비장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시가 좋아진 건 파괴되지 않는 아름다움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파괴되지 않는 아름다음은 죽음과 같은 극적인 순간에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드러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파괴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한시산책의 주인공인 조경(趙絅, 1586(선조 19)~1669(현종 10) 선생 또한 그런 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한 수를 먼저 보겠습니다.

 

 

新移梅樹見花(신이매수견화)

 

常恨梅花開太多(상한매화개태다)

若將桃李競春華(약장도리경춘화)

如今最愛新移樹(여금최애신이수)

半死枝頭點數葩(반사지두점수파)

 

새로 옮겨 심은 매화나무에서 꽃을 보다

 

매화꽃 너무 많이 피는 게 늘 아쉬웠지

복사꽃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투려는 듯해

지금 가장 사랑스러운 건 새로 옮긴 나무

반쯤 죽은 가지 끝 띄엄띄엄 몇 송이 꽃

 

 

옛 선비들은 매화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매화는 추운 초봄에 피는데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조경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가 화려한 복사꽃이나 오얏꽃과 화려함을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조와 절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습니다. 우연히 지난해 옮긴 매화나무를 보니 가지는 반쯤 죽어 있는데, 어느 날 가지 끝에 꽃송이가 하나 둘 보입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절제하는 마음이 이거지. 선비의 마음가짐이 늘 이래야지. 이렇게 무릎을 치며 시를 짓지 않았을까요?

 

 

이른 봄 추운 날씨 속에 피는 매화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조경 선생은 호가 용주(龍洲)입니다. 흔히 용주선생이라고 부릅니다. 1612(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 시절 대북(大北) 정권의 독재 때문에 벼슬을 포기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 재야의 뛰어난 선비)로 천거되었고,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칩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사간원 사간(司諫)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척화를 주장하였습니다. 뛰어난 학문과 경륜으로 학문권력의 핵심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습니다. 64세 때인 1649년 인조 임금이 승하하고 효종 임금이 즉위하였습니다. 조경 선생은 당시 예조판서로 임금의 장례를 책임지는 국장도감(國葬都監)을 맡아 장릉(張陵, 인조의 능)의 지문(誌文, 죽은 이의 행적을 적은 글)을 지었습니다. 이 지문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듬해인 1650(효종 원년) 청나라가 척화신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경 선생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5(선조 28)~1671(현종 12))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 되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정에서 두 선생을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석방을 허락하여 이듬해 풀려났습니다. 이 일로 정승에 한 때 복상(卜相, 정승으로 추천)되었을 정도로 앞길이 창창하던 조경 선생은 실질적으로 벼슬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나 조경 선생은 벼슬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를 하나 보겠습니다.

 

 

遣興(유흥)

 

小雨池塘過(소우지당과)

林花忽滿枝(임화홀만지)

幽人初罷睡(유인초파수)

巢燕政銜泥(소연정함니)

遂性貧誰厭(수성빈수염)

辭榮意自知(사영의자지)

閑吟終永日(한음종영일)

物我摠忘之(물아총망지)

 

흥이 나서

 

가랑비가 연못을 흩뿌리며 지나더니

숲속에는 가득가득 꽃이 피어나네

숨어사는 선비 잠에서 막 깨어나고

제비는 진흙 물어와 둥지를 다듬네

본성을 따를 뿐 가난인들 싫어하랴

부귀영화 버리는 뜻 스스로 아는 걸

날 긴 날 종일 한가로이 읊조리니

세상도 나마저도 모두 다 잊었다네

 

 

한가롭게 전원생활 하는 선비의 눈으로 본 봄날 풍경입니다. 봄비가 흩뿌리며 지난 나 했더니, 산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납니다. 선비는 늦잠에서 깨어나고, 제비는 둥지를 짓느라 바쁩니다. 이만하면 됐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세상도 나도 다 잊는다는 물아총망지(物我摠忘之)’의 대목에서는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느낌이 납니다. 실제로 조경 선생의 시에는 노장(老莊)의 구절에서 따온 글귀가 많이 있습니다.

 

 

봄은 참 신기합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니까요. 봄비가 날리면 새싹이 돋고 온 산이 꽃으로 물듭니다.  

 

조경 선생은 어려서 서인(西人)의 대표적 학자인 월정(月汀) 윤두수(尹斗壽. 1533(중종 28)~1601(선조 34)) 선생에게서 수학하였습니다. 광해군 시절에는 경상도 거창으로 낙향하여 그곳의 큰 선생 모계(茅溪문위(文緯, 1555(명종 9)~1632(인조 9))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이분은 남명(南溟) 조식(曹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선생의 말년 제자입니다.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대부분 북인(北人)이었고, 일부가 남인(南人)이었습니다. 문위 선생은 북인 정권과 거리를 둔 분입니다. 오히려 남인과 가까웠죠. 그러니 조경 선생은 당파에 관계없이 학문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659(효종 10) 효종 임금이 승하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당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살아 계셨는데, 대비가 1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 3년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의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를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고 합니다. 이 논쟁 중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선생이 상소를 올려 서인의 주장을 이종비주(二宗卑主)’ 종통(宗統, 왕위 계승)과 적통(嫡統, 적자와 차자)을 분리해 임금을 비하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윤선도 선생의 상소로 말미암아 예송논쟁은 정치투쟁의 성격을 띱니다. 이 일로 윤선도 선생은 함경도 오지 삼수(三水)로 귀양 갑니다. 1661(현종 1) 76세의 조경 선생은 윤선도 선생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 일로 조경 선생은 완전히 남인(南人)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나라를 위하다가 청나라에 의해 벼슬길이 막혔기에 임금은 조경 선생에게 계속하여 월봉(月俸, 월급)을 지급하였습니다. 이제 서인들의 요구로 월봉마저 중지됩니다. 조경 선생이 80세에 지은 시 한 수를 보겠습니다.

 

 

今雨(금우, 乙巳九月二十四日)

 

今雨非無意(금우비무의)

欲開被霜菊(욕개피상국)

墻根菊數叢(장근국수총)

倏忽動顏色(숙홀동안색

此足慰老夫(차족위노부)

瓮頭酒初熟(옹두주초숙)

嗟爾兒孫輩(차이아손배)

洗酌歌一曲(세작가일곡)

歌是卽歌詩(가시즉가시)

唱酬永今夕(수창영금석)

 

지금 오는 비

(을사년(1665, 현종6) 9월 24일)

 

지금 오는 비 까닭이 있을 터이니

서리 맞은 국화 피게 하려는 게지

담장에 뿌리 내린 국화 몇 줄기

벌써 꽃봉우리 빛이 달라지는구나

이것만도 늙은이 위로하기 족한데

단지 속 새 술이 막 익어가는구나

에루화, 아이들아! 손자들아!

잔을 씻고 노래 한곡 부르려무나

노래 부르고 시를 짓고 노래 부르고

밤새도록 돌아가며 함께 부르자

 

 

서리 내린 늦가을에 비가 내립니다. 서리에 시든 국화는 비를 맞아 빛이 달라지게 살아납니다. 이것만 해도 기쁜데, 마침 단지 속 술도 익어갑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겹치는데, 아니 놀 수 없습니다. 아이들, 손주들을 불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시를 지어야겠습니다.

 

 

국화는 서리가 내리고도 한참을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기만 늦춰질 뿐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시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제 내린 단비로 오늘 반짝 얼굴을 듭니다.

 

금우(今雨)’는 이중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오는 비를 뜻하기도 하지만, ‘새 벗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 예전에는 비가 와도 왔는데(舊雨來) 요즘은 비가 오면 오지 않는다.(今雨不來)’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후로 구우(舊雨)는 옛 벗을, 금우(今雨)는 새 벗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조경 선생이 윤선도 선생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다음 서인들은 임금이 선생에게 주는 월봉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선생이 80세가 되던 16655월 조정 회의에서 남인인 오시수(吳始壽, 1632(인조 10)~1681(숙종 7))가 조경 선생에 대한 월봉 지급을 건의하였고, 서인인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1602(선조 35)~1673(현종 14))가 동조하여 선생에게 다시 월봉을 지급하기로 하였습니다. 여전히 서인들은 선생에 대한 월봉 지급을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선생은 월봉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잊지 않는 조정의 신하가 선생에게는 금우(今雨)’ 즉 새로운 벗 금우(今友)’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눈앞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변하는 희망을 보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조경 선생을 특정 당파의 사람 즉 당인(黨人)으로 분류하는 것은 부당한 면이 많습니다. 선생은 늘 국가를 중심으로 고민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개혁의 성과 중 최고를 꼽으라면 대동법(大同法)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양반 기득권의 부당한 이득을 억제하고, 서민들의 세금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입니다. 당연히 기득권 세력은 저항하였습니다. 조경 선생이 대동법을 실시한 영의정 김육(金堉)에 대한 제문을 보겠습니다. 참고로 김육은 서인 당파의 핵심 가문 인사입니다.

 

아, 공이 영의정의 지위에 있은 여러 해 동안 검소한 덕이 또한 이미 드러났으며 계책을 아뢰는 일 또한 부지런했습니다. 시비를 명백히 밝히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사특한 이를 내친 것 또한 이미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있습니다. 흔들림 없이 서서 몸소 짊어지고 감당하며 뭇사람의 시끄러운 입을 다물게 하고 시종일관 죽음으로 견지하며 놓지 않은 일은 대동법이 아니었습니까. 사마휘(司馬徽)는 이런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이다.”

무릇 누가 대동법이 지금 당장의 시무임을 알았겠습니까.

 

(於!惟公都相位,凡幾年所,儉素之德亦旣著矣,謨猷之告亦旣勤矣。明白是非,進退賢邪,亦旣不勝國人之誦矣。進於此而又有大焉,抑抑有立,以身擔當,關衆口而終始死執不解者,其非大同乎?司馬徽有言曰:“識時務在俊傑。” 夫孰知大同爲當今之時務也哉?)

 

조경 선생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저는 아래의 시에서 조경 선생이 지향했던 세상을 느낍니다.

 

 

柳岸春日(류안춘일)

 

金枝嫋嫋藏鴉密(금지요뇨장아밀)

朝露欲晞映初日(조로욕희영초일)

不是春心偏岸容(불시춘심편안용)

畫工磅礡難描筆(화공방박난묘필)

 

봄날 버드나무 언덕

 

하늘하늘 빽빽한 금빛 가지 까마귀 감추고

아침 이슬 햇살 받아 반짝이며 말라가네

봄 정취는 이 언덕에만 있는 게 아닌지라

광대한 봄 풍경 화공도 그리기 어려우리

 

 

봄은 새싹이 돋고 꽃들이 피어나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만물이 소생하고 생산이 시작되기에 더 아름답기도 합니다. 세상이 봄만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머무는 이곳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봄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조경 선생은 아마도 그런 세상을 꿈 꾼 것 아닐까요.

 

 

봄이 되면 싹이 돋고 꽃들이 핍니다. 봄이 오는 곳은 이곳뿐이 아니겠지요. 온 세상이 모두 봄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당파의 입장에서 조경 선생을 평가합니다.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顯宗, 재위 : 1659~1674)의 실록은 두 번 쓰입니다. 다음에 등극한 숙종(肅宗) 임금 초기에는 남인이 집권하였기에 남인 주도 아래 쓰이고, 1680(숙종 6)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 주도 아래 또 한 번 쓰입니다. 먼저 것이 현종실록(顯宗實錄)이고 뒤의 것이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입니다. 두 실록에 모두 조경 선생에 대한 졸기(卒記, 유력한 신하가 죽었을 때 실록에 실은 그 인물평)가 있는데, 내용이 대조적입니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 기운이 넘쳐 고문(古文)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를 구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크게 시의(時議)에 거슬림을 받아 사특하다고까지 지목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가리켜 사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 병진년(1676년, 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현종실록(顯宗實錄)이』

 

조경은 문장이 화려하고 행실이 있어서 세상에 칭송받았지만, 강퍅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논의가 매우 편벽되었다. 현저하게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작태가 있어 누차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더럽게 여겼다. 경자년(1660년, 현종 1)에 윤선도가 상소하여 예론을 무함했다가 죄를 얻어 쫓겨났는데, 조경은 상소를 올려 구원하면서 심지어는 효종을 위해 윤선도의 견해에 동의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비로소 그의 간악한 실상을 믿게 되었다.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이후 간흉들이 정권을 도둑질하고 조경이 예론에 공로가 있다 하여 묘정에 배향했다. 여론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경신년(1680년, 숙종 6)에 정권이 바뀐 이후 공의가 다시 펴져 묘정에서 내쫓겼다.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지금도 당파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지요? 현재 우리 사회는 언론이 발달했는데도 이런데, 옛날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참고로 묘정(廟庭)에 배향된다는 건 종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으로 임금의 대표적인 신하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신하로써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정치는 갈등을 조화시켜 사회를 지속 발전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며 모든 기득권을 던지고 나온 이들은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좌절하여 떠났고, 기득권에 투항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갈 길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갖 시련에도 여전히 자신과 했던 처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김소월의 시 개여울을 보내며 한시산책을 마칩니다.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2022. 2. 10.

 

풀소리 최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