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행주산성역사누리길
지난 일요일(2018. 7. 8) 행주산성에 갔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책과 관련한 답사를 겸한 여행이었습니다.
행주산성은 제가 특히 좋아했던 곳입니다.
제가 사는 고양시에서 서울시로 나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기도 하고,
예전에 출퇴근 길목에 있어 오고가며 늘 보던 익숙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사유적과 풍성한 숲 그리고 탁 트인 조망 등도 제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행주산성 일원은 역사유적과 경관은 물론 걷기도 좋아 고양시에서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을 조성했고, 경기도에서는 이 길을 '평화누리길'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은 행주산성 입구 대첩문에서 출발합니다.
대첩문을 들어서면 이런 풍경이 나옵니다.
날씨는 덥지만 맑은 하늘이 드러난 일요일이라서 그런가요,
아이들 데리고, 어르신 모시고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입구에 있는 권율 장군 동상입니다.
동상 뒤의 부조는 임진왜란 행주산성 전투에서 함께 한 민, 관, 군, 승려를 표현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낡은 토성에 의지한 겨우 2,300명의 군사와 약 1,000명의 승군만이 지키고 있는 이곳에
3만 명이 넘는 왜군의 군사가 쳐들어 옵니다.
그것도 약 보름 전 명나라 총대장 이여송 장군을 대패시켜 사기가 충천한 왜군이 말입니다.
드디어 왜군이 행주산성으로 집결하고, 이 소식은 주변 조선군에게 신속하게 퍼졌습니다.
강화도 연미정이 있는 월곶포구에 충청도, 경기도 수군이 집결해 있었고, 주변에 의병들이 있었지만 누구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누가 봐도 중과부적이고, 행주산성은 죽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보였으니까요..
<변이중 화차 재현 모습. 화차에는 승자총통을 정면에 14정 측면에 13정씩 양면 도합 총 40정을 배치했다. 1정에 약 15발 내외의 산탄이 발사되니 한번에 40량 X 14정 X 15발 = 8,400발의 총알이 나갈 수 있다. 행주산성 전투가 끝난 뒤 권율 장군은 "실로 화차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다. - 사진 등 : 취월당 유람록에서 인용. 사진 등 사용하게 허락해주신 취월당 김환기 선생님 감사합니다. 취월당 유람기 : http://blog.daum.net/hyangto202/8729731>
그러나 조선군은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권율 장군은 당시 최신식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변이중 화차를 40량(輛, 대)이나 가져 왔고, 조방장 조경 장군은 병사들을 독려해 2중으로 목책을 설치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화차는 그 성능을 뽑냈고, 조선군과 승군 의병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나중에 실탄은 물론 화살도 모두 떨어졌을 때 주변에 있는 돌을 던지며 싸웠습니다. 주변 아낙네들까지 치마에 돌을 나를 정도로 그야말로 민관군의병이 한몸이 되어 싸웠지요.. 행주치마 전설도 이때 생겼구요..
그러나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 대군을 어떻게 돌로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조선군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80세의 노장군 충청수사 정걸 장군이 배 두 척에 화살을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환호했고, 일본군은 사기가 꺾였겠지요. 더욱이 강화도에서 배가 올라온다는 것은 조류가 바뀌어 동작나루까지 올라간다는 밀물이 들어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행주산성 앞 강매들에 그물처럼 얽힌 샛강에 물이 찬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조선군에게 보급이 오고, 혹시 뒤따라 응원군이 올지도 모르고, 샛강에 물이 차면 퇴로가 막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일제히 퇴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행주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기적같은 승리로 끝납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 오른쪽으로는 권율 장군을 모신 충장사가 있습니다.
충장사로 가는 길은 단풍나무 가로수가 빼곡하여 여름에도 시원하고 풍경이 좋습니다.
행주산성 전투 때 주 전장이었던 북문지입니다. 양쪽 잔디가 덮힌 언덕이 토성입니다.
성문도 없고, 목책만 있는 이곳에 3만이 넘는 적군이 처들어 온다니 아무리 정예군이라고 하지만 이곳 조선군은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죽을 자리 찾은 것처럼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는 땅에 떨어졌겠지요. 이때 조방장 조경 장군이 북문지 오른쪽 언덕에 올라가 장졸들에게 일대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내가 들면 우리가 이기고, 못 들면 우리가 진다!'
그러고는 조경 장군이 그 바위를 번쩍 들었답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실제로 3-4톤이나 나가는 바위를 사람이 어떻게 들겠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비상했음을 전하는 전설이겠지요.
조경 장군이 번쩍 들었다고 전해는 바위
암튼 이곳에서 큰 전투만 8번이 치뤄졌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을 겁니다.
옛 전투가 있던 곳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때 죽어간 젊은이들의 붉은 피가 배어서인지 봄이면 북문지 옆 홍매는 붉디 붉은 매화꽃을 한 가득 피웁니다.
북문지 바로 앞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기감천(奇甘泉)입니다. 옛날 이곳에 행주 기(奇)씨가 살았고,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도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기황후도 이 물을 마시며 자랐을 겁니다.
행주 기씨들은 자신들의 발상지가 이곳이라고 여겨서 이곳에 기념비를 세워놨습니다.
우물입니다. 이 우물터 위로 둥그런 옛 우물터가 있습니다. 성문 안에는 이처럼 샘물이 많습니다. 전투에서 물은 무기나 식량 못지 않게 중요하니까요..
북문지로부터는 정상까지 토성이 이어집니다. 토성 주변으로는 토기들 파편이 무수히 보이는데, 백제 때 것부터 신라,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라고 합니다. 토기를 볼 때 이곳 행주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토성길 옆으로 봄이면 붉은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어납니다. 혹시 여름에 비가 올 때 이곳을 찾는다면 신발을 벗고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물 묻은 마사토 굵은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게 기분이 참 좋습니다. 지금은 야자껍질로 만든 덮개를 씌어놔서 느낌이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충의정입니다. 이곳에서는 행주산성 홍보영상을 보여줍니다.
충의정 앞에서 본 북한산입니다. 날이 맑아 멀리 있는 북한산이 한눈에 보입니다.
이곳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가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군데군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부디 지금 남은 이곳 벌판은 아파트 없이 보존되길 바랍니다.
정상에서 본 상류 쪽입니다. 자유로와 한강 너머로 남산과 여의도 고층숲 그리고 멀리 관악산까지 훤히 보입니다.
정상 부분은 최근에 돌로 쌓은 석성이 발견되었습니다. 석성 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 하류입니다. 행주대교가 보이고, 김포대교가 보입니다. 김포대교 너머 멀리 보이는 상대적으로 높은 산은 북한입니다.
기념탑에서 바라본 대첩비와 덕양정 그리고 한강과 방화대교입니다. 방화대교 너머 멀리 세모꼴로 보이는 산이 시흥시의 소래산입니다.
대첩비각 속의 비석이 처음 세워진 대첩비입니다. 1602년에 세워졌으니 이곳 전투가 있은지 9년 뒤, 전란이 끝난 4년 뒤에 세워진 비석입니다.
뒤편의 것은 박정희 정부에서 세운 기념비입니다.
덕양정에서 바라본 한강과 방화대교입니다. 장마끝이라 물이 많습니다. 평소에도 썰물 때문 물이 바다로부터 밀려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80세 노장군 정걸 장군은 썰물을 타고 화살을 가득 실은 배 2척을 끌고 왔을 겁니다.
덕양정에서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진강정이 나옵니다. 강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진강정은 예전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겁니다. 물론 지금 진강정은 콘크리트로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이곳 주변에는 아카시나무들이 빼곡했고, 아카시나무마다 칡덩쿨이 휘감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아카시 꽃이 필때와 한여름 칡꽃이 필 때면 꽃향기가 참 좋던 곳이었는데, 2010년 태풍 콘파스 때 대부분의 아카시나무가 넘어져 아쉽게도 예전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길섶에 보이는 개암입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 주변은 햇볕이 잘 들어서인지 생강나무꽃과 진달래가 고양시에서 가장 먼저 피는 곳이기도 합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은 이렇게 숲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해를 피해 걸을 수 있습니다.
팔각초소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 풍경입니다. 팔각초소는 예전에 군인들의 초소였는데, 군이 철수한 뒤 전망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팔각초소전망대에서 108계단을 내려오면 커다란 공원이 있습니다. 12월 31일 해넘이 행사를 하고, 사철 시민들이 사랑하고 즐겨 찾는 바로 행주산성역사공원입니다.
계단 바로 옆으로는 수자원공사 행주양수장이 있습니다. 이 비석은 양수장 정문 옆에 있는 이가순(李可順) 선생 송덕비입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시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이가순 선생은 고양 능곡에 자라잡은 뒤 가뭄에 시달리는 이곳 주민들을 위해 수로를 만들고, 이곳 한강에서 펌프를 이용해 물길을 열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이가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며 1950년 4월 이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이 송덕비는 고양시 향토유적 제64호이기도 하다.
이간순 선생이 처음 시작한 행주양수장은 현재 용수간선 5조, 35.7km를 통해 송포 벌판과 고양시 논밭은 물론 파주시 산남리 일대까지 3002ha(900만 6000평)에 농업용수를 공급합니다. 공업용으로 일산 열 병합발전소에도 연간 300만 톤에 이르는 발전용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공원에는 고양팔현(高陽八賢)인 추강 남효온 선생과 석탄 이신의 선생, 그리고 선조, 광해군 시대 유명한 시인인 석주 권필 선생의 기념 시비가 있습니다.
이곳 옛 군초소도 전망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고양시에서 공식적으로 활용하는 시정연수원입니다. 공무원과 의원 그리고 시민들이 이곳을 잘 활용해서 보다 행복한 고양시를 만드는 지적 요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정연수원에서 행주산성 이르는 길은 이렇게 키 큰 메타스퀘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행주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입니다.
계단 앞에 요즘 보기 흔하지 않은 무궁화가 피어 있습니다. 나는 이 무궁화를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습니다. 국난극복의 터전 행주산성.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무수한 젊음들. 그렇게 지킨 나라꽃 무궁화. 너무나 자랑스러울 무궁화인데, 왜 나는 무궁화 앞에서 흔쾌하지 않을까 하고요. 태극기가 이상하게 쓰이는 요즘 세태와 더불어 답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길의 끝에서 뒤돌아 봅니다. 왼쪽 가로수는 살구나무입니다. 행주는 살구나무 '행(杏)' 섬 '주(洲)'을 써서 행주(杏洲)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예부터 이곳에는 살구나무가 많았었나 봅니다. 암튼 요즈음 행주산성 일대에 살구나무를 많이 심고 있습니다.
행주산성(幸州山城) '행주'는 다행 '행(幸)' 고을 '주(州)'를 써서 행주(幸州)라고 합니다. 행주는 백제시대의 개백현(皆伯縣)이었는데, 백제의
한씨의 미녀가 안장왕(安藏王)을 이곳에서 맞았으므로 이름을 고쳐서 왕봉(王逢)이라 하였고, 고려에 이르러 드디어 '행주(幸州)'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임금의 행차를 '행행(幸行)'이라고 하는데 이곳이 안장왕이 행행하였던 곳이라고 하여 행주라고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