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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소리의 한시산책 – 백거이(白居易)의 「지상이절(池上二絕)」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이정하의 「낮은 곳으로」
세상에 사랑만큼 가슴 떨리게 하는 게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맑은 거울처럼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상대가 있다면 너무나 행복한 일이겠죠. 거꾸로 내 마음이 맑은 거울처럼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도 벅찬 행복이겠지요. 위의 이정아의 시처럼 말이죠.
누군가 또 누군가에 끌리고, 온전히 사랑받고 싶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예전 중국의 여인들은 좋아하는 사내가 생기면 정표로 연꽃이나 연밥을 따서 주었답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 맘이 있으면 내게로 오라는 것이지요. 참 적극적이죠.
이번 한시산책은 중국의 이러한 풍습을 그린 시로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의 「지상이절(池上二絕)」 중 2절입니다. 백거이의 자(字)는 낙천(樂天)이라 백낙천(白樂天)이라고 주로 부릅니다.
예쁜 소녀 작은 배 저어 와
몰래 흰 연꽃 꺾어 돌아가네
꽃 따러 왔던 걸 어찌 감출꼬
부평초 사이로 뱃길 남았는 걸
小娃撐小艇(소왜탱소정)
偷采白蓮回(투채백련회)
不解藏蹤跡(불해장종적)
浮萍一道開(부평일도개)
짝사랑 하는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지 모르지만 예쁜 소녀가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연못에 홀로 배를 저어 와 흰 연꽃을 땁니다. 소녀는 사랑하는 이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겠지요. 배를 저어 연꽃을 꺾어 갔다는 사실도 다른 이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연꽃을 따서 돌아간 자리에 부평초가 갈라져 배가 왔다 갔음을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걸요.
사실 이미 돌아갔다면 누구의 배였는지 모를 일이지요. 그럼에도 남아 있는 뱃길만으로도 마치 소녀의 배가 왔다갔음을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네요. 이러한 묘사는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면 감추고 싶어도 쉽사리 다른 이에게 들키고 마는 소녀의 달뜬 모습을 보는 것처럼 긴장감을 줍니다.
백거이 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허난설헌의 시가 있습니다. 「채련곡(採漣曲 - 연꽃 따는 노래)」이라는 시입니다. 시를 볼까요.
벽옥처럼 일렁이는 맑은 가을 호수
연꽃 무성한 곳에다 목란배 대었네
임이 보여 물 건너로 연밥 던졌는데
남들에게 들켜서 반종일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란주)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련자)
聊被人知半日羞(료피인지반일수)
백낙천(白樂天)의 「지상이절(池上二絕)」이 은근하다면 허난설헌의 「채련곡(採漣曲)」은 적극적입니다. 분명히 연꽃을 땄으니 누군가에 주었겠지요. 누군가를 주었다는 표현이 없어도요. 허나 허난설헌의 시에는 임에게 직접 연밥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억누르고 살아야만 했기에 난설헌의 자유분방함이 시에 은연중에 표출된 것이겠지요.
이제 8월도 거의 끝나갑니다. 맹위를 떨치던 더위도 한결 가셨고, 연못을 가득 채웠던 연꽃들도 한결 성글어졌습니다. 한 송이 두 송이 연밥을 남긴 채 시들어 갑니다. 더 늦기 전에 연꽃 구경이라도 갈까요. 연꽃을 보는 김에 한 송이 선물이라도 하시죠. 마지막으로 김소월의 「첫사랑」 중 한 구절을 보면서 가슴 떨리던 사랑을 추억해 보시죠.
이제 막 장미가 시들고
다시 무슨 꽃이 피려한다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산너머 갈매하늘이
호수에 가득 담기고
아까부터 오늘은 오고 있었다
김소월 「첫사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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