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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목소리

향기 2

풀소리 2017. 8. 9. 14:01

1.

어제 출근길. 버스에서 내리려고 출입문 쪽으로 옮겼는데, 앞에 선 여인에게서 쿠키 향이 났다. 특이하다.


향기. 난 그 중에서도 사람의 향기를 말하고자 한다. 낯선 이에게서 문득 느끼는 향수나 심지어 쿠키향이 아니라, 마음의 향기를 말이다.


이미 한번 쓴 바 있지만 막상 마음의 향기를 또 쓰려고 하니 두렵기도 하다. 시간이 풍족해도 마찬가지일지 모르지만, 짧은 자투리 시간에 향기로운 이의 향내를 생생하게 살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다. 설령 짧은 인상기라도 남겨 놓는다면, 모아놓았다가 시간이 풍족해진 언젠가는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된 ‘사람의 향기’를 쓸 날이 있을 터이니까 말이다.

 

 

2.

김행규.

독특한 이름의 주인공은 얼마 전까지 우리 노동조합 조직국장이었다. 노조에서 앞장 서 활동하다 1999년에 해고되었던 활동가이다.


그가 소속된 사업장은 작년 9월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이 된 진주 삼성교통이다. 자주관리기업이란 노동자가 운영하는 회사다. 노동계와 학계에서 굉장히 주목받고 있는 자주관리기업은 실상 사업주가 온갖 알맹이를 다 빼먹고, 껍데기만 남은, 아니 빈껍데기에 빚만 잔뜩 남긴, 그야말로 미운 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이나 가져라’ 내던져줄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자주관리기업으로 바뀌기까지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린다. 사업주는 회사에서 빼먹을 대로 빼먹고, 기회만 있으면 내버릴 요량으로 회계를 조작해가며 회사가 넘어가더라도 자신이 챙길 몫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노동자 임금을 체불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 후유증으로 삼성교통은 지금도 약 절반이 신용불량이다. 노동탄압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삼성교통의 경우 노조민주화가 된 1998년 이후 자주관리기업 쟁취 직전까지 노조를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지부장이 테러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로 사망직전까지 갔다가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인간인 상태로 지냈고, 회사가 노조를 노골적으로 탄압해 200명 가까운 조합원이 7명만 남은 적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온전히 몸으로 맞선 이가 김행규다.

 


 

늘 유머가 넘치는 김행규 국장. 밝아진 웃음이 반갑다.

 

 

 

3.

최근 들어 난 김행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농담을 즐기고, 투쟁 현장에서도 트롯트 스타일로 노동가를 부르며 흥을 돋구던 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여유 없이 허둥댔다.


내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깊었으면 저렇게 변했을까 해서였다. 사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음을 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


그는 1999년 해고된 이후 겨우 70- 80만원의 상근비를 받으면서 최근까지 버텨왔다. 결혼을 일찍 해, 그의 큰 아이는 올해 고3이다. 아이에게 현장 노동자로 살자고 해왔지만, 아빠를 따르겠다던 아이는 고3이 되면서 무척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한다. 아이의 바람은 외면하기 힘든 무엇이다.


그는 이런 가정 상황 때문에도 복직을 결심했다. 사실 2004년도 단체교섭에서 노사는 2005년 1월 1일부터 김행규의 원직복직에 합의한 바 있다. 예전 사업주는 약속을 어기고 ‘복직’이 아닌 ‘재입사’를 요구해 복직이 미뤄졌었을 뿐이므로 자주관리기업을 쟁취한 이상 그를 복직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복직을 결심하고부터이다. 복직을 당연히 환영해야 할 동료들 중 상당수가 그의 복직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본조 국장이 어떻게 복직할 수 있느냐’는 등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난 반대를 한 그들의 속내를 안다. 그가 복직할 경우 지부 내에서 세력판도에 변화가 있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겠지...

 

숨길 수 없는 내심을 숨기며 복직을 반대하자니 무리가 따랐다. 그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고, 반대했다. 본조를 함께 엮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들은 오랜 투쟁기간 동안 해고는 물론 유일하게 구속되었던 그의 과거 행적을 공직 출마 등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영웅적 행동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했다.

 


식당 골목 어귀에 잔뜩 열매를 맺은 마가 자라고 있다. 열매가 담장 너머 흙 위가 아니라 이쪽 시멘트 위에 떨어질지라도, 그래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지라도, 가능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지... 우리도 그렇고...

 

 

4.

본조의 강력한 의지와 관리단의 이행으로 복직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다. 늘 여유 있는 모습은 허둥대는 모습으로, 넘치는 유머는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독설로 바꿨다. 사람들은 조금씩 그를 멀리했고, 그럴수록 말수는 늘어갔다. 어느 날 지부에 가보니 그는 마침내 작은 섬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따끔한 충고 이전에 따뜻한 술 한 잔을 받아주고 싶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지난 25일 진주에서 그와 만나 술 한 잔 함께 했다. 표정은 많이 밝아져 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난 겨우 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상처 받더라도 모질어지지는 말라고...


 

<2006. 7. 2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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