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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쯤 된 늦은 밤 동네에 사는, 모 연맹에 상근하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선배님. 술 한잔해요.'

 

나나 그나 술을 좋아하기에 시간과 관계없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느낌이 이상했다.
후배는 고양시 화정 근처에 있었고, 난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서부간선도로 목동 앞을 지나고 있었다. 거리도 거리고, 시간도 시간이라 다음 기회에 마시자고 말하려 했지만, 어느덧 술집을 정하고, 기다리라는 말이 나왔다. 순전히 그놈의 느낌 탓이다.

 

내가 술집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동네에 사는 후배 한 명이 함께 있었고, 둘은 500cc 맥주잔을 반쯤 비운 상태였다.
자리에 앉자 화제는 이내 '민주노총'과 '강승규 수석'으로 돌아갔다.

 

'선배님. 어떻게 할 거예요. 난 민주노총을 벗어나고 싶어요.'

 

그렇다.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서 대안은?
... 없다.

 

'벗어나서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하여간 벗어나고 싶어요.'

 

술잔을 드는 간격이 줄어들고, 한번에 마시는 양이 늘어갔다.
민주노총 쪼끼를 입고 있는 후배의 얼굴은 붉어지고, 발음은 꼬여갔다. 주로 술 때문이겠지만, 술이 아니라도 그럴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난 말이야, 민주노총이 망한다면 민주노총과 함께 침몰할 거야.'
'희망이 없어도요?'
'희망이 없어도. 희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다른 조직적인 대안이나 옮겨 탈 배라도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사랑한 민주노총과 함께 침몰할 거야. 조직적 빚잔치 많이 해봤잖아?'

 

나의 선언 아닌 선언으로 우리들 얘기는 종착점에 다다랐고, 대신 술집을 찾는 고유한 이유에 충실해지기 시작했다.

1시가 넘었다. 비겁한 난 일찍(?) 집으로 가고자 했는데, 후배는 술집 끝나는 시간을 묻는다. 아뿔싸 3시에나 문을 닫는단다.

 

새벽 3시에 집으로 돌아와 골아떨어졌다.

 

... 아픔이, 허무함이, 분노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2005. 10. 1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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